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슴을 찢는 아픔을 딛고
영국의 도덕철학자이자 사회학자, 역사학자인 애덤 퍼거슨(1723~1816)은 『시민사회사』 제1부에서 “개인들 간의 유대관계는 반드시 개인이 거기서 직접적 이해관계를 발견하지 않을 때에 가장 강해진다. 개인들 간의 유대관계는 소위 자신을 희생하려 할 때, 이를테면 친구를 돕는다거나 또는 다른 곳에서 풍족함과 안전을 찾기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부족 안에 머무르는 것을 선호할 때에 반드시 가장 강력해진다. 인간이 외적 이득 때문에 사회에 머무른다는 것은 별로 옳지 않다. 차라리 그들은 이득을 거의 발견할 수 없을 경우에 가장 헌신적이다.”라고 했다. 이 구절을 보면서 퍼뜩 떠오른 조직이 ‘9988클럽협동조합’이다. ‘99세까지 팔팔하게 살자’는 약간은 촌스럽고, 꼰대 냄새가 은근하게 풍기는 듯한 이름의 생활공동체. 자영업자, 시민단체 활동가, 노동자, 교사, 교수, 연구자, 예술가, 종교인, 정치인, 심지어 백수까지 다양한 직업과 이력을 가진 조합원들이 모여 있는, 잘 섞일 것 같지 않은, 결코 한 덩어리의 순수한 결정체가 되기에는 불가능해 보이는 조직이다. 뚜렷한 목적도, 정치적 지향도, 대단한 강령도, 반드시 지켜야 할 지침이나 원칙도 없는, 어찌 보면 방만하고, 보기에 따라서는 한심하게도 보일 수 있는 조직이다. 하지만 각자가 지역사회에서 맡고 있는 직책들이 최소한 2~3개는 돼서 지역에 불합리한 일이 벌어지기라도 하면 벌떼처럼 달라붙어 어려운 문제를 순식간에 해결해버리는 해결사 조직, 그래서 선거 때는 정치인들도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막강한 조직이기도 하다. 뒷산인 수리산을 마치 제집 드나들듯이 수시로 오르내리는 조합원들이 수리산 넘어 덕고개 밑 도로 옆에 작은 비닐하우스를 지어 놓고, 텃밭 농사를 하면서 시도 때도 없이 모여 직접 키운 농작물로 온갖 요리를 해서 잔치를 벌이는 집단이기도 하다. 혹자는 세상 사람들이 9988 조합원들만 같으면 모든 권력 다툼이 사라져서 세계평화가 금세 이뤄질 것이라고, 9988을 보고 배워야 한다고 일갈하기도 한다.
2021년 1월 어느 날, 9988 작목반장인 양 반장님한테서 전화가 왔다. 정년이 지나 놀고 있는 사람들 중심으로 막걸리 기행팀을 구성 중인데 혹시 같이 할 생각이 없냐고. 1분 1초도 고민을 하지 않고 같이 하겠다고 답변을 했다. 그렇게 모인 사람들은 조 선배님, 배 위원장님, 양 반장님, 그리고 나까지 4명이었다. 첫 모임에서 전반적인 의견을 나눈 뒤 막걸리 투어 기획 초안을 만들었다. 제목은 “길 따라 술 따라_한량 술꾼들의 전통주 찾아 삼천리(가칭)”, 기간은 2021년 8월~2023년 8월, 격월 2박 3일 또는 3박 4일, 전국을 전라도권, 경상도권, 충청도권, 강원도권으로 나누어 네 명이 각자 한 권역씩 맡아서 사전 조사와 준비를 맡기로 했다. 투어 시작 전에 각 지역 전통주와 관련한 학습을 하기로 했고, 매 투어 시 관련 전문가(예술가나 장인도 가능)와의 대담도 추진하기로 했다. 투어가 끝난 뒤에는 여행기를 써서 책으로 발간하기로 결정했다. 기획 초안을 만든 뒤 조 선배님께서 제안한 커리큘럼대로 개인학습을 열심히 하면서 중간중간 막걸리 품평회를 곁들여 모임을 이어나갔다.
