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이 넘어가면서 나는 정서적, 심리적으로 몹시 취약했다. 나 뿐만이 아니라 내 주변 미혼 친구들 대부분 그랬다. 아마도 대한민국에서 미혼으로 살아가는 서른의 여자들은 무슨 말인지 이해할 것이다.
친구들은 하나 둘씩 결혼을 하고, 대화 주제는 결혼, 육아로 바뀌기 시작했다. 나도 빨리 결혼해서 부모님의 숙제를 해결해 드리고 싶었다. 회사에서는 식사 시간마다 남자친구가 없을 때는 "일이 뭐가 중요하냐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해야지", 남자친구가 있을 땐 "결혼은 언제하냐, 남친이 결혼하자고 안 하냐, 그런 놈이랑은 헤어져라"라고 아저씨 오지라퍼들에게 테러를 당했다. 오지라퍼들은 회사에 있는 40, 50대 싱글 여자 선배들을 들먹이며 "너 그러다가는 저렇게 된다"라는 말까지 덧붙였는데, 뜬금 없이 소환 당한 그 선배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솔직히 그 말을 듣고 더욱 더 불안해졌던 것은 사실이다.
나는 삼십대도 당연히 함께 할 것만 같았던, 내가 정말로 온 힘을 다해 사랑했던 남자친구와 스물아홉살 가을에 예상치 못하게 헤어졌다. 그리고 두 달 후 서른을 맞이했다. 40, 50이 되어도 아마 그렇겠지만 나이의 앞자리 숫자가 바뀐다는 것은 그냥 한 살 나이를 먹는 것과는 다른 어떠한 무게감이 있다. 서른의 그 무게감은 결혼에 대한 압박과 스트레스로 변질되었다. 어차피 결혼도 하지 않을 놈 때문에 나의 꽃다운 이십대를 허비했고, 그놈 때문에 서른이 되기 전에 결혼하겠다는 나의 중차대한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으며, 결국 나는 노처녀가 되어 버렸다(라고 당시 생각했다. 지금 생각하면 서른은 정말 어린데...). 망할놈. 나는 그를 잊고 결혼을 위한 노력에 박차를 가하기로 했다.
그런데 삽십대의 연애는 예전과는 달리 내 맘 같지 않았다. 소개팅에서는 소위 말하는 스펙 좋은 사람들을 찾기는 그렇게 어렵지 않았는데 그들 대부분은 뭐랄까 굉장히 일반적이지 않았다. 당시 친구들과 누가 누가 더 이상한 사람을 만나나 배틀이 붙을 정도였다.
소개팅남 중 한 사람은 (자기 딴에는 유머라고 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내가 잠시 화장실에 다녀오겠다고 하자, "앞으로 화장실에 가고 싶으면 왼손을 드세요. 제가 싫으시면 오른손을 드시구요."라고 했다. 나는 그 즉시 오른손을 들고 싶었다. 피자와 파스타를 주문하여 셰어 했는데, 나는 그 자리에서 최대한 빨리 일어나기 위해서 피자 한 판과 파스타 한그릇을 40분만에 흡입했다. 그는 말을 하느라(대부분 대체 어떤 리액션을 해야 할지 난감한 드립들의 향연이었다) 얼마 먹지 못했다. "정말 배고프셨나봐요", "네, 제가 원래 양이 많아요." 이런 소개팅을 하고 집으로 터덜터덜 돌아오는 길에서는 항상 눈물이 났다. 노처녀 아줌마(서른이 노처녀라니...아줌마라니...)가 되어 말도 안 되는 남자와 마주 앉아 황금같은 주말의 시간을 보내야 하는 나의 현실이 너무 슬펐고, 20대의 알콩달콩 꽁냥꽁냥했던 연애들이 몹시도 그리웠다. 맛집 리스트만 늘어갔고, 나는 점차 지쳐갔다.
그 시절 친구들과 나의 화두는 '대체 정상인 찾기가 왜 이렇게 힘드냐'는 것이었다. 조건 좋은 남자는 바라지도 않으니 20대 때 연애했던 그 오빠들처럼 착하고 대화가 잘 통하는 일반적인 감성을 가진 이를 찾고 싶었다. 짧은 만남과 헤어짐을 몇 차례 반복하면서 '결혼 못함'에 대한 공포감은 더 커져갔다.
그러던 와중에 한 남자를 만나게 되었는데, 그는 내가 찾던 '정상인'이었다. 착한 것 같았고, 내가 이야기하는 것에 웃으며 호응도 잘 해주었다. 뜬금없이 오른손을 들라고 하지도 않았다. 조건적으로는 뛰어나진 않았지만 과락(사법시험에서는 과락제도가 있었다. 각 과목별 점수를 합산하여 상대평가로 합격자를 선발하되, 총점이 아무리 높아도 한 과목이라도 40점에 미달하면 불합격 처리된다)은 없었다. 친구들도 '레어템이다, 보기 드문 훈남이다.' 하고 동조해 주었다.
