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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독일살이

베를린 주민 되기 미션 성공!

by 미지수

스마트 폰을 가능하면 덜 보고 싶어서 중요한 것들만 빼고 다 알림을 끄고 지낸 지 몇 년째, 빨리 확인하지 않으면 플랏 공고는 순식간에 사라지므로 집 찾기 앱에 알림이 올 때마다 하던 걸 놔두고 곧바로 앱을 봤다. 혹시 몰라서 설정해 둔 라이프치히는 며칠에 하나가 올라올 때, 베를린은 하루에도 열 개 내외로 새 플랏이 올라온다. 매일 조금씩 마음이 조급해진다. 가격대, 크기, 층수, 지역 등을 설정해 둔 백 개의 공고가 있다고 치면, 40%는 WBS(저소득층 증명)라 지원할 수 없다. 50%는 화장실에 창문이 없거나 뭔가가 별로이다. 10%는 지원할 만해서 지원을 한다. 그중 1/3이 공고만으로 봤을 때 아주 마음에 든다. 마음에 쏙 드는 것 중 답장이 오는 경우는... 10%?


그만큼 일단 공고로도 마음에 드는 것을 찾기 어렵고, 사진과 정보로 봤을 때 마음에 드는 것도 결국 아무 연락이 오지 않는다. 대충 괜찮은 것들 중 실제로 찾아가서 봤을 때 집 안, 밖, 혹은 주변이 별로여서 아예 우리가 먼저 여긴 아닌 것 같다고 하고 나온 경우가 7~8번, 답장이 와서 집 보러 오라고 했지만 몇 번 다녀보니 위치가 너무 별로거나 집 주변에 아무것도 없는 경우 등 어차피 살라고 해도 안 살 것 같은 집들은 보러 가지도 않았다. 아무거나 다 보고 다니면 시간과 기력이 너무 소진된다. 정확하진 않지만 열 번은 넘지 않는 것 같다. 그렇게 가서 봤지만 맘에 들지 않았던 것이.


그러다 1899년에 지어진 오래된 건물에 나무 바닥이 깔린 집을 보러 갔다. 베를린에서 집 보러 오라는 연락은 통보다. 몇 월 며칠 몇 시에 오세요. 못 오면 말고. 이런 식이다. 그게 대부분 오후였는데 이 집은 아침 9시 10분에 오랬다. 위치도 주변에 강이 흐르고, 큰 공원도 있고, 슈퍼마켓도 많고, 헬스장도 여러 개, 아시안 슈퍼마켓, 트램, 기차 등 좋았다. 건물 안 천장과 계단에 예쁜 그림이 있고, 계단을 오를 때 삐걱거리는 소리와 오래된 박물관 냄새 같은 게 났다. 천장이 높은 플랏 안으로 들어갔다. 창문이 전부 서향인데 아침임에도 밝았다. 새로 칠한 페인트 냄새인지 오래된 건물의 냄새인지 하는 것이 났다. 커다란 거실, 한 뼘 발코니가 있는 침실을 먼저 둘러봤다. 수리 완료라고 했지만 나무 바닥사이가 많이 벌어져있고, 오래된 두 겹으로 된 나무 창문과 커다란 문은 흰색 페인트로 덕지덕지 칠해져 있었다.


주방까지 나무 바닥이고 벽에 커다란 가스탱크가 있고 가스파이프가 벽을 따라붙어있다. 화장실은 지금 있는 집보다 좁지만 새로 리모델링되어 있고, 새 히터가 설치되었고, 욕조와 창문이 있다. 전기세와 난방비를 제외한 가격이 벌써 1200유로에 가까운데 오래된 집+높은 천장+오래된 나무창문이라 난방비가 꽤 많이 나오겠다... 그래도 집 크기가 넉넉한 편이고, 오래되었지만 집 자체가 예쁘고, 주방도 우리 마음대로 설치할 수 있는 등 여러 장점도 많다. 내가 앞으로 백 년 넘은 집에서 살아볼 기회가 얼마나 있겠나, 박물관처럼 고즈넉한 느낌으로 살아보는 것도 재밌겠다 싶었다. 파트너는 이미 오래된 건물+나무 바닥에 홀려있는 상태였다. 그리고 여태까지 봤던 집 가운데 가장 ‘여기서 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던 집이기도 했다.

