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은 상노인이 아닌데도
'사람은 위를 올려다보지 말고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살아야 한다'는 말을 듣고 자랐다. 결혼도 '사위는 딸보다 낫고 며느리는 아들보다 좀 못 해야 평탄하다'는 말도. 특히 딸을 시집 보낼 때 신랑집 철대문을 보고 보내면 안 된다고 했다.
주택의 철대문이라 함은 전쟁후의 척박한 주거 환경에서는 부의 상징이었으므로.
그 철대문 집이 끝까지 부를 유지할 수 없는 인생이 많기에 사람 됨됨이를 봐야지 집안의 물질을 보면 안 된다는 뜻이었다네.
아이들한테 박스를 가져오라고 할 때 상자의 이북 사투리인 '곽'을 가져오라면 상황에 따라서 알아채고 가져오긴 하지만 정확한 의미는 아직도 모른다고.
페인트를 할 때 반드시 신나가 필요한데 ' 신나' '신나'하면서도 그저 칠을 지우는 아세톤 류의 물질로 생각했었는데.
알고보니 'thinner'라는, 페인트를 묽게하거나 지우는 단어의 한국 말이었다니 참... 그것도 할머니 단어였네.
요즘 젊은 용어인 '닉값'이니 '디폴트 값'이니 하는 말은 나무위키에서 찾아봐야 하지만
'아보하', '엄근진', '사바사' 등 진짜 '별다줄(별 걸 다 줄인다)'이다.
10개 중에 8개는 전혀 감도 안 잡히는 말의 홍수 속에서 허우적거린다.
옛날 어른들의 가르침이나 속담 비슷한 교훈이 우리 귀에 잘 안 들어왔듯이
위아래 세대와의 소통은 안 되는 생을 살아간다고 보면 된다.
언제부터인가 내가 아이들에게 하는 말이, 해 놓고도 하나도 임팩트가 없는 말을 하는 것 같아서 혼자 실소를 금치 못 할 때가 많다.
학교 다닐 때 리바이스 청바지가 거의 텐트 수준으로 두꺼운데 한여름에 입고 땀을 뻘뻘 흘리니 보다 못한 모친이 더운데 벗으라고 해도 하나도 안 덥다고 억지를 부리며 유행을 이해 못 하시는 어머니에 대해 불만이 많았다.
그 외에도 부모님 세대와는 말이 안 통한다고 툴툴거린 것이 엊그제 같은데.
자업자득, 젊은이들이 나의 세대와 불통이라고 해도 할 말이 없다.
나도 그들의 언어와 개념을 이해 못 할 정도로 급박하게 달라지고 있으니. 각자도생의 세상에서 서로 알려고도 안 하고 감정 소모가 싫어서 손절도 잘하고 외로움이 괴로움보다 낫다는 풍조가 대세라서 고령화 시대의 노인들만 우왕좌왕하는 것 같다.
이도 저도 아니게 중간에 끼어서 '무전 장수' '유병장수'의 늪에서 허우적거리지나 않기를 간절히 바라는 이상한 시절이 오고 있다.
말뿐이 아니라 행동도 완전히 나의 모친을 건너뛰어서 친할머니(외할머니는 이북에서 못 오시고)의 행동을 언제 봤다고 그대로 하고 있더라.
가령 옷을 사러 갔을 때 입어 보기 귀찮으면
바지나 치마의 반으로 접힌 허리 부분을 목둘레에 둘러본다든지, 모자라면 허리에 작은 사이즈이고 딱 맞으면 내 사이즈인 이상한 메저링 방법을 할머니로부터 보고 배웠다.
손재주는 없지만 가끔 바느질을 하면서 실을 끼운 바늘을 잃어버릴까 봐 한쪽 가슴 쪽 옷에 끼워 놓는다든지 하고 무엇 때문인지 몰라도 바늘을 머리에 몇 번 긁어서 소독을 하는 방법도 알았다.
북미에서는 재채기를 하면 사람들이 ' God bless you'라고 해 주는데
나의 할머니는 내가 어릴 때 재채기를 하면 '쐐, 똥이나 한 자루 먹고 밥괭이네 집으로 가라'라는 주문도 아니고 방언도 아닌 뜻 모를 말을 꼭 하셨다.
지금도 토씨 하나 안 틀리고 기억하는 이 말이 서양의 God bless you와 유사한 사투리 버전인 것을 AI를 통해서 알아냈다. 거의 반세기도 훨씬 넘어서.
그 뜻인즉, '쐐'는 물리친다는 뜻의 의성어이고 액운을 갖고 밥 얻어먹는 길고양이에게로 가버리라는 뜻이라고.
한 번도 기억이 안 나고 뜻도 모른 채 궁금하지도 않았던 할머니의 손녀에 대한 주술 같은 보호구절이었다니.
내가 할머니가 되어 손자들을 보고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갑자기 한기가 들면서 재채기를 계속 하니까 뒷사람이 'God bless you'라고 하는 순간 불현듯 옛날 고리짝 시절의 할머니 방언이 떠 올랐다. 지금 내가 쓰는 말도 나의 후손들이 들으면 이해 못 할 외계인의 언어가 될 것이 뻔하다는 것이 실감나면서.
오래된 단어와 추억들이 번개를 맞은 듯 떠 오르고 그 시절의 어린 내 모습이 어리광 부리듯
아장아장 걸어와 손짓하는 것 같은 아스라함이 느껴지니 명실상부한 할머니임을 나 스스로가 인증한다.
나는 아직 그렇게까지 할머니 삘은 아닌 것 같은데...
한국 전쟁 직후인 70여 년 전의 서울 시내
세월도 빠르게 흐르듯이 언어도 격세지감을 넘어서 소통 운운 하기엔 물길이 너무 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