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간열차로 국경을 넘다
바쿠 기차역 광장은 넓고, 깨끗했다. 아제르바이잔 사람들은 청소를 정말로 열심히 했다. 가는 곳 어디든, 어떤 건물이든, 좁거나 넓은 것에 상관하지 않고, 개인집이든 공공건물이든 관계없이 부지런히 청소하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바쿠역 광장도 흘린 밥풀도 주어 먹을 수 있을 정도로 깨끗했다. 신발을 신고 걷기가 미안할 정도였다. 깨끗하기는 대합실도 마찬가지였다. 넓고, 크고, 세련된 대합실은 무거운 짐을 끌고, 지고 온 여행객들이 차마 앉기에도 민망할 정도였다.
아들과 양 동지는 짐을 지키고, 나머지는 사람들은 고장이 나서 애물단지가 되어버린 딸의 가방을 대체할 캐리어와 저녁으로 먹을 만한 것을 사러 가야 했다. 역사 지하 1층으로 내려가니 어제 기차표를 예매했던 곳이었다. 어제는 지하만 둘러보고 바로 나갔기 때문에 이렇게 역사랑 연결돼 있다는 것을 몰랐는데, 잠시 어리둥절했다. 역사를 빠져나와 근처 쇼핑센터를 20여분이 넘게 헤맸으나 가방을 파는 가계는 찾을 수 없었다. 가방 사는 것을 포기하고, 저녁거리를 사러 근처를 뒤졌으나 식당도 없고, 시장도 없었다. 겨우 찾은 슈퍼마켓은 문을 닫은 상태였다.
할 수 없이 KFC로 갔다. 슬슬 열이 받기 시작했다. 여기까지 와서 햄버거에 통닭이라니. 12시간이 넘게 기차를 타야 한다는데, 와인 1병도 없이, 맥주 1캔도 없이 어떻게, 무슨 재미로 지루한 시간을 견디란 말인가. 혼자 분을 삭이지 못하고, 못마땅한 표정을 얼굴 가득 드러낸 채, 음식을 주문하려고 서 있는 일행들의 뒤통수를 심하게 쳐다보아도 꼬인 심사는 펴지지가 않았다.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것도 아니고, 주문한 햄버거와 통닭이 나오지를 않았다. 30분은 족히 기다린 것 같은데도 깜깜무소식이었다. 속으로 온갖 욕설을 퍼부어대도 음식은 나올 줄을 몰랐다. 아마도 농장으로 닭을 잡으러 간 모양이었다. 이제는 성질내는 것도 지쳐서 될 대로 되라고, 허망한 하루 여행 일정으로 지친 심신을 깜박 잠으로 풀고 있으려니, 그때서야 주문한 음식의 일부가 나왔다. 가장님께서 나온 걸 들고 먼저 가자고 했다. 딸과 봄 여사는 더 기다려야 했다.
자그마치 50분 만에 대면한 귀중한 치킨과 햄버거의 일부를 들고, 가장님의 일손 머리 없는 것들 어쩌고 저쩌고 하는 온갖 구박과 투덜거림을 들으면서 대합실에 도착했다. 5분 후에 딸과 봄 여사도 봉지를 들고 나타났다. 어디서 먹을까 설왕설래하다가 기차 안에서 먹기로 결정을 했다. 짐을 이고, 지고, 끌고, 들고 플랫폼으로 나갔다. 직원에게 물어서 우리가 탈 기차를 확인하고 계단을 내려갔다. 여권과 티켓을 확인한 후 후덕하게 생긴 차장 아주머니가 한국 사람들이냐고 물어봤다. 그렇다고 했더니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그러더니 ‘치노’는 싫다고 손사래를 쳤다. 죄 없는 중국 사람들은 의문의 1패를 당하고 말았다.
1평이 될까 말까 한 2인용 침대칸은 제법 유용하게 꾸며져 있었다. 군데군데 선반과 옷걸이도 있고, 충전용 콘센트, 취침등, 거울, 그리고 냉온방시설도 돼 있었다. 특이하게도 천장에 있는 냉방기와 바로 밑의 시설들을 빨갛고, 파란 박스테이프로 붙여 놓았다. 저게 떨어지지는 않을지 못내 의심스러웠고, 저렇게 붙여 논다고 해서 안 떨어질지 더 의심스러웠다. 영화에서 보던 것처럼 화려하고, 고급스러우면서 엔틱한 객실은 아니었다. 자리에는 깔고 덮을 침대보와 이불보, 그리고 베개보가 놓여 있었고, 짐은 침대 밑 공간에다 넣을 수 있게 돼 있었다.
