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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르조 Aug 02. 2022

만나던 사람에게 남자친구가 있었다.

220801

만나던 사람에게 남자친구가 있었다.


유난히 더웠던 7월의 어느 날 그녀를 만났다. 먼저 레스토랑에 도착한 나는 떨리는 마음을 달랜답시고 탄산수를 들이키다 기침을 연거푸 했다. 메뉴판을 세 번째쯤 뒤적이고 있을 때 문에서 종소리가 났다. 이어지는 다급한 잰걸음과 함께 하얀 드레스를 입은 그 사람이 내 앞에 나타났다. 달콤한 꽃 향기가 코를 찔렀다. 마스크를 벗으며 사과하는 그녀에게 탄산수를 권했다. 표정이 밝은 사람이었다.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란 사람에게서만 느껴지는 특유의 구김 없는 웃음이었다. 어쩌면 한 두 번 늦어본 솜씨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피식하며 설레는 마음을 다잡았다.


그날 우리는 새벽까지 같이 시간을 보냈다. 열심히 연구한 파스타와 피자를 레드 와인과 곁들인 후에는 위스키와 화요가 뒤따랐다. 수많은 말이 오갔다. 뭐하면서 살아왔는지, 요즘 무얼 하고 있는지, 어쩌다 소개팅에 나오게 되었는지, 처음 만나는 사람들이 으레 하는 별 것 아닌 질문들을 묻고 답하면서 우리는 서로를 조금씩 알아갔다. 5시간 전까지는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었는데, 라는 생각에 이르렀을 때쯤 나는 이 사람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했다. 영업시간이 끝난 술집을 나와 떠돌던 우리는 노래방에 들어갔다. 그녀는 온 마음을 다해 <열애중>을, 나는 <사랑Two>를 불렀다. 그 사람을 먼저 태워 보내고 나는 걸었다.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었다. 특유의 냄새와 라디오 소리가 가득 찬 택시에 갇히기 싫었다. 싱글벙글하며 새벽길을 걷다 뛰다 했다. 난 기분이 좋을 때 뛴다.


그 후로도 그녀를 6번 더 봤다. 나는 그 사람의 어떤 점이 그렇게 좋았던 걸까. 많은 부분 그 사람은 내가 평소 생각했던 이상형과 달랐다. 그녀는 책보다는 쇼핑을, 재즈보다는 EDM을 좋아했다. 나는 늘 몸과 마음이 건강한 사람을 만나고 싶다고 얘기하고 다니곤 했는데, 그녀는 스스로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했다. 삶을 스스로 개척해 나가기보다는 부모님에게 의존하는 모습도 많이 보였다. 이런 생각들이 그 사람을 밀어내서 마음과 따로 움직일 때마다 고민했다. 결론은 항상 같았다. 좋은데 이유가 필요한가.


그럼에도 이유를 떠올려본다면 솔직함이 있겠다. 사람마다 스스로를 온전히 드러내는 데 걸리는 시간이 다르다. 성벽을 쌓아두고 가면을 쓴 채 온 힘을 다해 본모습을 노출하지 않으려는 사람이 있는 반면, 나는 이런 사람이라는 걸 만천하에 드러내고 "이게 나니까 네가 알아서 해!" 하는 사람이 있다. 그녀는 후자였다. 투명했다. 게다가 직관적이었다. 그녀의 말을 들을 때면 가끔 플로베르가 얘기했다던 일물일어의 법칙이 생각났다. 한 가지 사물을 표현하는 가장 적확한 단어는 하나밖에 없다는 뜻이다. 그녀는 아니라며 손사래를 쳤지만, 내가 느끼기엔 그 사람의 말은 많은 부분 거침없고 정확했다.


그 사람과 유난히 가까워졌던 날이 있었다. 비 내리던 어느 날 차 안에서 그녀는 자신이 무너졌던 경험을 털어놨다. 이 얘기를 해도 될지 모르겠다고 주저하며 이야기를 시작한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자신의 상처를 조심스레 드러냈다. 어둠이 가득한 시간들이었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상실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혼자서 무엇을 해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무력감, 여태껏 얼마나 많은 어려움을 회피하고 살았는지에 대한 후회가 뒤섞여 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온전히 듣는 것뿐이었다. 무슨 말을 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녀에게 조금이나마 따뜻함이 되었으면 하고 그 순간 진정으로 바랐다. 그 사람의 어떤 본질에 가까워진 것 같았다. 그녀를 보듬고 싶었다.




