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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재 Jan 02. 2023

2022년 회고

    얼마 전, 워니 님의 주선으로 아주 재미있는 모임에 참여했다. 누가 오는지, 몇 명이나 모이는 지도 모른 채였다. 12월 말 예정된 모임을 두 달 정도 전부터 어레인지하는 워니님은 "제 주위에 야망 있는 여자들끼리 모여 연말을 회고하고 새해 목표를 나누는 모임"이라고 짧고 굵게 설명했다. 워니 님 주위에 있는 좋은 여자들이라니 상상만 해도 얼마나 멋진 사람들일까 싶었다. 거절할 이유가 없잖아! :*) 그리고 시간은 빠르게 흘러 12월. 강남역에서 여자 여섯이 모였고, 나는 그녀들과 아주 오랜만에 개안하는 기분으로, 시간 가는 줄도 모른 채 웃고 박수 치고 떠들었다. 참 달게 느껴지는 대화였다. 세희님이 돌아가는 길 '트레바리 완전 초창기 그- 그 시절 느낌 같지 않아요?' 하셨는데, 그 표현이 공감이 가서 그 후로도 혼자 몇 번 더 떠올렸다.


우리는 그 자리에서 각자 올해와 내년의 키워드를 세 개씩 꼽았는데, 나는 올해의 키워드로 다음 세 단어를 꼽았다. 정체성 자산, 새옹지마, 자기신뢰.


정체성 자산. 올해 어떤 장면들을 마주하며 지금 지나고 있는 이 시기가 나라는 사람을 형성하는 근간, 그러니까 정체성에 꽤 깊은 영향을 미치겠구나, 어렴풋이 직감한 순간들이 있었다. (어떤 경험들은 강렬해보여도 그냥 스쳐가는 데 비해.) 나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으로 살 것인지를 결정하는 데에 영향을 미칠 장면이나 선택들을 대면하며, 아마도 조금은 오만하게 살고 있던 내가 다시 한 번 '아, 나의 뿌리가 이런 데에 있었지'를 깨닫는 시간이기도 했다.


그래서 올해는 나를 나답게 하는, 내가 생각하는 나와 사람들이 종종 말하는 '선재(님)다움'에 대한 복기를 많이 했다. 그렇게 과거의 경험들이 내게 미친 영향을 곱씹을 수록, 삶도 나도 참 변화무쌍한 것임을, '사람은 안 변해' 같은 말이 얼마나 게으른 것인지 알아챈다. 그리고 그에 따르면, 지금 내가 내리는 선택이나 내가 몰두하고 있는 고민의 종류가 곧 내일, 다음 해, 10년 후 내 삶의 모습을 결정할 거라는 생각까지 가닿고선 조금 놀란다. 나의 아이덴티티를 구성하는 기억과 선택들의 질을 높이자는 다짐. 그것이 올해를 돌아보며 떠오른 첫 마음이었다.


새옹지마. 오만함을 덜어내주는 마법 같은 네 글자. 원래도 살다보면 가끔 떠올리는 말이었지만 요 근래만큼 이 말을 자주 되뇌인 적이 없었다. 이 말이, 갑자기 닥치는 힘듦을 잘 견디게 해주었고 좋음의 찰나에 집중하게도 해주었다. 올해는 주로 아픔, 죽음, 위기, 같은 순간들로부터 나를 구해내주는 말이었다. 억울함도, 화도, 슬픔도 조금은 잠재우고 '다음이 있음'을 기억하게 해주는 말. 이것이 또 어떤 것으로 이어질지 모른다는 생각 그 자체는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지만, 힘들 때는 다음을 기약하게끔 하고, 좋을 때는 오만함을 덜어내게 하는 도구로써 기능했다.


자기신뢰. 올해 겪은 크고작은 부침 속에서도 내가 중심을 잃지 않을 수 있었던 데는 자기신뢰가 큰 몫을 했다. 나에게 회복력이 있다는 믿음. 내게 필요한 것은 내가 가장 잘 안다는 믿음. 아이유가 '내 운명을 고르라면 눈을 감고 걸어도 맞는 길을 고르지'라는 가사가 자기에게 정말로 현실이 되었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나는 아직 그 정도까지의 확신은 아니지만. 그래도 나라는 사람에 대한 믿음과 애정이 있어서, 그리고 그것은 갑자기 생기거나 부여한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을 차곡차곡 쌓아온 믿음이라서, 그것들만이 내가 온전히 가진 것이라는 기분으로 2022년 한 해를 잘 버티고, 넘어왔다. 이제 막 시작된 올 한 해는 나와의 약속을 조금 더 중요하게 여기고 나에 대한 믿음을 더 단단하게 쌓아서, 그 기반을 토대로 더 먼 모험을 떠날 채비를 하는 시간으로 만들고 싶다.


