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균열] 익숙함을 밀어낸 자리

그림책 '축구 선수 윌리'(앤서니 브라운)

by 초연이

질퍽한 흙 위에 깊고 얕은 선들이 무수히 남겨졌습니다. 누군가의 겹겹이 쌓인 하루처럼, 그 선은 두텁고 강렬했습니다. 순식간에 지나간 흔적 같으면서 또 누군가를 위해 비워둔 길 같아 보였습니다. 몇 달 동안 무수히 수많은 생명들을 키워내고, 또 그 생명이 더 수많은 생명을 살려낼 수 있도록 온 힘을 다했을 땅. 그렇게 수확이 끝난 논은 그저 내어놓았기에 텅 비어 보였고, 그래서 더 단단해 보이기도 했습니다.


이 모습을 사진 속에 담고 나서도 오랫동안 바라보았습니다. 금이 난 땅처럼, 제 마음속에도 조심스레 피해 다니던 금들이 몇 개쯤 있었기 때문이에요. 밟지 않으려고 애쓰던 경계선, 지키느라 오히려 길을 잃어버릴 때도 많았던 보이지 않았던 틀들. 그러다 문득 이 답답함을 이겨낼 만한 힘을 얻을 수 있었던 그림책을 만났습니다.






앤서니 브라운의 '축구선수 윌리'입니다. 고릴라가 자주 등장하는 그의 책, 이번에도 주인공이 여전히 고릴라입니다. 이 책 속에서는 우리가 단정 짓는 동물원의 고릴라가 아니었어요. '인간'처럼 사유하고 행동했습니다. 어쩌면 이미 알고 있었던 '고릴라'에 대한 틀을 깨는 것부터 이 책의 시작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주인공 윌리는 늘 같은 길을 걸었습니다. 보도블록의 금을 밟지 않으려고 조심히 앞을 향했고, 양말을 고르고, 잠옷 단추를 잠그는 순서까지, 그 모든 일에는 규칙이 있었습니다. 반복되는 일상을 살아가는 모습이 안정되어 보이기도 했지만, 이것들이 자칫 깨져버렸을 때 윌리의 마음엔 어떤 동요가 일어날까 싶어 노심초사하는 마음까지 생겼습니다. 고요한 호수의 물결에 어떤 파동이 언제 일지 몰라, 괜한 불안함이 감도는 듯 저 또한 조심히 책을 읽어 나가 보았습니다.



매우 기쁜 일이 있었던 날. 너무나 기뻤지만, 그 감정을 있는 힘껏 표현해내지 못한 채, 자신이 정해둔 금 안에서 조심조심 나아갔습니다. 윌리의 루틴과 일상에서 예측 가능한 신호등과 같은 안정된 기다림으로 책을 읽어나갔지만, 이 장면에서는 미세하게 쪼여오는 숨 가쁨이 느껴졌어요. 바깥으로 내뱉지 못하고 목구멍에서 제자리걸음을 하던 말들이 켜켜이 쌓여 응고된 느낌이, 두껍게 눌러앉았습니다.



하지만 결정적인 축구 경기 전날, 잠을 쉽사리 이루지 못했던 윌리는 늦잠을 자고 말아요. 그 바람에, 아침의 루틴은 모두 무시한 채 그저 달립니다. 축구장까지 내내 뛰어가는 윌리의 발이 금을 밝았습니다. 어, 탄식이 절로 나왔습니다. 두껍게 눌러앉았던 응어리가 녹는 듯하면서도, 우려되는 마음이 같이 올라왔습니다. 괜찮을까... 걱정되던 그 무언가가, 주인공의 마음에 대해서인지, 해피 엔딩을 당연히 바라고 있었던 고정관념에 대해서인지, 늘 제자리만 맴돌던 제 마음에 대해서인지는 모르겠어요.



평소와 다르게 시작되었던 그 하루는 주인공을 완전히 다른 곳으로 데려갔습니다. 작은 디딤 하나가, 그를 경기의 주인공으로 만들었습니다. 관중들 사이에서 "축구 신동!"이라는 환호를 받던 윌리의 얼굴은 어느 때보다도 편안한 얼굴이었어요. 그 편안함 속에서 저 또한 안도의 한숨과 함께 마음의 결이 부드럽게 정돈되고 있음을 느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모두 자신만의 '금'을 만들며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실수하지 않기 위해, 상처받지 않기 위해, 이미 알고 있는 세계에서 벗어나지 않기 위해. 하지만 그 선을 지나가는 순간, 삶은 갑자기 새로운 방향을 열어주는 것 같기도 합니다. 늘 하던 방법을 잠시 내려두고, 익숙한 안정에서 한 걸음 벗어났을 때 비로소 보인 풍경들. 그 조심스러운 금 하나를 밟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지만, 결국엔 더 넓은 곳으로 데려다주곤 했던 것 같습니다.


언제 여기서 파릇한 벼가 자라고 열매를 맺었는지 상상이 안 되는 황량한 논밭을 보며 생각했어요. 현재의 불편함을 감수하고도 익숙함이 좋아 행했던 것들. 갈아엎은 논밭처럼, 익숙했던 나의 방식들도 하나씩 밀어내면, 그 아래에서 전혀 다른 빛깔의 내가 돋아날지도 모르겠다고. 틀을 깬다는 것은 거창한 도약만을 뜻하진 않는 듯합니다. 평소 걷지 않던 길로 걸어보기, 나를 가두던 믿음에서 반 걸음만 물러나보기, 누군가의 시선을 잠시 내려놓기와 같은 정도의 작은 균열이면 충분할 것 같아요. 그 금 하나를 밟는 순간, 삶은 의외로 조용하고 부드럽게 변화를 허락할 거예요. 그렇게 그렇게, 가끔씩은, 나를 묶던 금을 넘어서, 새로운 길을 스스로 그려가는 하루가 되기를.




keyword
화, 금, 일 연재
이전 08화[소신] 꼬마와 어른의 분류 기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