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 서늘한 바람이 불어봐 잠든 나를 깨웠다. 일전에 캠핑장에서 느꼈던 차가운 아침 공기였다. 나는 눈을 반쯤 감은 채 선반 위를 더듬었다. 다급히 선풍기 리모컨을 집어 들어 전원 버튼을 누른 뒤 다시 이불을 얼굴까지 끌어당겼다. 하루빨리 여름이 지나가게 해달라고 기도했더니, 기도가 너무 세게 들어가 겨울이 온 듯했다. 다행히 잠이 영영 깨버린 건 아니었던지라, 나는 한숨 더 자고 일어날 수 있었다.
아침이 온 뒤에도 선선한 바람은 거실 창문을 연거푸 밀고 들어왔다. 순간 머릿속에 떠오른 건, 드디어 점심시간을 밖에서 보낼 수 있겠다는 희망이었다. 마실도 나가고, 커피도 마시고, 책도 읽으며 보내겠다는 작은 기대를 품으며 이불을 정리했다. 이렇듯 작은 희망이라도 가진 날에는 하루의 시작이 맑고 힘차다.
아침 공기가 제법 차가워졌다. 한낮에는 30도까지 오르지만, 새벽 기온은 15도까지 떨어진다. 오늘은 처음으로 점퍼를 걸치고 문을 나섰다. 버스 안은 더 이상 에어컨이 필요 없을 만큼 적당히 선선했다. 나는 버스에서 한 정거장 전에 내려 청계천을 미리 둘러봤다. 오늘 점심에 앉을 만한 공간이 있는지 탐색하기 위해서였다. 오늘은 기필코 청계천에 앉아 책을 읽으리라. 몇 군데 적당한 자리를 찜해둔 뒤 회사로 발걸음을 옮겼다. 점심시간이 빨리 오길 기다리며.
간단히 단백질 음료와 단백질 쿠키 그리고 작은 스낵을 하나 집어먹은 뒤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혹여 동행할 사람이 있을까 싶어 운을 떼봤지만 동료들은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그래, 혼자가 이동하기도 편하니까. 나는 외투와 책을 챙겨 서둘러 빌딩 밖으로 향했다.
점심의 햇볕은 여름날의 여느 순간처럼 맹렬하게 내리쬐었다. 하지만 예상대로 그늘은 제법 서늘했다. 해만 피하면 꽤나 쾌적하게 여유를 즐길 수 있는 날씨였다. 나는 아침에 봐둔 지점으로 향했다. 역시나 누가 먼저 자리를 선점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여분에 여분, 그리고 그 여분의 추가 여분까지 챙기는 초계획형 인간이므로 당연히 플랜 B를 가지고 있었다.
플랜 B는 청계천이 시작되는 지점의 독서 벤치였다. 서울시에서 가을을 맞아 조성해 둔 파란색 플라스틱 독서 의자가 모여 있는 곳이다. 얼마 전 폭우가 내렸을 때 오리떼처럼 둥둥 떠내려가는 걸 봤었는데, 지금쯤이면 보수했을 거라 믿었다. 서울시 공무원들은 성실하니까.
어쨌든 플랜 B 지점은 회사로부터 조금 멀리 떨어져 있으므로 나는 자전거로 이동하기로 했다. 새로운 디자인으로 장식된 신형 따릉이를 한 대 빌려 타고 자전거 도로 위에 섰다. 점심시간에 자전거를 타고 달리니 마치 여행지에 온 듯 마음이 가벼웠다.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기다리는 것마저 즐거울 정도. 마음 같아선 그대로 자유로이 떠나 북한산까지 달려가고 싶었다.
신호를 두어 번 정도 기다리니 금세 청계천 상류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예상했던 대로 사람들로 북적였고, 청계천변 주위로 빼곡하게 조성해 놓은 파란 의자에도 사람이 가득 차 있었다. 그 말은 곧 플랜 B도 실패라는 뜻. 하지만 실망하긴 일렀다. 나는 플랜 C도 있고 플랜 D도 있으니까.
다행히 플랜 C 위치에는 빈자리가 있었다. 빌딩 숲이 만들어 둔 적당히 넓은 그늘 아래 분수의 물방울이 바람을 타고 하늘하늘 흩날렸다. 모든 것이 적절하고 아름다웠다. 가만 보니 플랜A나 B보다 이곳이 더 근사해 보였다. 분수 한편, 물이 튀지 않는 곳에 자전거를 세우고 책을 펼쳤다. 오늘은 모처럼 글이 잘 읽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