여기까지 쓰고 보니 2022년은 어떤 해였나- 라는 스스로의 물음에 비로소 간명하게 답할 수 있을 것 같다.

깊어지는 시간이었다고.





[외전] 더 많은 키워드로 보는 2022


메디아티: 2022년에는 특히 첫 직장, 메디아티에서의 시간을 많이 돌아봤다. 장충동부터 시작해 혜화동까지 촘촘하고 뜨겁게 보냈던 한 시절. 그곳에서 많은 것들을 배웠지만, 그중에서도 시간이 지나도 녹슬지 않는 연대감과 우정이 올해의 내게 특히 든든한 힘이 되어주었다. 존경이나 사랑의 마음은 꼭 완전하거나 완벽할 필요 없다는 사실도.


WHY: 선재님은 왜 그렇게 열심히 일하는 것 같아요? 뭐가 선재님을 그렇게 애쓰고 마음 쓰게 만드는 것 같아요? 라는 질문을 받았다. 약간 당황스럽기도 하고 질문을 받으니 생각보다 내가 그 부분에 대한 생각 정리가 안 되어 있음을 깨닫고 '그.. 그냥 그게 저라는 사람인 것 같아요.' 대답했는데, 제대로 답하지 못하고 넘어간 그 질문이 이후로도 오래 마음에 떠다녔다. 이대로 어물쩡 넘어가지 않게 조금 더 생각해보고, 혼자서라도 대답을 정리해볼 예정이다.


일과 나의 관계: 위 질문과 비슷한 듯 또 다른 뉘앙스로. '나는 뭘 위해 달려왔지?' '그러게. 나 뭘 위해 이렇게까지 했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많이 던졌던 하반기였다. 그 질문에 허무를 느끼지 않기 위해서는 역시 이에 대한 나의 개인적인 신념이 보다 정확하게 정리될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YNC: 올해 나를 지탱했던 것 역시 사람. 가족과 지만이, 다음으로는 YNC 용산냥아치클럽이었다. 만세!


결혼: 내가 결혼을 한다(!) 나와 지만이 모두 서로를 처음 만날 때만 해도 비혼이 기본값인 사람들이었는데, 여러 고개를 넘고 또 많은 추억을 쌓은 끝에 결혼이라는 선택까지 오게 되었다. 계속해서 좋은 파트너이자 동반자가 될 수 있도록,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한 노력을 꾸준히 지속할 것이다.


First things first: 작년 한 해 나는 이렇게 살았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가족, 사랑, 우정, 동료. 중요한 것을 실제로 1순위에 놓고, 거기에 에너지를 의식적으로 많이 쏟았다. 그러면서도 나의 몸과 마음의 건강을 돌보는 것에도 소홀하지 않았으며 루틴도 지속해왔다. 이 기세를 몰아, 올해는 이 'first things'의 범위를 보다 확장해보고 싶은 욕심이 있다.


까르페 디엠: 내가 누리고 있는 일상의 평온함이 얼마나 취약한 것인지를 깨닫고 겸손해지는 시간을 가졌다. 여러모로.


즐긴 날들: 놀기도 열심히 놀았다. 틈틈이 즐겼던, 나의 마음을 살찌웠던 장면들이 사ㅣㄴ첩에 한가득이다. 눈 덮인 한라산 설산에 느꼈던 황홀감을 잊을 수 없고. 친구들과 짝꿍들이 모여 떠난 스키 여행이라든지(된장찌개랑 오뎅탕 하겠다고 육수까지 싸오고 묵은지로 반죽을 해오며 시메사바를 준비해오는 남자들이 있었다), 사진으론 담기지 않는 아름다운 가을 내장산, 짧고도 길었던 방콕에서의 아시아베스트바 도장깨기 여행 등. 부지런해야 즐기기도 잘 즐길 수 있는 것이다. 올해도 올해의 리듬으로 틈틈이 즐기며 지낼 것이다.