그렇게 찾아 헤맸던 슈퍼마켓이 플랫폼 바로 옆에 떡하니 자리 잡고 있었다. 칠 년 대한의 단비처럼 반가웠다. 우리에게 익숙한 편의점 비슷한 가계에는 와인과 맥주, 음료수, 과자, 과일 등을 팔고 있었다. 맥주와 화이트 와인 1병을 샀다. 대충 짐을 푼 다음에 양 동지네 객실로 갔다. 50분의 기다림 끝에 겨우 산 대단한 치킨과 햄버거, 아침에 제사 지낸 후 남은 사과 배 등을 안주 삼아 조촐한 파티를 열었다. 6마나트 주고 산 화이트 와인은 약간 신맛이 나고 거칠었다.
2시간 정도 지났을까, 창밖으로 불타는 오일시티가 보였다. 바쿠에서 동쪽으로 100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카스피해 해상의 ‘오일록스’, 바쿠가 보유한 세계 최초의 심해 유전 현장이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부터 소련은 카스피해의 유전 탐사로 눈을 돌렸고, 1949년 바다 밑 1,100미터의 해저 유전을 채굴하기에 이르렀다. 세계 최초의 해저 오일 플랫폼이 세워졌고, 저장 탱크, 유조선 접안 시설 등이 만들어졌다. 오일시티가 완성된 것이다. 오일록스의 상주인구는 5천 명에 달하고, 주거 시설은 물론 호텔에서부터 위락시설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마련되어 있다. 다만 정부 허가를 받아야만 출입이 가능해서 일반인들은 들어가기가 매우 힘든 곳으로 알려져 있다.
아제르바이잔의 석유 산업은 노벨 형제 덕분에 번창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이너마이트의 발명자인 알프레드 노벨에게는 두 명의 형이 있었다. 다이너마이트 제조법을 비롯해 주로 무기 제조 관련한 350여 가지의 특허를 보유했고, 사망할 즈음에는 90여 개에 달하는 무기 공장을 소유했던 알프레드 노벨은 물론 부유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부를 일구는 방면으로는 그의 형들인 루드비그와 로베르트가 한 수 위였다. 알프레드 노벨이 남긴 재산 중 상당 부분은 그가 형들의 사업에 투자했던 대가로 이어졌다. 즉 노벨상의 원천은 다이너마이트만이 아니라 바로 바쿠의 석유였던 것이다.
바쿠의 유전 사업에 뛰어들어 19세기 후반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인물이 되었던 루드비그와 로베르트 형제는 당시 미국 석유왕 록펠러의 부러움을 살 정도였다.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가 사업의 터전이었던 노벨 형제가 제정 러시아의 손아귀에 있던 남코카서스의 바쿠에 발을 디딘 것은 1879년이었다. 그들이 세운 브라노벨은 정유와 송유 분야의 기술개발이 남달랐다. 세계 최초로 유조선을 발명해 바지선에 의존하던 석유 운송을 혁신했다. 브라노벨의 신기술은 바쿠의 관련 기업들에 쉽게 전수되었고, 석유산업의 중심지로 성장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바쿠가 전 세계 석유 소비량의 절반 가까이를 공급하자 자존심과 야망에 심대한 타격을 입은 것은 스탠더드 오일과 같은 당대의 석유 메이저였다.