그런데 대체 왜 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와의 시간이 별로 흥이 나지 않았다. 밥 먹고 커피 마시고 영화 보고. 다 좋은데 그 시간이 재미가 없었다. 나는 학교 다닐 때부터 연애를 하면 남자친구에게 올인하는 스타일이었다. 남자친구와 같이 밥먹고 얘기하고 놀러다니고 시시콜콜 일상 얘기를 하고 밤늦도록 통화하고 하는 것이 너무 재미 있었다. 왜 주변에도 연애하면 갑자기 친구들이랑은 연락두절 되는 애들 한 두명씩 있지 않나(이별하면 다시 돌아오고)...그런 배은망덕한 것이 바로 나였다. 하지만 그와의 시간은 그렇지 않았다. 심심하고 무료했다. 밥 먹다가, 카페에서 침묵의 시간이 흐르는 경우도 많았다. 그렇다고 핵노잼까지는 아니었고 못 견딜 정도는 아니었기 때문에 안 맞는다고 단정하기도 어려웠다. 그냥 애매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갑자기' 결혼을 하자고 했다. 나는 그에 대한 확신도 없었고, 부모님도 그를 탐탁치 않아 하셨기 때문에 꽤 오랜시간 망설였다. 혼자 고민도 많이 했고, 결혼 선배들에게도 대체 어떤 마음이 들어야 결혼을 결심하게 되는 것인지, 결혼은 어떤 남자와 해야 하는 것인지 조언도 많이 구했다.
"여자는 결혼식장 들어가는 순간까지 고민해. 나도 그랬어. 서른 넘어서의 결혼은 다 그런 것 같아"
"그 놈이 그놈이다. 효리 언니의 명언 몰라? 무난한 것 같으면 그냥 해. 남편감으로는 무난한게 최고야."
"여자는 자기 좋다고 하는 남자랑 결혼해야 하는 거야. 그게 편해."
"너 20대 때 재미 찾다가 어떻게 됐냐? 사랑 타령하다가 어떻게 됐어? 재미는 코미디 프로에서 찾아. 왜 남자한테 재미를 찾으려고 해? 너 아직도 정신 못 차렸구나"
그는 점점 조급해했다. 시간을 더 줄 수 없으니 결혼하지 않을거면 헤어지자고 했다(그의 결혼 제안은 나중에 알고 보니 그의 부모의 반복된 푸쉬로 인한 것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도 중간에서 참 힘들었을 것 같다). 나는 헤어지고 싶지는 않았다. 죽고 못살 정도로 좋아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나는 서른 둘의 나는 몹시 불안정했고, 외로웠다. 누군가와 함께 있는 이 현상을 유지하고 싶었고 또다시 혼자가 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점점 늙어가고 괜찮은 사람 만날 수 있는 확률은 점점 떨어지는데(이건 서른 이후의 소개팅 참사들에서 이미 입증되었다), 지금 헤어진다고 더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 훗날 지금 이 순간, 이 결정을 후회하게 되면 어떡하지. 그래, 서른 넘어서 결혼하는데, 철 없이 사랑타령 할 순 없지. 모름지기 어른의 연애란 이렇게 밍숭맹숭한 걸거야. 나 좋다고 이렇게 결혼 하자는데(이건 나중에 사실이 아니었던 것으로 판명되었다), 잘해 주겠지. 유리한 조언들만 모아서 내 선택을 합리화했다(아, 그때 장안동 할머니의 조언을 무시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래, 하자."
몇 달 후 우리는 결혼을 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이혼했다.
짧은 결혼생활을 통해 나는 비로소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되었다. 너무나도 값비싼 깨달음이었다. 나는 내가 정말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어야 행복한 사람이었다. 나는 꽁냥꽁냥 소소한 대화가 좋고, 쿵하면 짝하고 케미 터지게 맞받아 쳐줄 수 있는 사람과의 재미가 필요한 사람이었다. 끝까지 고민이 된다면 그건 정말 아닌 거였다. 그건 내 마음이 마지막까지 발악을 하며 주는 시그널이었다. 그리고 그놈이 그놈인 것도 아니었다(효리언니 책임져요...).
