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살아남기
7개월 차에 접어들었다. 아직도 낯설고 묘한 기분이 든다. 모든 게 너무 빠른데 가끔은 이해할 수가 없다. 너무 잘 들리는데 알아듣지 못할 때가 있다. 다 읽을 수 있고 잘 보이는데 너무 다 보여서 버겁고 부담스럽기도 하다. 어딜 가나 외모가 눈에 띄어서 받는 시선을 걱정할 일이 없어야 하는데 외출할 때에는 아무렇게나 입고 나갈 수가 없다. 내 어린 시절, 청춘, 모든 희로애락이 여기에 있었는데, 이 작은 손바닥만 한 나라는 어딜 가나 내 추억이 묻어 있는데. 어떻게 가끔씩 이렇게 낯설고 불편한 느낌일까 스스로에게 놀란다.
아이들 옷을 사는 일이 요즘은 너무 스트레스다. 일 년 내내 한국의 기후와 비슷한 도시에서 지냈지만 겨울에 단 한 번도 입어보지 않았던 다운점퍼가 여기에선 당장 너무 필요했다. 급했다. 미국에선 한겨울에 반팔을 입던, 한여름에 어그부츠를 신던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지만 여기선 남들이 다운점퍼를 입을 때 혼자 후드를 입고 가면 모두가 쳐다본다. 적당히 이름 있는 브랜드에서 좋은 가격이면 그냥 하나씩 집어오던 옷쇼핑이 이젠 너무 스트레스가 되었다. 옷을 사기 전에, 우선 학교 친구들이 어떤 옷을 입고 등교하는지 사전 조사가 필요했다. 조사결과는 롱패딩은 절대 안 된다였고, 무조건 검은색이어야 한다고 했다. 아이들 보다는 생활반경이 좀 더 넓은 나는 외출 시에 마주치는 청소년들의 패딩 브랜드로 통계를 내기 시작했다. 적당한 것을 사주고 타협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절대, 새로운 환경에서 튀고 싶어 하지 않고, 빨리 '섞이고', 빨리 '속하고' 싶어 하는 나의 아이들은 너무 유난하지 않으면서도 부끄럽지 않기 위해 옷, 헤어스타일 등에 신경을 많이 썼다.
처음 미국에 갔을 때엔, 정말 무엇하나 쉬운 게 없어서 무척 괴로웠었다. 운전면허증 발급을 위해 관련기관을 5번이나 방문해야 했고, 계좌 만들기, 전기, 수도세 등록처리, 차구입 등 모든 것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우리의 신분을 의심받고, 증명하고의 연속이었다. 40년 가까이 열심히 살면서 쌓아온 모든 것들이 하루아침에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는 느낌이었고, 내가 태어나 자란 나라는 한없이 작고 보잘것없게 느껴졌다. 급속도로 영어가 느는 아이들과는 달리 튜터수업도 하고 ESL수업도 찾아 들으며 영어 공부를 했지만 좀처럼 실력은 늘지 않았다. 아침에는 늘 지역뉴스를 틀어놓았고 밤이 되면 지미팰런 쇼를 틀어놓았지만 대부분은 결정적 내용을 파악하기 힘들어 답답했고, 심지어 좋은 소식인지 나쁜 소식인지도 분간이 안될 때도 있었으며, 단 한 번을 지미팰런의 농담에 웃어본 적이 없었다. 5년 가까이 지내다 보니 주문하고 대답하고, 물건을 살 때 하는 영어는 어떨 땐 가족 중에 가장 잘한다는 느끼기도 하고, 가끔 훅 들어오는 스몰토크에 몇 마디라도 받아칠 수 있는 수준에는 도달했지만 아이들 학교 선생님과 유창하게 대화하고 싶은 욕구, 아이들 미국 친구의 부모님과 수준 높은 대화로 나 역시 친구가 되고 싶은 열망은 해소되지 못했다. 불합리한 일을 당했을 때,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고 돌아와선 한국에서라면 어디에서나 뒤지지 않을 언변을 장착하고 있다는 나의 항변에 아이들은 가끔씩 웃곤 했다. 아이들은 원어민 수준의 영어를 구사할 수 있지만, 생활 속 동행에서는 절대 입을 열지 않고 내가 하는 영어를 듣고만 있었다.
그랬던 내가, 돌아오기 직전 몇 개월간은 그곳이 너무 편안하게 느껴지고, 마치 처음부터 계속 여기에 있었나 싶을 만큼 돌아갈 한국이 더 걱정스러웠다. 귀국 직후 몇 주간은 밖을 나가면 온통 한국사람들로 가득 찬 거리가 너무 신기하고 놀라웠고, 심지어는 사람들이 나에게 너무 공격적이라고 느껴질 만큼 힘들고 어려운 감정을 겪었었다. 귀국한 다음날부터 출근한 아빠, 일주일 후 난데없는 중학교 교복을 입고 등교첫날부터 수행평가를 해야 했던 아이들, 온갖 관공서에서 한국식 행정에 두들겨 맞는 엄마. 우린 각자의 자리에서 그토록 그리워했지만 너무도 낯설디 낯선 모국을 온몸으로 겪어내야 했다. 그렇게 6개월이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