2021년 6월 13일 일요일, 그날도 다른 날처럼 수리산을 넘어 온 몇 점과 30분에 한 대가 운행되는 마을버스를 타고 온 몇 점, 자전거를 타고 온 몇 점이 텃밭에 모여, 초여름 뙤약볕에 한참 맛이 오른 감자를 삶고, 미나리, 부추, 감자전을 만들어 그늘 밑에서 희희낙락, 되지도 않는 농담따먹기로 시간을 축내고 있던 나른한 오후에 벼락처럼 비보가 날아들었다. 조 선배님께서 텃밭에 오려고 수리산에서 내려오시다가 심정지 상태로 발견되어 헬기에 실려 병원으로 이송됐다는 비보였다. 9988 회원이고, 통일운동가이며, 9988모임에 누구보다 열성인 분, 언제 어디서 나타날지는 모르지만 반드시 나타나고야 마는 분, 항상 얼굴 가득 함박웃음을 달고 다니시는 분, 실없는 농담을 능청스럽게 해서 분위기를 띄우기도 하고, 누구보다도 산을 좋아했던 분, 수리산에 다녀와서 농장에 들릴 때면 가방에서 귀한 술이나 희귀한 안주를 슬며시 내놓던 분, 대단한 미식가이자 마당발이어서 전국에 모르는 맛집이 없고, 모르는 사람이 없으며, 이 세상 모든 일에 통달하셨던 분이셨다. 농장에 있던 사람들뿐만 아니라 9988회원들은 순식간에 날아든 비보에 멘붕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이해할 수도 없고, 실감이 나지도 않고, 인정하기도 싫고, 인정할 수도 없는 비현실적인 상황에 다들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병원에 도착해서 확인해보니 수리산이 아닌 선배님 집 뒤의 관악산 육봉 등반길에 쓰러져서 심정지 상태로 돌아가셨다고 했다. 그렇게 조 선배님은 우리 곁을 떠나고 말았다. 지금도 농장이나 9988회원들 모임에 웃으면서 불쑥 나타날 것만 같은데...
조 선배님을 먼저 떠나보내고 한동안 실의에 빠졌던 막걸리 투어 팀은 선배님의 유지를 받드는 것이 우리의 역할이자 의무라고 생각하고 다시 일어서기로 했다. 성원도 확충하기로 했다. 조 선배님의 49재 날인 2021년 8월 1일, 이슬비가 내리던 날, 관악산 육봉, 선배님께서 쓰러진 자리에서 조촐하지만 정성스럽게 49재를 지냈다. 49재를 마치고 점심 식사도 할 겸 과천 시내에 있는 막걸리집인 ‘별주막’을 찾았다. 사실상 첫 번째 막걸리 투어인 셈이다.
‘별주막’은 정부과천청사가 있는 별양동의 한 상가 지하에 있다. 주점으로 들어서니 대낮인데도 손님 몇 분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주점 한쪽으론 책이, 다른 한쪽으론 사진이 가득했다. 그 가운데 막걸리와 전통주가 냉장고를 빼곡하게 채우고 있었다. ‘별주막’은 환경운동가 출신인 서형원 대표가 만든 막걸리 전문 주점이다. 22년째 과천 주민으로 살고 있는 서 대표는 대학 졸업 후 청년 시절은 환경운동가로, 그 뒤에는 과천시의원과 과천시의회 의장으로 활동했다. 녹색당 창당에도 참여해 2014년 과천시장 후보에 도전하기도 했다. 그가 2016년 1월 오픈한 곳이 ‘별주막’이다. 화학조미료나 GMO(유전자 변형 농산물)·수입 농산물을 일절 쓰지 않는다. 마침 우리가 갔던 날은 서형원 대표는 자리를 비우고 없었고, ‘과천도가’ 공장장이자 주식회사 ‘별네트웍스’ 박병선 부사장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과천도가’의 첫 번째 작품인 ‘관악산생막걸리’와 안주를 시켜 놓고 박 공장장님으로부터 ‘과천도가’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관악산생막걸리’는 남태령옛길 65에 위치한 과천의 유일한 양조장인 ‘과천도가’에서 처음으로 개발, 생산하는 생막걸리로 알코올 도수는 6%이다. 시중에서 팔리고 있는 막걸리의 평균 도수도 6%다. 현재 주세법으로 탁주는 알코올 도수가 3% 이상이면 된다. 서민들이 마시는 막걸리의 알코올 도수는 의외로 굉장히 중요하다. 1982년 전두환 정권 때 막걸리의 알코올 함량을 6%에서 8%로 올려서 사달이 났던 적이 있다. 많은 건설 공사 노동자들이 새참 때면 주로 마시던 술이 막걸리였는데, 도수가 2도로 올라간 뒤로 곳곳에서 안전사고가 발생해서 부랴부랴 다시 6%로 내렸다는 얘기가 전설처럼 전해져 오고 있다. ‘관악산생막걸리’의 주점 판매가격은 1000㎖ 1병에 10,000원, 감미료를 전혀 넣지 않아 편안하고 담백한 맛이 특징이다.