우정: 올해는 우정에 시간과 에너지를 충분히 쏟았고 그것이 또 내 마음의 체력이 되어주었다. 소중한 친구들이 셋이나 결혼을 했고, 새로운 장을 여는 것에 대한 축하와 응원을 진심으로 담아 전하고 나누었다. 행복해야 해 친구들! 우리 라라님의 생일도 함께 축하해주었고. 친구들과 강릉 여행에 가 추억도 쌓았고(+숙취와 요트의 추억..), 버거킹과의 정기적인 데이트도 놓치지 않았다! 하늘이의 유령서점 전시에 가 너무도 아늑하고 즐거운 저녁도 보냈으며 스윽- 바람 쐬러 대부도에 조개구이 먹으러도 다녀오고. 짬짬이 술을 빚으며 교육원 사람들과도 관계를 맺고. 새로운 보금자리를 마련하면서 소중하고 보고 싶었던 사람들을 초대해 정성껏 음식도 대접하고, 그리움을 해소하는 시간을 보냈다. 앞으로 차근히 더 알아가고 싶은 새로운 얼굴들도 만났고. 일터에서 쌓은 야무지고 소중한 우정도 있고! 2023년에도 멋지고 찐한 우정을 계속해서 잘 쌓아나갈 테다.


좋은 어른: 격동의 하반기를 보내며, 곁에 있는 어른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옳다고 믿는 것이 마음 안에 바로 서있으면서도 새로운 것에 대해 열린 태도를 유지하고, 그러면서도 자신의 동력, 취약성, 색깔 같은 것들을 오래 고민해왔고 그래서 정확히 알고 있는 편에 가까운 그런 어른들. 나도 그런 모습일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바라보며 동경하고 닮고 싶은 좋은 어른들이 곁에 있다는 사실에 참 감사합니다!


동질성이 사랑의 본질은 아니다: 어쩌면 당연한 말인데도 잊고 지냈던 것 같다. 그리고 오히려, 너무 잘 맞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록 오히려 다름에 대응하는 연습이 덜 되어 있어 특히 더 취약할 수도 있다. 그러니 자주 기억할 것은, 동질성을 사랑과 혼동하지 않을 것. 차이를 현명하게 받아들이고 존중하는 법에 대해 잘 훈련해나가야 하고, 동질성을 기반으로 하는 동지애보다는 오히려 그것이 지속가능한 파트너십에는 더 중요할 수 있다.


돌봄과 책임의 무게: 여행에 캠핑에 차박에, 어디든 맘 가는 대로 발길 닿는대로 떠나는 편이었는데, 가을 즈음 사당으로 독립을 하고 하트를 모셔오면서는 모든 종류의 여행을 잠정 중단했다. (그 과정을 기꺼이 동행해주고 있는 짝꿍에게 고마운 마음) 밥을 챙겨주고 아프면 약을 챙겨먹이고, 토한 것을 쫓아다니며 치우면서도, 고되지만 그래도 어디선가 우러나오는 체력과 사랑을 느낄 때 조금 놀란다. 하지만 돌봄과 책임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 건지는 점점 더 깨닫고 있어서 책임 질 대상을 함부로 늘리지 말자는 다짐도 강하게 했음. 돌봄노동, 나아가 자신의 선택에 책임을 지려 애쓰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박수와 존경을 전한다 :)


집과의 상호돌봄: 집에 산다는 것은 집을 돌보는 일이기도 함을 깨달았다. 정성스럽게 집을 쓸고 닦고 예뻐해주고 아껴줄 수록 집도 나를 그렇게 대해준다. 첫 보금자리로 입주한 지금의 이 집과 나의 관계는 아주 맑음! ^~^


루틴의 힘: 변하지 않는 것이 주는 힘, 그러니까 루틴의 힘을 실감한 한 해. 미라클 모닝은 약간 들쑥날쑥 제멋대로 하긴 했지만 그래도 지속해오고 있다는 데서 얻는 에너지가 있다. 요가라든지 PT, 일기 쓰기 역시. 상담도 빼놓을 수 없지! 트레바리도 꾸준히 했다. 그것도 UX 관련 클럽으로. 매번 완벽하진 못했어도 포기하지 않고 쥐고 온 것들이 이제 보니 다 자산이다. 모든 상황과 관계가 변할 때 유일하게 나의 노력으로 일궈낼 수 있는 것. 루틴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든든한 뒷배가 되어주는 일인지. 내가 일군 루틴은 곧 삶의 기반이고, 이 안정성이 앵커가 되어 내가 더 많은 것들을 품고 소화할 수 있는 관용과 깊이를 길러준다.




내가 내린 선택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듯, 지금 이 순간의 선택과 행동이 내일, 내년, 10년 후의 나를 만들어가는 과정임을 상기하며. 올해는 좀더 치열하고 후회 없게. 뜨겁게 박수 받고 박수 치는 순간들을 많이 만들며 살아볼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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