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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 미 Oct 08. 2015

다름을 이해한다는 것

1년 하고도 2달이 지나가는 데도 우리는 아직 유럽이네(2)

그녀와 나는 초등학교 동창이자 고등학교 동창이다.

녀석을 고등학교 1학년 같은 반 교실에서 만났는데 난 기억이 없었다. 어느 날 녀석은 초등학교 때 사진을 가져왔고 우리는 초등학교 2학년, 당시 국민학교 2학년 때 같은 반이었다. 난 말괄량이였고 뛰어다니길 좋아했던 녀석이고  어렴풋한 나의 기억에 녀석은 얌전했다.

그렇게 고등학교에서 재회한 우리는 올해로 십 여년이 넘는 친구다.


고등학교 시절 같이 술을 마셨고, 이십 대의 숱한 방황도  함께했던 녀석이다. 나와 함께 가장 많은 곳을 여행했으며 틈만 나면 싸돌아다니길 작당했던 친구다. 그런 그녀와 해외는 작년 7월, 스위스와 이탈리아가 처음이었다. 


파리는 나의 로망이었고 녀석은 스위스가 로망이었다. 도회적이고 좀 무심한 듯한 녀석은 자연을 보는 걸 좋아했고 말로는 귀농할 것처럼 구는 나는 섬세한 건축물과 파리와 같은 고풍스러운 도시를 좋아한다. 

스위스 루체른(Luzern)에서 만난 우리의 다음 일정은 베른(Bern)을 거쳐 인터라켄(Interlaken)을 지나 그린델발트(Grindelwald )로 가는 것이었다. 녀석이 짠 일정이니 나는 그저 걷고 바라보기만 할 심산이었다.

루체른에서 인터라켄까지 짐을 부칠 수 있는 시스템이 있어 우리는 베른을 딱 맨몸으로 돌아볼 수 있었다. 지금도 만나면 이야기 하지만 금액적으로 고민했던 당시와는 달리 너무나도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그녀에게 늘 말한다. 스위스를 꿈꾸던 녀석이기에 수도인 베른을 가는 건 당연한 거였다. 그리고 나 역시 그곳에서 인생의 사진을 건졌다. 아마 그때부터 딱 이탈리아 까지에서의 내 사진이 제일 많다. 얼마 전 수다에서도 느낀 거지만 녀석은 여행마다 자신을 웃기든 제대로든 사진으로 미친 듯이 남기는 나에게도 사진 한 장 남겨주고 싶었다고 한다. 그래서 흔들리는 손을 부여잡고 수백 장의 사진을 그토록 가고 싶었던 스위스의 풍경이 아니라 나에게 할애했다. 

"넌 찍어주는 좋아하고 사진을 남겨주는 데 니 사진이 없잖아."

여행이 다 끝나고 들은 그 말 한마디가 녀석이 여행에서 날 얼마큼 염두에 두었는지 딱 알 수 있었다. 


베른 시내가 내려다 보이는 장미공원. 그 돌담에 앉아서 우리는 하염없이 그 풍경을 바라봤다.


녀석은 가요를 듣고 나는 잡다한 장르의 팝을 다 듣는 대신 가요는 몇몇 가수 외에는 듣질 않는다.

녀석과 나는 치느님을 숭배하지만 난 퍽 살만 녀석은 부드러운 살만 먹는다.

녀석은 늘 긴 머리지만 난 평생 한 번 정도 긴 머리였다.

자연을 좋아한다지만 걷는 걸 싫어하는 녀석이고 도시를 좋아하면서도 걷는 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나다.

우리는 그렇게 매우 다르고 그러한 모습은 여행에서 여러 형태로 나타났다.

돌이켜보면 그 열흘이 비행 시간을 제외하곤 일주일 정도인데  그동안 우리는 몇 번이고  말없이 기차의 다른 좌석에 앉기도 했다. 

일상인 듯 길게 여행하고 있는 나는 느긋했고 단 며칠 휴가 내서 온 그녀는 빨리 많은 걸 보고 싶어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이해한 것은 녀석이 떠나고 나서였다. 

루체른, 베른, 그린델발트, 체르마트, 베네치아, 피렌체, 로마로 이어지는 일정은 녀석의 욕심이 아니라 당연한 거였음을.  이제는 안다.