박병선 공장장은 ‘관악산생막걸리’는 부드러워 마시기 좋은, 국내산 쌀과 국내산 재료로만 만든 생막걸리라고 자랑한다. 누룩은 여러 가지를 같이 썼다고 한다. 막걸리 빚기는 기본적으로 누룩곰팡이를 번식시킨 한국식 누룩 ‘곡자’ 또는 일본의 누룩인 ‘국’을 발효제로 하여, 전분이 주성분인 곡물과 물을 주재료로 이루어진다. 전통적으로 누룩은 밀과 보리, 쌀, 기장, 조 등의 곡물을 이용해 만들지만 원리적으로 보면 술의 주원료가 되는 전분질 중심의 곡물이면 모두 누룩 제조가 가능하다. 학자들은 한국에서 누룩이 처음 만들어진 시기를 중국 춘추전국시대(기원전 5세기경)로 추정한다. 당시의 재료는 지금처럼 밀이 아닌 조였다. 전통적으로 누룩을 ‘국자’, ‘국’, ‘곡자’라고 표기해왔는데 언젠가부터 중국은 ‘국자’, 일본은 ‘국’, 한국은 ‘곡자’로 표기한다. 중국의 ‘국자’와 한국의 ‘곡자’는 누룩에 누룩곰팡이와 효모가 공존하므로 누룩만 넣으면 발효가 가능한 데 반해, 일본의 ‘국’은 누룩곰팡이만 있는 경우로 효모를 투입해주어야만 발효를 시킬 수 있다. 일본의 누룩인 ‘국’, 즉 ‘고지’는 종국이라는 씨 누룩을 사용하는데 황국균, 백국균이나 털곰팡이를 인위적으로 접종하므로 한국 전통 누룩과 달리 여러 종류의 미생물이 번식하지 않고 종국으로 사용한 황국균이나 털곰팡이만 단일로 번식한다. ‘고지’처럼 단일 균류로 술을 빚을 경우 술 제조 공정의 안정적 관리와 균일한 맛을 유지하므로 대량생산에 유리하고 숙성 속도가 빠르다. 한국 전통 누룩은 여러 균이 모두 포함되므로 술의 맛이 상당히 복잡하고 발효 시간이 길어 상황에 따라 2배의 시간이 걸리기도 한다. 그래서 대표적인 대형 양조장에서 생산하는 서울 ‘장수’, 부산 ‘생탁’, 대구 ‘불로’, 인천 ‘소성주’ 등의 대도시 막걸리는 대부분 일본의 누룩으로 술을 빚는다.
‘과천도가’는 동네사람들과 좋은 술을 즐겁게 마셔보자고 만들었다. 보통 양조장이라 하면 앉을 데도 없고, 손님을 별로 환영하지도 않는데, ‘과천도가’는 방문해서 편하게 즐길 수 있도록 예쁘장하게 만들었다는 것이 박 공장장의 설명이다. 방문자들이 직접 술을 만들어보는 체험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있고 시음도 언제든지 가능하다. 과천 3단지에 있는 ‘에코생협’에서 ‘과천도가’에서 생산된 술을 판매하고 있는데, 옆 동네인 안양과 군포는 아직 매장이 없다. 특이하게 지리산 밑 남원 실상사 근처에서 ‘과천생막걸리’를 판매하고 있다. 아는 지인의 반협박에 의해서 그렇게 됐다고 한다. 앞으로 하나씩 매장을 늘려갈 생각이다. ‘과천생말걸리’와 잘 어울리는 안주는 술 자체가 튀지 않고 부드러워서 전 종류는 냉냉할 수가 있어, 두부나 얼큰한 음식과 잘 어울린다는 것이 박 공장장의 설명이다. 과학적인 근거는 없다고. 개발과정에 특별한 에피소드는 없고 고생만 들입다 했다고 한다. 주방문이나 음식디미방 등 고문헌에 나와 있는 레시피를 따라서 해보고, 그중에 어떤 것이 좋을까 고민하다 고른 게 생쌀발효였다. 6개월동안 테스트를 100번 넘게 해봤다고 한다. ‘과천도가’의 발전과 명주 탄생을 기대해본다.