그녀에게 남자친구가 있다는 사실은 지난 주말의 시작과 함께 알게 되었다. 친구들을 만나러 따릉이를 타고 강남구청역을 지날 때였다. 아는 형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목소리가 좋지 않았다. 잠시 자전거를 세워보란다. 그녀가 자신의 친구와 사귀고 있다는 얘기였다. 사귄 지 일주일이 되었다나. 고민 끝에 너한테 얘기하는 게 맞을 것 같아서 전화했단다. 일단 알겠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멍했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금요일 저녁 특유의 산뜻한 기분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우선 자전거를 대고 약속 장소에서 친구들을 만났다. 특히 한 놈은 5년 만에 보는 녀석이라 못다한 얘기가 많았다. 그 친구의 근황을 최대한 들어보려 했다. 박사 유학도 가고 내년에 결혼까지 한단다. 평소였으면 할 말이 넘쳐났을 텐데, 힘이 없었다. 결국 뭔가 이상하다는 낌새를 챈 친구들에게 자초지종을 털어놨다. 세상이 좁은 게, 전화 온 형이 그녀를 그녀의 남자친구에게 소개해준 거였다. 형은 그녀의 사진만 받은 사실상 남이었고 나는 형이 아닌 다른 사람으로부터 그녀를 소개 받은 케이스였다. 우연히 본인이 소개해준 사람이랑 동일 인물이었던거다.


친구들은 이 복잡한 관계도를 세 번째쯤 듣고 나서야 이해를 했다. 설명을 하면서도 이런 일이 나한테 벌어졌다는 게 믿기지가 않았다. 믿고 싶지 않았던 마음이 컸던 것 같다. 정황상 증거가 너무나 명확한데도, 나는 그녀에게 직접 듣기 전까지는 섣불리 판단하지 않기로 했다. 친구들한테는 무죄 추정의 원칙 모르냐고 큰소리쳤다. 마음을 가다듬고 지인이 너 남자친구 있다는데 사실이냐, 는 내용의 문자를 보냈다.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우리는 10시 31분에 전화했다.


사실이다. 상처를 줘서 미안하다. 면목이 없다. 정신이 나갔었던 것 같다. 여기까지는 어느 정도 예상했던 말이었다. 그래도 내게 더 끌렸다는 취지의 말을 들었을 때 가슴이 분노로 뜨거워졌다. 그런 말은 정말 하지 말지. 흥분을 애써 눌러 담고 끝까지 그녀의 말을 들었다. 저급하게 가지 말자고 스스로에게 끝없이 되뇌었지만 말투가 거칠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녀의 말이 잦아들 때쯤 짧게 한 마디를 내뱉고 끊었다.


그러곤 쓸데없이 술을 많이 마셨다. 현명하지 못한 일인걸 알면서도 어쩔 수가 없었다. 오랜만에 보는 친구에게 많이 미안했다. 친구는 웃으며 역대급 썰 들고 와 줘서 술이 달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헤어지고 집에 가는 길에서 간신히 정신줄을 부여잡았다.


주말 동안 부모님을 대할 때도, 회사 사수의 결혼식에서도 아무렇지 않은 척 밝게 웃었다. 오히려 더 장난치고 축가는 춤추면서 따라 부르고 그랬다. 마침내 친구들과 헤어지고 집에 계시던 부모님도 다시 내려가셔서 혼자가 되었다. 정리되지 않은 생각들이 머리를 휘젓고 다녔다. 침대에 누워서 뭔가를 보다가 잤다. 계속해서 잤다. 자고 일어나서 밥을 대충 해먹었다. 스트레칭도 하고 운동도 했다. 이제야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괜찮지 않다는 걸 인정하기로 했다. 처음엔 아무 의미 없는 사람으로 치부하려 노력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난 그 사람을 꽤 좋아하고 있었다. 상대방에게서도 느껴지는 호감이 신기하고 고마웠다. 하지만 우리는 인연이 아니었다. 그걸 우선 받아들여야 했다.