너와 내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려 할 때 무슨 이야기를 듣자마자 즉시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사실 어쩌면 그것은 거짓말에 가깝거나 차차 이해해보도록 할게 라는 말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우리는 숱하게 일상에서 서로를 이해할 수 없는 다름에 부딪히는데 그 일상은 때론  도망갈 구멍이 있다. 하지만 낯선 타지에서 오로지 너와 나 뿐이라면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 외에는 도망갈 구멍이 없다.


아무리 친한 친구도, 사랑하는 연인도 여행지에 가면 부딪히고 싸우게 된다는 이야기를 종종 들었다.  왜?라는 물음을 가졌던 나는 곰곰이 생각해보니, 다 내 위주였기 때문에 다툼이 없었던 걸 지난 유럽여행을 통해 알았다. 단순히 며칠 가는 한국에서의 여행은 전부 내가 기획하고 주도했으며 운전부터 음식까지 다 알아서 했었다. 함께 다녔던 친구들은 그것이 편하다고 했고 나는 특별히 다툴 일이 없고 계획한 대로 진행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조금만 더 멀리 나가도 서로의 욕심은 드러난다. 좋아하는 음식이 다르고 가보고 싶었던 곳이 다르면 의견 차이가 생길 테고 일상으로 오면 미련과 후회가 남으며 그것은 뜻대로 다 한 상대에 대한 원망으로 갈 수도 있다는 것을.


사촌동생과 열흘 동안 갔던 일본 여행 막바지에선 "내가 너의 보호 자니?"라며 전부 왜 나한테만 의지하는 거냐 했지만 동생은 첫 여행이었고 계획도 다 내가 했으니 당연히 나에게 의지하는 게 맞았던 것이다.

친구 결혼식 차 다시 일본에 갔을 때는 짧은 기간이라 서로 사고 싶은 것도, 보고 싶은 것도 달라 찢어지면서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암묵적인 실망감이 서로에게 남았던 시간도 있었다.

그에 비하면 녀석과 나는 큰 탈없이 다녀온 거 같다. 하지만 기차에서 서로 다른 좌석에 앉은 것은 잠시 혼자인 시간이 필요할 만큼 싸움을 피하는 기술이기도 했다. 돌이켜보면 녀석이 내 속 마음을 잘 알아채 준 덕도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함께이면서 서로를 미루어 짐작컨데 나름 존중하며 여행했다. 열정만 가득한 때도 아니었고 혼자 걷는 시간도 가끔은 필요하다는 걸 알만큼 조금은, 우리도 나름 어른이었다. 

돌아오고도 1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그때의 잠시나마 어른스러웠던 모습과 달리 다시 또 떠날 궁리를 하며 추억을 곱씹는 아이가 되어있지만 말이다.




베른역에 도착해 집어든 지도와 책을 통해 잠시나마  공부했다. 왜냐면 난 전혀 이 곳에 대한 공부(?)나 정보를 가지고 있는 상태가 아녔기 때문이다. 베른역에서 트램이 다니는 중앙대로를 걸어 다리가 있는 곳까지 갔다. 베른은 내 눈엔 이 층 도시였다.  다리쯤 갔을 때 우리가 기차를 타고 지나온 아슬아슬한 절벽 기찻길도 보였고 그 아래로 하늘과 구분할 수 없는 색의 강이 지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굽이굽이 강 줄기 옆으로 집들이 줄지어 내려다 보였다.



난 꼭 녀석에게 장미공원(rose park)에 올라가자고 했다. 그러면 베른 시내를 한 번에 볼 수 있다고 하니 말이다. 계획에 없던 녀석은 가파른 그 언덕을 올라가길 버거워했고 우린 다시 말이 없었다. 하지만 어제도 만난 녀석은 아직도 이 공원에서 내려다 본 베른이 너무나도 좋았는지 내게 그 곳까지 인도해 준 것을 고맙게 여긴다고 말한다. 그 공원에서 우린 서로에게 어떤 말도 없이 내려다보이는 베른 시내를 조용히 바라봤다.

햇볕은 강했지만 바람은 시원했고 주변에 견학 온 듯한 시끌벅적한 학생 무리들의 소리는 우릴 방해하지 못했다.


점심 때가 다 되어가는 때였고 계획에 없던 곳까지 올라왔으니 먹순이인 우리는 무척 허기졌다.

공원에 딱 하나 카페 겸 레스토랑이 있는데 그 곳 야외 테라스에서 베른 시내를 바라보며 점심을 먹기로 했다.