술은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났다는 것이 일반적인 통설이다. 태곳적에 원시림의 과일나무 밑에 조그만 웅덩이가 하나 있었다. 무르익은 과일이 하나 둘 떨어져 이 웅덩이에 쌓이고, 쌓인 과일들이 문드러지면서 웅덩이엔 과즙이 괴었다. 여기에 떨어진 나뭇잎이 덮였다. 그러자 효모가 번식하게 되고 마침내 발효가 일어났다. 효모는 과일 껍질이나 흙과 물, 그리고 공기 중의 어디에나 있다. 이 효모에 의해 알코올 발효가 일어나 술이 빚어지게 되었다. 한 무리의 원숭이들이 웅덩이 주변에 모여 춤을 추면서 즐거이 노는 것을 의아하게 여긴 인간들이 원숭이들이 마시던 물을 맛보고 나서 발견한 것이 인간의 역사를 수없이 뒤바꾼 술이었던 것이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발상지인 티그리스강 유역의 고대 슈메르인의 유적지에서 발견된 기원전 4,500년경의 점토판에는 사람들이 포도주를 양조한 기록이 나타나 있다. 고고학자들에 의하면 와인의 제조는 기원전 6,000년경부터 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기원전 1,300년경의 고대 이집드 람세스 왕의 무덤에는 포도의 재배 및 와인 제조에 관한 프레스코화가 있다. 이것으로 미루어 볼 때 와인의 제조 방법은 바빌론 지방에서 이집트를 거쳐 그리스, 로마로 전파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인류가 곡물을 이용하여 처음으로 술을 빚게 된 것은 기원전 4,000년경으로 추정된다. 곡물에 들어 있는 전분을 효모가 직접 이용할 수는 없다. 따라서 곡물로 술을 빚기 위해서는 전분을 분해하여 당화하는 과정이 선결되어야만 했다. 인류가 포도주를 제조한 이래로 곡물을 당화하여 술을 빚는 기술을 발견하기까지는 약 2,000년의 시간이 더 필요했던 것이다. 이러한 당화 방법의 발견은 양조 기술의 발달사에서 획기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굳이 술을 공부해가면서까지 마셔야 할 필요가 있느냐고 시비를 거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아는 것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느낀다고 술도 제대로 알고 마시면 그 맛이 더 좋을 수밖에 없다. 마시고 있는 술의 역사, 종류, 제조 방법, 생산지, 특징, 그 술과 잘 어울리는 안주, 숙취 해소법, 술에 얽힌 비화들, 제조 과정의 에피소드 등을 알고 마시면 좋지 않겠는가. 어디 술을 입으로만 마시는가. 향기로, 흥취로, 주변 경치를 벗 삼아, 같이 마시는 사람들과의 넘치는 정으로, 분위기로, 마시는 날의 의미를 담아 술을 마시는 것 아니겠는가. 그 술의 가치를 제대로 모르면 어이없는 일이 발생하기도 한다. 17년 전 겨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천막농성을 할 때, 중간에 일본을 다녀와야 할 사정이 생겼다. 같이 농성하던 일행들에게 미안해서 공항 면세점에서 고가의 고급 브랜디 1병을 손을 벌벌 떨면서 샀다. 며칠 후, 적막한 어둠이 싸이고 주변 상가들의 불이 꺼져 갈 때 그 술을 풀었다. 비싼 술이라고 몇 번을 얘기했건만 일행들은 마치 소주 마시듯 순식간에 해치우고 말았다. 아 그때의 허탈함이란...
프랑스의 어떤 유명한 와인 수집가의 집에 도둑이 들었는데, 천문학적인 액수의 희귀한 와인들은 손도 대지 않고, ‘1865’라는 칠레산 와인을 훔쳐 갔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그 도둑은 1865년에 생산돼서 엄청나게 비싼 와인인 줄 알고 훔쳐 갔으나, 사실 1865라는 숫자는 와인 제조사의 설립년도였던 것이다. ‘1865’는 한국에서도 꽤 많이 팔리는 와인이다. 골프 애호가들 사이에 선물용으로도 인기가 높은데, 18홀을 65타 이내로 치게 해달라는 염원이 담겨있다나 뭐라나.
막걸리 투어 팀원들이 지금까지 마신 술을 토해내면 호남평야에 물을 방방하게 대고도 남고, 태평양 수위를 올릴 만큼은 될 것이다. 그 술 경력으로, 그 술 실력으로, 술에 대한 넘치는 애정으로 전국 방방곡곡 명주를 찾아 나설 것이다. 그들의 기행(奇行)을 기행(紀行)문에 담아보려고 한다. 베스트셀러가 되어 그 수익금으로 ‘세계 술 기행’을 할 수 있기를 기대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