IMG_7801.jpeg 집 보러 간 날 찍은 거실 사진

기계적으로 정보들을 다다다 아주 빠른 속도로 내뱉으신 건물 관리자님은 오늘이 금요일이니까 주말 동안 잘 생각해 보고 그래도 관심 있으면 월요일에 이메일을 보내라고 했다. 그전에 보내도 어차피 아무도 안 읽을 거라며. 우리 다음 사람들이 올 수도 있고 집이 마음에 들어서 조금 들떠서 집을 나와 걸어가다가 좀 전에 뭔가 서두르면서 나오는 바람에 건물 안쪽에 자전거 보관소나 쓰레기통 있는 부분을 못 보고 나온 게 생각났다. 다시 건물로 돌아갔는데 이미 관리자는 떠나버렸고, 여기까지 왔을 때 보는 게 낫지 않을까 싶어서 초인종 칸에 있는 건물관리 어쩌고 가 쓰인 벨을 눌렀다. 자초지종을 설명했더니 문이 열리고 땅층 집에서 할머니가 나오시더니 뒷마당을 보여주셨다. 우리가 본 그 집에 살던 사람이 본인 자매인데 엉덩이를 다쳐서 계단을 오를 수 없어서 이사해야 했고, 뒷마당에 아기 새들이 살고 있다, 지하실은 건조하고 깨끗하다는 것 등등 친절하게 이것저것 설명해 주셨다. 자전거로 드나들 수 있는 통로를 보여주시며 본인이 런던에 다녀왔는데 세상에 너무 깨끗하고 아름다웠다며, 베를린은 너무 더럽다고 하시며 너네처럼 좋은 사람들이 이사를 왔으면 좋겠다~ 이런 말까지 하셨다. 그렇게 귀여운 할머니와 이야기를 나누고는 집으로 돌아와 주말 내내 친구들을 만나며 그 집 얘기를 했다.

IMG_7865.jpeg 주말에 친구들을 만나 집얘기하며 먹은 녹차샷 오틀리 아이스크림

솔직히 그 집이 완벽히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앞으로 얼마간 살아보기엔 나쁘지 않을 것 같았고, 파트너는 나무 바닥의 오래된 건물에 신이 난 모양이었다. 주말에 만난 친구가 본인 건물에서 태어나서 얼마 전 병원에서 죽은 할아버지가 살던 집이 비었다. 그 집은 남자가 리모델링을 안 해서 아직도 석탄을 태우는 난방시스템이어서 리모델링을 대대로 하고 있는데 그 집수리가 언제 끝나고 언제 입주가 가능한지 건물관리자에게 물어보겠다고 해줬고, 다른 친구는 건물 1층에 서블렛이 있는데 그 집에 우리가 혹시 집을 못 구하고 들뜨는 기간이 있을 때 단기로 머물 수 있는지 물어봐주었다. 결국 친구 건물의 관리인은 응답이 없고, 심지어 건물에 뜨거운 물이 일주일째 나오지 않는데도 연락이 없단다. 1층 서블렛도 그냥 공고를 올린다는 식이었지만.

IMG_7964.jpeg 슈퍼에서 맛있는 라벤더 음료와 아름다운 선셋장미를 발견

일요일에 월요일 아침에 자동으로 보낼 이메일을 작성했고, 월요일에 이메일이 갔다. 화요일 아침에는 답장이 오겠지 기다렸다. 건물관리회사의 전화응답시간은 오후 1시에 끝나서 12시에 전화했다. 어떻게 된 건지 궁금하다니까 이메일을 읽으라고 했다. 이메일이 와있었는데 못 보고 전화를 한 것이다. 그리고 원한다면 우리가 그 집에서 살아도 된다는 답장을 받았다. 드디어!!! 집을 구했다!!! 이제 집 찾기 앱 안 봐도 된다!!! 세상에... 더 이상 불안에 떨지 않아도 된다!!! 7월 중순이나 8월 초부터 입주해도 된다며, 늦어도 금요일까지 미리 읽어보라고 계약서를 보내준다고 했다. 그래서 알게 되었다. 당장입주라고 해도 적어도 15일~30일은 걸린다는 것을. 이보다 늦었다면 진짜 중간에 붕 뜨는 위험이 있을 수도 있었다. 타이밍이 기가 막혔다.


집 찾기 앱을 삭제하고, 이메일 알림 받기를 취소하고 새집 꾸미기를 상상하며 지내는데 금요일에 계약서가 오지 않았다. 늦어도 금요일이라면서요... 관리자가 바쁘다고 했지만 그래도 아니... 그럴 거면 미리 언질을 주든가... 걱정할 거리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조금 불안했다. 월요일에도 연락이 없어 전화했더니 자기가 바빠서 늦었다며 걱정 말라고 곧 보내준다고 했다. 그리고 다음날인가 계약서가 왔다. 당시 파트너는 회사 때문에 다른 지역에 있었고 일하느라 바빠서 며칠 뒤 집에 돌아와서 같이 봤다. 계약서만 열 장이 넘고, 다른 첨부 서류들은 오래된 집이므로 관리를 잘해줘야 한다. 하루에 4번 이상 환기시키고, 히터를 주기적으로 틀고, 이웃에게 피해가 가는 짓은 하지 말며... 이것은 약간 우리가 오래된 그 집을 돌보고 모시고 살아야 하는 느낌이 들었다. 난방비는 우리가 내는데 월세도 엄청 많이 내고... 이게 뭔가.


