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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술청 Dec 06. 2019

코카서스 3국 여행기21

별책 부록 같은 짧은 마무리 여행


이번 여행의 마지막 날이 밝았다. 잠을 깨 둘러보니 눈에 비친 실루엣이 비현실적이었다. 중세의 어느 곳에서 잠을 자다가 현실세계로 강제송환 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숙소 창문을 내려다보니 일군의 사람들이 건물 앞에서 웅성거리고 있었다. 아마도 무슨 항의를 하느라 모여 있는 것 같았다. 

무장한 경찰이 엄한 눈초리로 정문을 지키고 있던 숙소 앞 건물은 아제르바이잔 정부의 중요한 업무와 관련이 있는 모양이었다. 

마지막 날이라 특별한 여행 계획이 없었다. 그냥 덤이나 별책 부록 같은 그런 날이었다. 숙소에만 죽치고 있기도 뭐해서 주변을 돌아보기로 했다. 숙소 앞 대로를 건너 시내 쪽으로 잠시 걸었더니 깨끗하고 정갈하게 꾸며진 아담한 공원이 나타났다. 작은 분수대는 나름대로 운치가 있었고, 여기저기 앙증맞은 조각품들도 친근하게 우리 일행을 맞아주었다. 

공원에서 방향을 틀어 구시가지로 향했다. 아제르바이잔에 있는 동안 무수히 지나쳤던 메이든 타워와 시르반샤 궁전을 떠나기 전에 꼭 들러봐야 할 것 같았다. 구시가지의 서쪽 끝에 자리잡고 있는 시르반샤 궁전은 ‘아제르바이잔 건축의 진주’라고 불린다. 이 건물은 15세기에 이브라임 1세가 대지진으로 인해 수도를 샤마흐(Samaxi)에서 바쿠로 옮길 때 구시가지의 가장 높은 언덕에 건축했다. 단순하게 회색빛 암석을 깎아 만들었지만 세련되고 미려한 기둥과 외관, 화려한 기하학적 모자이크 문양이 무척 우아하게 느껴졌다. 



궁전에는 왕족의 생활공간과 재판소, 회의실, 모스크, 목욕탕, 가족 무덤 등이 있었다. 뒤뜰 한 곳에는 뜬금없이 무궁화도 심어져 있었다. 타국에서 우연히 마주친 무궁화가 정겨웠다. 현재 궁전은 아제르바이잔의 역사를 설명하고, 카펫과 무기, 도자기, 보석 등의 유물을 전시하는 공간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지금은 허물어져 형체를 알아보기 어렵지만 목욕 공간 26개가 있었다는 목욕탕은 마치 로마시대의 목욕탕을 방불케 했다.

시르반샤를 나와 구불구불한 골목길을 걸어 메이든 타워에 도착했다. 메이든 타워는 12세기에 기원전 6~7세기의 구조물 위에 세워졌는데, 타워의 높이는 29.5m, 직경은 16.5m로 벽의 두께가 5m로 견고하면서도 우아한 건축물이다. 조로아스터교의 사원 또는 방어용 건축물로 추정되지만 정확한 용도는 알 수 없다. 메이든 타워에는 흥미로운 전설이 전해진다. 바쿠의 통치자가 자신의 딸에게 구애를 하자 난처한 입장에 처한 딸은 영토를 한눈에 볼 수 있는 높은 탑을 만들어 달라고 요구했다고 한다. 하지만 탑이 완성되자 딸은 탑 꼭대기에서 뛰어내려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이탑은 ‘처녀의 탑’이라고도 불린다. 탑은 현재 침범할 수 없는 성역의 상징으로 여겨지고 있다. 

구시가지의 사각형 돌로 포장된 반들반들한 길을 따라 내려오니 성벽 주변에 성을 지키는 데 사용했을 법한 투석기나 대포가 전시돼 있었다.

 조금 더 내려가다 살아있는 나무에 독특한 느낌의 여인들을 그려놓은 특이한 작품을 만났다. 아제르바이잔에서 유명한 화가의 작품이라고 했다. 화가의 작업실을 둘러볼 수는 없었으나 나무와 풀, 돌, 바위, 에어컨 등을 활용한 이색적인 작품들이 주변 풍경과 너무 잘 어울려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마지막 날은 ‘쇼핑 데이’라는 두 분 여사님들의 무언의 압박을 못 이겨 시내로 발길을 옮겼다. 시내를 방황하다가 우연히 작은 쇼핑센터를 찾아들어가 과자와 보드카 등을 샀다. 당연히 화장실이 있을 거라는 우리들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빨리 화장실을 찾지 않으면 타국에서 국제적으로 민망한 일을 당할 수도 있어서 만사를 제쳐놓고 화장실을 찾아야 했다. 한참을 헤매다가 28쇼핑센터라는 곳을 찾아 들어가 급한 용무를 해결했다. 

숙소 쪽으로 이동하다 아제르바이잔에서는 꽤나 유명하다는 서민용 식당 체인점에 들어갔다. 고기도 맛있고, 감자튀김과 신선한 야채들도 입맛에 맞았으나 딱 하나가 부족했다. 딱 하나지만 전부인 것, 그곳에서는 술을 팔지 않았다. 여행지에서 반주 없이 고기만 먹기는 술을 배우고 나서 딱 처음이었다. 옆 좌석에 있던 소녀들이 우리들의 대화를 듣더니 반색을 했다. 자기들이 한국어를 배우고 있는데, 한국 사람을 만나 한국말을 직접 들어서 너무 좋다고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아직은 한국말이 서툴다고 수줍어하는 모습이 한 송이 수선화 같았다.  

숙소로 돌아오는데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가게에 들러 와인 2병과 맥주, 빵, 올리브, 과일 등을 사서 숙소로 돌아왔다. 마지막 파티가 너무 조촐하긴 했으나 길었던 여행을 마무리하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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