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시 정각에 지하철에서 내렸다.
출구를 나가 사무실 앞에 도착하니 12시 3분. 착.착.착.착. 익숙한 인쇄기 소리가 밖에까지 새어나오고, 안에는 작지만 다부진 체구의 남자가 기계 앞에 서있다. 인기척을 듣고 남자가 반긴다.
- 오 아들 왔어.
5월 8일. 어버이날이다. 어제 전화를 걸어 남자와 점심약속을 잡았더랬다.
- 뭐 먹지?
- 요 앞에 갈비탕집 잘하는데 거기 갈래?
이전에도 갔던 곳이다. 오면서 다른 맛집을 검색해봤지만 마땅한 곳이 없던 터였다.
- 응 좋지.
남자는 기계를 멈추고 오전 작업을 마무리한다. 식당은 점심 식사 손님들로 붐빈다. 적당한 자리에 앉아 갈비탕 2개를 주문하고, 잠시 침묵이 흐른다. 대화 주제가 내 잉여로운 근황 이야기로 흘러 밥 먹기도 전에 분위기가 싸해지는 불상사를 막기 위해, 내가 먼저 선수를 친다. 최근 동생이 분양 받은 흰 고양이 소식을 전하면서 사진을 보여주었더니 남자의 눈이 반짝반짝한다. 직장 근처에 있는 오피스텔로 독립한 동생은 생후 두 달 된 흰색 고양이를 식구로 들였다. 이름은 모찌. 동생은 붙임성도 좋고 애교도 많다며 카톡으로 엄청 자랑한다. 남자 집에도 고양이가 있는데, 완전 반대다. 이름은 다미. 까칠하고 성질도 고약하지만 남자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다. 모찌와 다미, 두 생명체의 외모, 성격, 행동 패턴 등을 사뭇 진지하게 비교 분석한다. 그 외 고양이 발바닥 같이 말랑 말랑한 이야기를 주고 받는데 갈비탕이 나왔다.
밥을 먹고 다시 사무실로 왔다. 남자와 나는 믹스 커피를 한 잔 하려고 포트에 물을 끓인다. 가만 보니 남자의 왼쪽 볼이 조금 부어 있다. 얼마 전에 임플란트 치료 때문에 어금니 세개를 뽑았는데 어제 냉찜질을 안 하고 자서 그런 것 같다고 한다. 사람의 이는 왜 그렇게 일찍 수명을 다 하는지 모르겠다고, 남자는 젊을 때부터 스케일링 꾸준히 잘 하라고 조언한다. 남자는 올해 환갑이다. 노안으로 안경을 썼고, 올 초에 혈압이 높아져 약을 먹고 있다. 미간 주름도 좀 더 깊어진 것 같다. 남자는 이정도면 동년배 사람들보다 건강한 편이라고, 특유의 쾌활함을 내비치며 사람 좋게 웃어보인다. 그러다가 아내 이야기로 넘어간다. 몇십년을 같이 살면서도 계속 부딪히는 사소하고 해묵은 문제들, 어느 부부에게나 있을 법한 시시콜콜한 다툼들, 사실 몇 번씩 들어 이미 알고 있는 전형적인 이야기가 이어진다. 나는 마음 속에서 꿈틀 꿈틀 올라오는 말들, 엄마는 어떠어떠하고 아빠는 어떠어떠하니 서로 이렇게 저렇게 고쳐보는 건 어떻겠냐는, 무허가 야매 상담사 입에서 나올 법한 별 시덥잖은 말 대신, 그냥 계속 듣고, 듣고, 끄덕인다.
남자가 일하는 다섯평 남짓한 사무실은 한 눈에 들어온다. 한 쪽에는 철재로 된 제법 육중한 인쇄기가 있고 그 앞에는 수백장의 종이를 한 번에 자를 수 있는 절단기가 놓여 있다. 시퍼렇게 날이 서있는 절단기는 종이 뿐만 아니라 뭐든 잘라버릴 수 있다는 듯이 입을 떡 벌리고 있다. 하루에도 몇번씩 종이를 넣고 빼며 그 언저리를 배회하는 남자의 손이 떠올라 아찔해진다. 선반 위에는 작은 티비가 있고, 그 옆에 컴퓨터와 책상이 있다. 바닥에는 인쇄된 종이가 언덕처럼 쌓여 군데 군데 솟아있다. 사무실은 꽤 넓은 공간에서 여러명의 직원으로 북적일 때도 있었고, 두 세명의 직원들로 단출한 적도 있었다. 지금은 남자 혼자 일한다.
이십대 초반에 인쇄 업계에 발을 들인 남자는 40년 가까이 기계를 돌려 왔다. 인쇄 일을 하게 된 건 우연에 가깝다. 잡히는 대로 일을 구했고, 손 닿는 곳에 인쇄 일이 있었다. 80년대 경제 호황의 바람을 타고 일은 물밀듯이 들어왔지만 노동 환경은 열악했다. 쉬는 날도 거의 없이 일했고, 밥도 제 때 잘 못 챙겨 먹었다. 돈 떼먹은 놈도 많았다. 그래도 멀리서 보면 남자의 사업은 상승곡선을 그렸다. 마치 비행기가 활주로에서 달리다가 이륙하듯, 남자의 사업도 속도가 붙더니 공중으로 떠올랐다. 사업은 포물선을 그렸다. 갑자기 뚜욱 떨어지거나 쑤욱 올라가는 일 없이 곡면을 따라 서서히 올라갔고, 어느 시기부터 서서히 내려오기 시작했다. 경기가 침체되고, 업계 트렌드가 바뀌고, 대기업에 일이 몰리면서 영세사업장은 일을 접거나 버티기 모드로 들어갔다. 남자도 버틸 수 있을 때까지 버티면서, 착륙 이후의 삶을 고민하고 있다.
남자와 한참 이야기를 나누는데 몇 명의 학생들이 들어와 인쇄를 문의한다. 남자딴에는 친근하게 한다고 반말로 알려주는데, 학생들이 나가고나서 나는 노파심에 한마디 한다.
- 아빠, 예민한 사람은 기분 나빠할 수도 있어. 어른이어도 초면에 반말한다고.
- 아니, 뭐. 급하게 알려주다보니까.
다른 학생들 무리가 또 찾아온다. 이번엔 '요'자를 붙여서 안내해주는데, 기분이 묘하다. 내가 뭔가를 알려주고 남자가 그걸 수용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그런 기분이 든다. 나는 슬슬 일어나 갈 준비를 한다. 뭐 도와줄 거 없냐고 물었지만, 남자는 손사래를 친다. 주섬 주섬 짐을 챙기는데 티비에서 뉴스 앵커가 다음 뉴스를 전한다. 어버이날 선물 순위를 소개하는데, 인기 선물 1위가 3년 연속 '현금'이란다. 기피 선물 1위는 '책'이고 2위 '케이크', 3위 '꽃다발'이었다. 기피 선물에 '갈비탕'이 없어서 다행이면서도, 괜히 얼굴이 화끈거리는 건 왜일까, 생각하며 사무실을 나온다.
- 아빠, 고생해. 또 놀러올게.
- 응 가거라.
카네이션, 현금 대신 갈비탕과 티타임으로 어버이날을 기념했다. 남자가 착륙 이후의 삶을 잘 가꾸어 나가길 기원하며, 다음에는 갈비탕 말고 다른 메뉴를 꼭 시도해보기로 다짐하며, 내가 건네는 선물과 어버이 인기 선물이 일치하는 날을 꿈꿔보며,
나는 내 잉여로운 일상으로 복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