가격은 그래, 사실 비쌌다. 그리고 스위스 음식도 있었지만 대부분 이탈리아 음식이었다. 그녀는 파스타, 나는 뇨끼를 시켰고 이 기분, 이 불어오는 바람에 와인을 안 먹을 수 없어 와인마저 시키곤 깔깔거리다 풍경을 보고 먹고 마시고 또 깔깔거렸다.


베른의 아쉬운 일정을 마치고 우리는 다시 스위스 기차에 몸을 실었다. 우리가 가야 할 곳은 그린델발트(Grindelwald). 그녀는 기차로 이동하는 방법을 말해주었고 나는 그제야 공부를 시작했다. 그녀가 연구한 방법은 기차로 빠르게 이동하는 것이었는데 나는 스위스행 패스가 아녔으며 그 길은 생각보다 길고 멀었다. 스위스는 유달리 빠른 기차 보다는 풍경을 감상하는 기차가 더 유명한데 아마도 그녀는 그것을 몰랐던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박박 우겨 방금 공부한 내용으로 스피츠(Spiez)에 내려 튠 호수를 가로 질러 가는 페리를 타자고 설득했다. 다툼이 있을 수도 있지만 다양한 교통수단을 이용하는 것과 호수가 예쁘다는 나의 꼬임이 넘어가 우리는 베른에서 스피츠로 향했다. 짐이 없으니 더없이 간편하고 좋았다. 아마 짐이 있었다면 다툼이 일어났을지도 모를 일이다. 

스피츠라는 작은 마을은 호수를 끼고 있으며 아담하고 아름다웠다. 호수 근처 페리 선착장으로 도보로 이동한 다음 우리는 인터라켄으로 향하는 페리에 몸을 실었다.


인터라켄까지는 약 50분 정도 이동하는데 다양한 스위스 호숫가 근처의 풍경을 질리도록(?) 볼 수 있으며 이만한 장관이 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럴 수 있던 이유에는 정말 날씨가 기가 막힌 몫을 했다.

배를 탔을 때 부는 바람에 추위를 느꼈지만 곧 우리는  깔깔거리다 말고 주변에 펼쳐지는 경관에 시선을 돌릴  수밖에 없었으며 또 그렇게 하염없이 풍경을 바라봤다. 그리고 그녀는 어김없이 내 사진을 남겨주었다.



여행을 다녀온 뒤에 사람들이 곧잘 어디가 제일 좋았는지 물어보는데, 다른 여러 곳들도 있지만 빼놓지 않고 내가 하는 말이 있다. 스위스는 비싼 게  아니다.라는 말이다. 오래된 자연경관을 간직한다는 것, 지키고 보존한다는 것. 그래서 우리 세대까지도 변했을 지언정 유지하려는 사람들 덕에 느끼고 가볼 수 있게 해주었기 때문에 당연히 그 값어치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여러 곳을 다니는 나에게 스위스는 부담스러운 도시였지만 그래도 그만한 곳이라는 생각을 하게끔 해 준 덕에 비어가는 주머니를 그나마 부여잡을 수 있었다.


인터라켄에 도착해 우리는 기차로 짐이 도착하는 동역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유럽은 공무원 시간이 칼이니 혹시라도 짐을 받지 못할까봐 였다. 그래서 인터라켄 서역에서 동역까지 걸어가는 내내 발목을 붙잡는 아름다움을 뿌리치며 가는 곤혹스러움을 겪을 수 밖에 없었다.



우린 너무 다르다.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말하는 녀석과 스위스의 욕심 많은 일정을 마치고 이탈리아로 넘어갔을 때. 안타깝게도 녀석은 더위와의 한바탕 전쟁을 치렀다. 난 더위를 잘 타지 않는 체질이기도 했거니와 밤이 되면 선선하니 느긋하게 기다리고 또 걷는 한 편, 녀석은 이탈리아의 더위를 견딜 수 없어 너무나도 힘들어했다.

다른 성향의 우리이기 때문에 여행 방식도 다르지만 함께해서 즐거웠던 기억과 아쉬움은 여전히 너무 많다.

우리는 만나면 스위스에서 궃은 날씨 때문에 제대로 보지 못한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언젠가는 그 곳을 꼭 다시 갈거라며 말이다.


다르다고 해서 함께 할 수 없진 않다. 다르기 때문에 더 나눌 것이 많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다름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 즉시 되는 일이 아니라는 것도 우리는 여행을 통해 잘 알게 된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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