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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우성 May 05. 2021

쓸쓸해도 나쁘지 않아

ktx magazine, 2021_04

 소무의도 무의바다누리길


 황인찬


 끝이 보이는 바다는 처음이야

 너는 말했지


 한국의 바다에는 끝이 있다 세계의 모든 바다에도 끝이 있고, 바다 건너 어딘가에 세상의 모든 것이 다 있다는 그런 이야기에도 끝이 있고


 바다에 끝이 없다고 누가 했는지


 파도에는 끝이 있고, 해변의 모래에는 끝이 있고, 바다의 절벽에도, 바다 절벽 위의 소나무에도, 파도가 깎아놓은 몽돌에도 끝이 있는데


 아직 우리는 끝을 보지 못했구나

 그런 생각들 속에서


 끝이 있는데도 끝이 나지 않는 날들 속에서


 사랑을 하면서

 계속 사랑을 하면서


 우리는 어디를 둘러봐도 육지가 보이는 섬의 해변에 앉아 있었다


 돌아가는 배 위에서 멀미를 하는 너의 등을 두드리며


 이렇게 계속되는 것이구나

 생각을 했고      





이 시를 소리 내어 읽으며, 몇 번을 인찬이의 마음이 되어보려고 노력했다. 아무래도 지인이다 보니 그런 마음이 드는 것인데, 그런 마음이라는 게 정확하게 무엇인지는 모르겠다. 인찬이는 저기에서 왜 저렇게 쓸쓸했을까… 생각하며 나도 그 감정을 느껴보려고 한 거겠지? 이 연재를 매달 하면서 나는 시를 읽는 건 시인의 마음을 이해하는 것이라고 적어왔는데, 독자 입장에선 시인의 마음을 이해하는 게 왜 중요한가, 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시인은 시인이고 ‘나’는 ‘나’니까. ‘내’ 감정을 위해 시를 읽는 거니까. 하지만 시인을 이해한다는 말을, 한 사람이 되어 한 사람을 이해해보는 것으로 바꾸면 어떨까? 여전히 남의 감정 같은가? 그 한 사람이 시에서 말을 하는 사람인지, 시를 쓴 사람인지, 시를 읽는 사람인지 어느 누가 될지 나도 모르지만, 누군가가 되어본다는 것, 정확하게는 누군가의 감정이 되어본다는 것은 멋진 경험이라고 나는 믿는다. 갑자기 본질적인 얘기를 툭 던지는 것 같지만, 누구라도 자기 자신에게 타인이니까.

아무튼 나는 이 시를 읽고 쓸쓸하였다. 왜 그런 감정이 드는지 여러 번 소리 내어 읽으며 이해해보려고 노력하였다. ‘끝’이라는 단어, 끝나는 않는 것과 끝나는 것 사이의 우주를 상상했기 때문일까? 나 역시 한 명의 시인으로서는, 인찬이가 그 우주를 덤덤하게, 작고 일상적인 순간으로 적어 내려가는 것이 부러웠다. 그는 그저 어느 저녁의 단상을 기록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그 안에 많은 것이 담겨 있다. 그러니까 내 쓸쓸함은… 내가 인찬이처럼 쓸 수 없어서, 막막함과 부러움에서 비롯된 것 아닐까. 당신의 쓸쓸함은 어떻게 당도하였나요, 라고 나는 이 글을 읽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각자의 감정이 있겠지.

이 시는 어떤 감정을 느끼는 상태에서 끝이 난다. 누군가는 충분하다고 생각할 수 있고 또 누군가는 무슨 말이든 더 해주길 바랄 수도 있다. 나는 어느 쪽도 아니다. 그냥 나를 생각했다. 내가 겪은 어떤 기억과 다가올 어떤 순간을 생각했다. 나에게서 끝나지 않고 이어지는 것들, 그래서 다행인 것과 불행인 것을 생각했다. 그리고 엄마 생각이 났는데, 여기 적진 않을 것이다. 더 말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어느 순간 말을 멈추고 생각도 멈추고 멀거나 가까운 육지를 바라봐야 할 때도 있다. 멍하니 서 있는 때 그곳이 섬이 아닌 적이 있었나?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그러니까 인찬이가 시를 저 즈음에서 끝마친 건 기교 따위가 아닐 것이다.

삶은 종종 여행에 빗대어 묘사된다. 나는 정말 단 한 번도 그런 묘사에 공감해본 적이 없다. 그런데 나는 나를 찾고 있는 것 같기는 하다. 정말 오랫동안 나를 찾으려고 세계를 떠돌아다닌 것 같기는 하다. 현실의 내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일까? 그러니까 지금 내가 보고 만지는 나는, 진짜 내가 아니라고 말하고 싶어서일까? 멋진 사람이 되고 싶은데, 진짜 나도 멋진 사람이 아닐까봐 두려워했던 적이… 있다. 나는 내가 마음에 들지 않고 마음에 드는 내가 나타날 때까지 찾아다닐 것이다. 여행이라면 여행인 걸까? 끝이 있기는 하고?

소무의도는 무의도에 속한 작은 섬이다. ‘소무의도’라는 이름은 꽤 멋지게 읽히지만, 명확하게 이름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긴 하다. ‘떼무리’라고도 불리는데 어떤 의미인지 나는 모른다. 무의바다누리길은 무의도로 들어가는 길이며 나오는 길이다. 나는 가본 적이 없다. 다만 소무의도라고 적고, 무의바다누리길이라고 적으면, 무슨 문장을 더하든 시적일 것 같다. 시적인 게 무엇인지 모르고, 이 글은 유난히 ‘모른다’는 단어가 많이 쓰였는데, 우연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이 글에서 만은 시적인 것을 쓸쓸한 것이라고 한정해서 말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한 문장 다음에 이어질 한 문장을 알 수 없을 때, 그 막막한 마음도 여행일까? 모르는 세계로 발을 내딛는 마음, 우연히 거기서 아주 멋진 나를 만난다면 좋겠다. 기꺼이 그 여행을 떠나야하는 것이다. 육지가 아닐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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