결혼생활은 처음부터 밍숭맹숭했고, 때로는 지루했다. 거기에 결혼에서 오는 의무들만 추가되었다. 매일 맨밥만 먹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때로는 목이 막혔다. '이러다가 영영 결혼 못하는게 아닐까' 하는 불안감만 해소되었을 뿐, 나의 행복도는 오히려 하락했다. 더 행복해지려고 결혼했는데 나는 몇 배로 불행해졌다. 쭉쭉 빠져가는 몸무게가 그걸 말해주었다(솔직히 당시에는 살 빠졌다고 좋아했다...꽉 끼어 뱃살을 드러내던 정장 치마가 주먹 하나가 더 들어가고 빙빙 돌아가는 그 기분이란!). 결혼 생활에는 누구나 크고 작은 위기들이 있다고 하지 않나. 그런 위기들을 다들 사랑했던 기억으로 또는 자식을 바라보며 이겨 낸다고들 하던데. 그와 나에게는 진정으로 사랑했던 기억도, 바라볼 자식도 없었기 때문에 쉽게 손을 놓았던 것 같다. 우리의 결혼은 노처녀로 늙어 죽는 것에 대한 공포감과 부모가 바라는 여자와 결혼하려는 효심의 결합, 그게 전부였다.
예전의 나는 누군가와 헤어지면 그와의 행복했던 기억 때문에 힘들었고 또 행복했다. 함께 갔던 곳을 지나가거나 추억의 노래가 흘러 나온다거나 하면 그 시절이 떠올라 슬퍼졌고, 또 '그땐 그랬지' 하며 마음껏 감상에 빠질 수 있어서 행복했다. 그런데 이번엔 남은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공허했던 결혼생활만큼 그 끝도 허무했다. 기억을 소환할 촉매제도 딱히 없고, 소환될 기억랄 것도 별게 없었다. 둘 만의 inside joke도, 함께 들었던 노래도, 함께 나누었던 이야기도 없었다. 분명히 만나서 밥먹고 커피마시고 영화보고 했는데.
회사 후배가 회식 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전 언니가 청첩장 줄 때 '이 언니 왜 이렇게 합리화하지' 좀 이상했어요. 구 남친한테 너무 데여서 좋아하지도 않는 남자랑 홧김에 결혼하는건가 싶기도 하고. 솔직히 언니 결혼식에서도 이게 정말 실화인가 싶었어요."
회식이 끝난 후 타다를 타고 혼자 집에 오는데 정말 이 모든 사태가 구 남친으로부터 비롯된 것인가 열받기도 하고, 서럽기도 하고, 내 꼬라지가 너무 한심하기도 하고, 그런데 솔직히 원망할 대상도 없고 너무 서글펐다. 눈물이 났다. 술김이라는 핑계로 집에 가는 20분 내내 소리내어 엉엉 울었고(여기서 의문의 피해자는 타다 아저씨...죄송합니다), 내려서도 경비실 앞에 쭈그리고 앉아 그렇게 한참을 울었다.
내동생은 내가 너무 모범생이라 이혼을 하게 된 것 같다고 말한다. 나는 어릴 때부터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사회에서 요구하는 기준에 맞추어 살아가려고 노력했고, 운이 좋게도 항상 그렇게 됐다. 공부를 열심히 해서 좋은 학교를 가야 했던 학생 때, 나는 밤낮없이 죽어라 공부해서 외고에 갔고, 좋은 대학도 가서 사법고시까지 합격했다. 사법연수원에서도 좋은 성적을 받아야 판사, 검사, 대형로펌에 갈수 있다고 해서 또 코피 터지게 공부했고 결국 운 좋게도 원하는 직업을 갖게 되었다. 나는 살면서 단 한 번도 사회가 시기별로 정해놓은 퀘스트(quest)를 깨지 못한 적이 없었고, 그 누구보다 모범적으로 클리어(Clear) 했다. 그래서였을까. 서른이 넘어 갔는데 결혼을 하지 않은 나 자신이 스스로 '문제'라고 여겨졌고, 그것을 빨리 '해결'하여 다시 정도(正道)로 돌아오고 싶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하지만 그런 나의 조바심은 성급하고 잘못된 판단을 불렀고, 나는 오히려 그 누구보다도 확실하게 정도(正道)를 이탈하게 되었다.
나의 이 모범생 병과 스스로에 대한 주제파악의 실패는 결국 나를 이혼으로 이끌었다. 난 멜로가 체질이었다. 모 아니면 도. 그저 그런 중간은 불가능한 사람이었다. 조금만 더 일찍 나 자신을 알았더라면 참 좋았을텐데. 너무 입시 공부, 법 공부만 하고 살아서 그런가 나 자신을 공부할 시간이 부족했었나 보다. 삶에 위기가 찾아왔던 것은 부족한 부분을 채우라는 하늘의 뜻이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이제 모범생의 노선을 어느 정도 벗어났고, 나 자신에 대해서도 뼈가 저리게 열공 하였으니 지금부터는 마음껏 체질대로 살아보련다. 인생은 우리가 짐작하는 것보다 훨씬 더 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