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 5개월 차
이번 여름은 누구나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만큼 여름이 길었다.
물놀이와 바다 뜨거운 태양을 누구보다도 사랑하는 나는 자타공인 여름녀이다.
두꺼운 옷도 싫어하고 긴소매 티셔츠도 즐기지 않는 오직 민소매와 크롭을 즐기는 여름을 사랑하는 사람.
그래서 여행도 여름 액티비티가 가득한 여름 나라를 좋아하는
어떨 땐 땀으로 어떨 땐 여름비로 흠뻑 젖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
그런 나에게도 이번 여름은 유난히 길었다.
추석까지도 폭염주의보가 사라지지 않고 전국적으로 발령되었을 땐 아 이제 여름 올해는 그만하고 싶다. 잠시 이별하면 어떨까 하고 나 혼자 지겨운 여름과의 마음 정리를 해 보기도 했다.
올해 5월 말 나는 번듯한 직장을 퇴사했다. 원래 작년 10월쯤엔 꼭 하겠노라고 백번의 고심 끝에 마음을 먹었지만 그 마저 다시 용기를 더 충전할 수 있는 유예기간이 필요했고
올 5월이 되어서야 정말 퇴사를 할 수 있었다.
올 해는 여름이 늦게까지 우리 옆에 있었지만 오기도 엄청 일찍 온 탓에
초여름의 시작과 함께 퇴사를 하게 된 것이다.
보통 회사 나가면 시베리아라는 우스개 농담이 있는데 날씨가 정말 상상초월로 더우니
시베리아는 단 한 번도 떠올리지도 못한 것 같다.
본가인 부산으로 돌아가 어이없는 9월 중순의 폭염주의보를 나흘 정도 맞고 서울로 돌아오니 온종일 비가 내렸다. 그러자마자 신기하게도 온도가 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어제 아침엔 비가 오는 바람에 아침엔 뛰지 못했고 오후에 자연 미스트와 비 오는 날 특유의 한강 물비린내와 함께 한강을 뛰었는데 제법 시원했다. 바람도 많이 불어서 땀이 금방 식어 내렸다. 오늘 아침엔 온도가 20도가 채 안 되는 날씨여서 집에서 나설 땐 서늘하기까지 했다.
아주 잠깐 바람막이를 입고? 들고 가야 하나 고민하기도 했다.
정말 이번 여름에 후회라곤 없을 만큼 아주 원 없이 매일매일 땀을 흘렸는데 그래서 여름이 이제 가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는데 어제저녁 오늘 뛰면서 땀은 나는데 또 땀이 금방 식어 보송보송 해 지는 걸 보니 괜스레 아쉬웠다. '아 3km 만 더 뛰어야 하나? 왜 이렇게 땀이 많이 안 나는 것 같지?' '오늘은 칼로리 소모량이 뭔가 찌뿌둥한 것 같은데?'등 분명 흠뻑 젖은 물에 빠진 생쥐 꼴로 엘리베이터를 타는 것을 민망해서 싫어했는데 비교적 보송보송한 상태로 들어올 수 있게 되자마자 또 청개구리 같은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건 뭔가.
뜨거웠던 이번 여름은 너무 뜨거워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어서 좋았다. 시베리아 따위는 느껴보지도 떠올려보지도 않고 훌쩍 5개월이라는 시간이 지나갔고 그 뜨거움 속에서 열심히 뛰었다. 아침 달리기가 있어서 퇴사한 후에 단 하루도 게으름 피우지 않았다. 아침에는 반가운 사람들을 만나 회사처럼 형식적인 인사가 아니라 정말 우리 모두의 오늘 하루 안녕을 바라는 마음으로 인사하고 웃으며 에너지를 얻었고 그렇게 즐겁게 그리고 뜨겁게 부지런하게 이 긴긴 여름을 보낼 수 있었다. 올 해는 꼭 일 년의 반 정도가 평균 이상으로 뜨거운 참 지겨운 여름이었던 것 같은데 이렇게 하루 이틀 만에 코 끝이 찹찹해지는 걸 보니 희한하게도 그 나름대로의 아쉬움이 또 생기는 것 같다.
이제야 조금 정신을 차려본다. 매일 아침 뜨겁게 달리고 와서 샤워를 하고 세탁기를 돌리고 에어컨과 선풍기로 만들어진 적정 온도의 찹찹한 바람 앞에서 정신을 차리고 오늘 해야 할 일을 생각했던 것처럼 조금 선선해진 지금에서야 눈 크게 한번 뜨고 바람을 느끼며 앞으로 갈 길의 방향을 잡아 본다.
정신이 혼미해질 만큼 무덥고 숨이 턱턱 막히는 여름이었지만
그 여름에도 정신은 없을지언정 매일 멈추지 않았던 나를 새삼 칭찬하고 싶다.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았지만 지나고 보니 5개월 동안 뛴 605.78km라는 키로수가 남았고
다리에 근육도 왠지 묵직한 것이 1kg 이상은 붙은 것 같다.
여름 내내 매일 똑같이 6시 기상을 했더니 이제는 무슨 일이 있어도 어디에 있어도 눈이 번쩍번쩍 떠진다.
정말 사람이 죽으라는 법은 없다.
매일 시베리아 같거나 너무 뜨거운 불구덩이, 숨이 턱턱 막히는 사막 같아도, 정신을 꼭 차려야 할 필요도 없이 그저 매일 하고자 했던 일을 해 내면서 시간이 가기를 기다려 주다 보면
정말 지겨웠던 여름도 언젠가는 풀이 꺾여 지나가고 다시 보송보송한 가을바람이 불어온다.
그럼 또 이상하게 그 정신없이 뜨거웠던 여름이
오히려 시베리아 인 줄도 모르고 지나가서 좋았던 것 같다고 아쉬운 웃음을 짓는 순간도 온다.
멈추지 않고 시간을 기다리는 방법
이것 또한 다 지나간다 고 생각하고 하염없이 기다리기엔 지겹기도 하고 그동안 오만가지 생각도 날 테니
꼭 그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면 매일 해야 하는 한두 가지를 무슨 일이 있어도 해내어 보면서
내가 주최가 되어 시간을 보내어 주는 건 어떨까
한 끗 차이지만 주최가 좀 더 내가 되는 점에서 나는 이 편이 더 마음에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