계약서를 읽고 금요일에 건물관리회사 사무실로 계약서를 쓰러 갔다. 앱에는 80평방 미터라고 되어 있었고, 우리가 보러 갔을 땐 74평방 미터라고 했는데 계약서에 빈칸으로 되어있다니까 79.85평방 미터라고 적고 계약서를 썼다. 우리 바로 전 세입자가 내던 월세도 계약서에 쓰여 있는데 500유로가 조금 안 되는 금액이었다. 얼마나 오래된 계약서일지 궁금했지만 묻진 않았다. 집주인은 계약서에 서명하는 날에도 못 봤다. 최소 1년 동안 이사 나가지 말 것이 적혀있지만 따로 정해진 기간은 없다. 보증금은 월세의 3배이고 총 3달에 걸쳐 1/3씩 월세와 같이 내도 되고 한꺼번에 내도 된다. 내가 이 계약서를 전부 이해하고 서명했으면 더 좋았겠지만 너무 많은 글씨가 빼곡하게 어려운 단어로 적혀있다.


집에 같이 가서 상태를 체크하고 명시하는 걸 해야 하는데 바쁜 관리자님은 우리에게 키를 주며 주말에 가서 미리 보고, 다음 수요일에 같이 가는 걸로 하기로 했다. 그래서 주말에 우리는 다시 집을 볼 수 있었다. 역시 오래되었고, 페인트칠 냄새가 났다. 벽과 문과 창문에 페인트칠을 했는데 마감이 아주 깔끔하진 않다. 바닥 나무도 상한 부분만 새로 하고 나머지는 그냥 뒀는데 오래돼서 나무가 쪼그라들었나 나무 사이사이가 조금 넓었다. 그걸 다 메워버리고 싶다. 바닥과 벽을 잇는 몰드도 그냥 오래된 것에 페인트칠만 해서 아래가 많이 떠있다. 바닥을 아예 새로 했어야 했는지 바닥이 고르지 못하다. 자세히 보니 그런 것들이 많았다. 이 가격에 이것을...? 소송해서 월세를 내릴 수 없다면 억울할 것 같다. 그럼에도 나무 바닥과 높은 천장과 오래된 창문과 문은 예쁘다. 멀리서 보면 예쁘다. 가구를 들이면 좀 나을 것도 같다. 조급해서 모시고 살아야 하는 오래된 것을 계약한 건지 조금 의심이 들 때도 있지만 또 가서 보면 괜찮은 것 같기도 하고... 마음이 복잡하다.

IMG_8293.jpeg 새로운 동네 거리에 내버려진 소파 세 조각

관리자는 집 평면도가 없다고 했다. 주방과 가구를 배치하고 어떤 크기로 해야 하는지 알아야 하기 때문에 우리가 자로 크기를 일일이 쟀다. 그런데 아무리 더 크게 계산을 해도 크기가 74평방 미터다. 이것은 고소할 때 우리에게 유리하다. 계약서상 크기가 실제 크기보다 10% 이상 크면 중대한 결함으로 임대료 감액을 요구할 수 있다. 방 여기저기에 있는 가스파이프랑 주방 한편을 아주 한자리 차지하고 있는 가스통 때문에 좀 답답하긴 하지만... 주방 설치하고 나면 괜찮겠지... 화장실은 이중창문 중에 하나를 아예 떼버려서 얇은 나무창문 한 겹뿐이다. 아주 여기저기 자잘하게 고칠 부분이 음청 많을 것 같다. 여기서 몇 년 살고 나면 완전 새집으로 가고 싶을 것도 같은 기분이 든다.

IMG_8009.jpeg 새 집에서 가까운 소녀상


안녕하세요, 청명한 가을 잘 지내고 계신가요?

7월에 구한 집얘기 업로드가 이렇게 늦은 이유는 이사를 하느라 아주 정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자꾸 조그만 것들이 눈에 그리고 마음에 걸리적거리긴 하지만 세상에 아주 100% 마음에 드는 집을 찾는 것이 가능할까요? 그럴 순 없다고 단정 지으며 이 정도면 만족하고 있습니다.

빛이 잘 들고, 예쁜 박물관 같은 집... 이사 들어온 지는 한 달짼데, 매일 점점 더 마음에 듭니다.

취향대로 꾸민 공간에서 산다는 게 이렇게 즐거운 일이었군요.

오늘도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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