그 다음엔 그 사람 입장에서 생각해보려 했다. 왜 그랬을까. 두 사람에게 동시에 호감을 느끼는 건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일지도 모른다. 내게도 없었던 일은 아니다. 한 사람과 관계를 시작하기로 약속했음에도 다른 사람을 만나는 건 잘못된 행동이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었을까. 아마도 충분한 시간을 두고 본 다음에 한 명을 정리하려 했겠지. 엄밀히 말하면 한 명이랑은 사귀고 있지만 한 명과는 그렇지 않아서 괜찮을 거라는 합리화에 이르렀을 것 같기도 하다. 잠시 이러고 있는 건 괜찮다고 느꼈을지도 모른다. 사실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히 모르는 게 가장 큰 이유가 아닐까. 어쩌면 그녀에게는 두 사람과 만나는 행위가 자신이 원하는 걸 찾아 나가는 과정이었을 수도 있겠다. 그 과정에서 두 사람이 입을 상처에 대한 그녀의 무관심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두 사람에게 피해를 입혀야겠다는 뚜렷한 악의가 있었다기보다는 아마도 본인의 감정이 혼란스러워서 당면한 문제를 회피한 결과에 대한 부작용이 아닐까.


그러고서는 나에게 돌아왔다. 내가 마음을 너무 쉽게 준 것은 아닐까. 나는 호불호가 강한 편이어서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게 되면 마음이 스스로 마음껏 발산하도록 내버려 두는 경향이 있다. 주가에 가격제한폭이 있듯이 감정도 너무 널뛰기하지 않도록 조금 더 통제할 필요가 있는 건 아닐까. 그럼으로 혹시나 모를 위험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고 상대방과 감정선도 어느 정도 맞출 수 있을 것이다. 매번 생각하다가도 막상 호감이라는 감정이 찾아오면 반가워서 목줄을 풀어버리고 만다. 어디까지 용기를 내고 어디부터는 내 마음을 지켜야하는 걸까. 내겐 너무 어려운 일이다. 다음에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아마 난 이런 고민을 했다는 사실도 잊은 채 직진하려 할 것이다. 어쩌면 스스로를 "낭만적"이라고 규정해왔던 걸지도 모르겠다. 사랑 앞에서 하나하나 계산기를 두드리진 않더라도 다치지 않기 위해서 나를 보호할 장치는 분명히 필요하다.


내가 생각했던 이상적인 조건을 갖추지 않은 사람을 만나서 이런 일이 생겼던 걸까. 몸도 마음도 건강한 사람이 내가 원하는 사람이라면, 운동을 하거나 책을 읽는 사람 중에서 고려해보는 식이다. 그러나 필터를 넣어서 조건에 맞는 사람을 찾는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은 동시에 누군가를 만나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는 건 아니지 않나. 결국 이 문제도 앞서 감정을 통제하는 것과 궤를 같이한다. 어느 정도 필요한 걸 누가 모르는가. 내게 얼마나 필요한지, 아직 스스로 잘 모르고 있는거겠지. 뭐 사실 그래도 괜찮다는 생각이 든다. 어차피 답 없는 문제 고민하다보면 조금 더 스스로가 원하는 답에 가까워진다는 마음가짐으로 임하는 게 맞다. 인생이 언제 뜻대로 되었나.


계속해서 생각해본 결과 드는 생각은 하나다. 운이 나빴던 거다. 이런 사람일 줄 어떻게 알았겠는가. 너무 실망할 필요도 상처를 부둥켜 앉고 자기연민에 빠질 필요도 없다. 다만 다음엔 조금 더 조심할 것. 아니다 어차피 나는 조심할 리 없다. 사소한 좌절에 용기를 잃지 않고 계속해서 도전할 것. 이 정도가 스스로에게 하고 싶은 말이다. 한 수학자가 자신의 마음에 대해 했던 인터뷰로 이만 마무리한다.


"목표를 미리 정해두면 마음이 경직되니 생각대로 삶이 풀리지 않더라도 조급해하거나 집착하지 않았으면 해요. 마음은 자기가 가고 싶은 곳으로 가니까요. 자연스럽게, 하고 싶은 것을 하게 해주되 조금씩 도와주는 것이 최선인 것 같아요. 아이를 키우는 것처럼 자신을 친절하게 돌봐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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