11시 20분, 취침을 위해 자리를 폈다. 야간열차에 대한 추억이 아련하게 떠올랐다. 내가 살던 고향은 보잘것없는 깡촌이었다. 동네를 가로질러 철로가 통과하고 있었는데, 설상가상으로 고속도로가 뚫린다고 해서 몇 가구 되지 않는 집들은 산으로 옮겨가야 했다. 그나마 초등학교와 기차역이 가까운 것이 불행 중 다행이었다. 중학교가 없어서 옆 면소재지로 통학을 해야 했다. 거리는 6킬로미터 정도, 왕복 12킬로미터, 30리 길이었다. 숨이 턱턱 막히는 재를 넘어가거나, 먼지 풀풀 날리는 신작로를 걷거나, 위험을 무릅쓰고 기찻길로 다니기도 했다. 중학교 3학년 때는 기차로 통학을 하기도 했다. 어느 겨울날, 새벽밥을 먹고 아직도 어둠이 가시지 않는 산길을 따라 내려가다 막 기찻길을 건너려 하는데, 마침 기찻길 다리 밑에서 잠을 자고 있던, 그 시절에 동네에 꼭 한 명씩은 있었던 팔푼이가 발자국 소리에 놀라 불쑥 몸을 내밀었다. 왜 하필 하얀 옷을 입고 있었는지, 왜 머리는 풀어 헤지고 있었는지, 무슨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아니 정말로 귀신인 줄 알고, 걸어서 10분은 족히 걸릴 기차역까지 한 번도 쉬지 않고 냅다 뛰었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게 떠오르곤 한다.
대학 입학 원서를 가슴에 품고, 처음으로 서울이라는 데를 올라가는 떨림과 두려움으로 야간 기차를 탔던 기억도 있다. 그때 완행열차는 역이란 역은 제다 정차를 했다. 따로 좌석이 정해져 있지도 않아서 먼저 자리를 차지하면 거기가 자기 자리였다. 힘들게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는데도 나이 많은 어른이 오면 자리를 비켜줘야 했다. 뭉개고 가기에는 서울이 너무 멀었고, 기차는 너무 느렸다. 저녁 7시에 출발한 기차는 그다음 날 새벽 5시 30분경에 용산역에 도착했다. 차갑고, 인심 야박하고, 시골 촌놈 혼을 쏙 빼놓을 것이라는 서울에 대한 상상은 플랫폼을 벗어나면서부터 바뀌었다. 역 광장에 두 줄로 늘어선 인상 좋은 아주머니들이 따뜻한 방 있으니 자고 가라고 막무가내로 팔을 붙잡았다. 세상에, 서울이 이런 곳이었다니. 기차 안에서 10시간 30분을 구겨진 상태로 떨고 온 것을 어떻게 알고, 고맙게도 따뜻한 방을 마련해 놨으니 자고 가라고 하니 그보다도 더 고마울 수가 없었다. 동행했던 동창 녀석이 끌려가면서도 이상했던지 자꾸 고개를 갸웃거렸다. 야, 뭔가 이상한 것 같지 않냐? 이상하긴 뭐가 이상해. 서울도 사람 사는 곳인 거지. 한숨 푹 자고 가자. 그 녀석의 과도한 의심증 때문에 그 따뜻한 방을 직접 체험해보지는 못했다. 그 친구는 어디서 무얼 하고 있는지...
07시, 가장님께서 깨우는 소리에 눈을 떴다. 여행을 가면 대개 내가 먼저 일어나서 가장님을 깨우는 것이 순서이자 순리였는데, 어젯밤 술이 과했나 보다. 07시 25분쯤 밤새 달려온 기차가 정차를 했다. 이제 아제르바이잔 국경을 넘는 모양이다. 제복을 입은 군인과 공무원이 객실마다 돌아다니면서 여권과 비자, 입국 서류를 요구했다. 객실 검사도 했다. 그들은 객실 한 곳을 차지한 뒤 여행객들을 일일이 1명씩 불러서 여권과 대조하고, 즉석으로 사진을 찍었다. 그 일은 쉽게 끝나지 않았다. 보통 1시간 정도가 소요된다고 했다. 그렇게 출국심사가 진행되는 동안에는 화장실 사용도 금지됐다. 차장 아주머니가 돌아다니면서 화장실 문을 잠갔다. 08시 20분, 1시간 만에 기차가 출발했다.
기차는 30분 정도 달리더니 다시 멈췄다. 이제부터는 입국 심사가 시작되는 모양이다. 직원들이 돌아다니면서 여권을 다 걷어 갔다. 한 시간쯤 지나 여권은 돌려받았으나 기차는 미동도 없었다. 국경의 들판에는 소떼들만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었다. 10시 05분, 드디어 기차가 움직였다. 조지아를 향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