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리 올드먼, 그의 성실함에 대하여-

영화 <Darkest Hour>

by Rachel
Gary-Oldman-Winston-Churchill.jpg


개리 올드먼을 만난건, 2013년 무렵이었던 것 같다. 정말 뜬금없이 리메이크됐다가 초라하게 사라지고 말았던 영화 ‘로보캅’때였으니까. 라운드테이블이었는데, 개리 올드먼이 들어오기 전 다운타임 중이었던 우리 방에선, 왜 그가 이런 영화에서 재능낭비를 하는가에 대한 이야기가 한참을 오갔다.




article-2556591-1B5C9DAF00000578-108_634x482.jpg "당신은 왜 이런 영화에서 재능 낭비를 하나요?"

잠시 후 개리 올드먼이 들어왔는데, 한 기자가 농담이랍시고 조금은 무례하게 말했다. “Gloomy 한 alcoholic 느낌일 줄 알았는데, 실제로 만나보니 아니시군요.” 개리 올드먼이 약간 정색을 하며 “흠, 그래요? 절대 아닙니다.” 하더니, 이내 온화한 표정에 조용하고 사근사근한 말투로 속삭였다. “저는 happy alcoholic 이에요.” 한바탕 웃고 나니 분위기는 좋아졌지만 딱히 그 영화 ‘로보캅’에 대해, 게다가 개리 올드먼이 맡았던 노턴 박사 역에 대해서는 그리 물어볼 게 없었다. 자연히 인터뷰는 축축 늘어졌다. 그 때 누군가가 용감하게 훅 물었다. “사실 당신의 최근 행보는 좀 의외입니다. 왜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같은 영화가 아니라, 이런 영화를 더 많이 하는거죠?” 방 분위기가 퍽 루즈했는데, 그 질문 하나로 공기의 밀도가 확 높아지던 느낌이 아직도 생생하다.


KakaoTalk_20180301_141928779.jpg 그날의 개리 올드먼 직찍



그리고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담담히 이어졌던 개리 올드먼의 반응은, 단연 내 할리우드 기자 인생에서 가장 빛나고 인상적이었다고 꼽을 수 있는 대답이었다.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를 할 수 있었던 건, 그 동안 내가 ‘해리 포터’나 ‘배트맨’같은 영화에 꾸준히 출연해왔기 때문이에요. 그런 작품들을 통해, 내가 여기 있다는 것, 내가 연기를 하고 있다는 것, 개리 올드먼이란 배우가 있다는 걸 끊임없이 보여줄 때,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의 기회도 비로소 저에게 와 주는 거죠.”

gary-oldman-as-george-smiley-in-tinker-tailor.jpg 개리 올드먼의 최고의 명연 중 하나였던,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의 스마일리


한참을 ‘그래서 개리 올드먼은 언제 나오는거야’ 라며 ‘Darkest Hour’를 보다가, 그 때가 떠올랐다. 미국 대통령과 통화하는 장면에서 완전히 압도당하며, 그날의 ‘로보캅’이 진정 오늘의 ‘다키스트 아워’의 밑거름이 되었나 싶어 작은 전율을 느낀다. 개리 올드먼, 이 위대한 배우는 무시무시한 연기에 앞서 몹시도 성실한 배우다. 하여 그에게 또 다른 스마일리가, 또 다른 윈스턴 처칠이 올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05-Gary-Oldman-1024x683.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