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직장을 때려치고 한국어 시키러 한국에 왔어요
이제 유치원 입학철이다. 나 역시 작년에 어느 유치원을 보낼지 고민하면서 동네의 유치원의 OT를 몇 군데 다녔던 기억이 새록새록하다. 요즘 유치원은 대학 입시처럼 치열하다. 우리 아이에게 더 잘 맞고 후기도 좋은 유치원을 찾는 것도 힘들지만, 찾았다 한들 지원해도 유치원 입학 점수에 맞추기가 정말 어렵다.
지역에서 나름 유명한 학군지인 이 동네에는 몬테소리 교육으로 유명한 유치원이 있는데, 이 지역 부모들은 줄을 서서 이곳에 자녀를 보내고 싶어 하는 곳이다. 이 유치원이 우리 집 걸어서 5분 걸리길래 나도 지원을 해봤다. 우리는 다문화 가정이고, 곧 둘째도 태어나고, 나 역시 프리랜서로 일하고 있었기 때문에 당연히 지원만 하면 붙을 줄 알았는데 우선 지원에서 떨어졌다. 와, 정말 대학 입시보다 더 치열하다.
사실, 이 5세를 가진 부모들은 인생에서 가장 논쟁적인 문제가 하나 주어진다.
'영어 유치원인가 아닌가'
이제 영유는 월 200만원이 넘으니 보통의 경제력으로는 보내고 싶다고 해서 다 보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요즘은 할머니 할아버지 경제력으로 영유를 보낸다고 하니 정말 온 집안이 힘을 써서라도 영유를 보내고 싶어 하는 것 같다.
더구나 우리 집 아이는 영어 한국어를 사용하는 바이링구얼이라서 주변의 엄마들이 '우리 아이도 영어 잘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해요?' '와 아이가 영어를 잘하니까 돈 아끼고 너무 좋겠어요' 등등의 말을 건네온다.
가볍게 그냥 웃으면서 얼버무리 기하지만 내 속마음은 사실 이렇다.
'정말 당신의 아이가 그렇게도 영어를 잘했으면 좋겠나요?'
우선, 이 영어를 잘한다는 것의 기준이 무엇인가.
레벨 1 - 수능과 토익에서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을 정도?
레벨 2 - 외국인을 만났을 때 기죽지 않고 프리토킹되는 정도?
레벨 3 - 외국에 나가서 살아갈 수 있을 정도의 영어?
레벨 4 - 아니면 평상시에 그냥 한국어보다 영어를 쏼라쏼라 교민처럼 말할 수 있는 정도?
내 생각에, 레벨 1, 2은 한국에서 그냥 정규 교과로 영어 공부 열심히 하다가 성인이 되어서 스피킹 공부를 필요에 맞게 좀 더하면 가능하다. 여기서 제일 큰 전제는 자신이 영어 공부를 좋아하고 관심이 있어야 한다.
레벨 3은 한국에서는 어렵다. 그냥 외국에 나가서 부딪치는 수밖에 없다. 사실 외국에 나간다가고 하더라고 단지 1, 2년으로는 어렵다. 한국에서 기초 문법 진짜 열심히 하고, 스피킹 공부도 진짜 열심히 하고 나서 외국에 나가서 실제로 살아보는 것이 제일 좋다. 왜냐하면 책에서 배운 영어와 실제로 살아가는데 필요한 영어는 살짝 결이 다르기 때문에 영어의 기초 + 현지 영어를 익히는 것이 가장 빠르다.
레벨 4는 외국에서 태어났고, 한국에서도 한국인들과 어울리지 않고 외국인들과 계속 어울리는 단계다. 한마디로, 한국어가 어렵다는 얘기다.
이렇게 레벨로 나눠 봤을 때, 일반적인 한국 가정에서 자라나는 5세 아이가 한국에서 영어 유치원만을 다녔을 때 도달할 수 있는 레벨은?
없다.
내 생각엔, 없다.
정말 정말 희망적인 레벨은 아마 레벨 1과 2? 하지만 이것도 영어 유치원을 다니지 않고도 나중에 중고등학교를 다니면서 가능한 수준이다. 이것도 영어 유치원을 다니면서 영어에 자연적으로 흥미가 생기고, 영어를 정말 미치도록 좋아하게 되는 경우여라만 나중에 커서 동기부여가 되어서 가능할 수도 있다. 하지만 영어 유치원 때문에 영어에 흥미가 떨어지고 오히려 영어에 겁을 먹게 되면 이마저도 어렵다.
영어 유치원에서 5, 6, 7세가 배우는 영어는 일단 한계가 있다. 어떤 색을 좋아하니, 이게 무슨 모양이니? 삼각형이나? 어떤 동물을 좋아하니, 부터 시작해서 나중에 뭐가 되고 싶니, 어떤 일을 좋아하니 등등의 대화. 물론 다 큰 성인도 이런 영어 대화를 못하는 경우가 많으니까 자신의 자녀를 영어 유치원에 보내고 싶어 한다. 하지만 이런 영어정도 한다고 정말 무슨 도움이 될까? 자신의 자녀가 영어를 잘하는 것이라고 착각하게 만들 수는 있지만 유치원 때 이 정도 영어 배운 것으로는 중학교 이상의 영어를 커버하기 어렵다. 또 솔직히 한국에서의 수능 영어, 토익 영어는 영어권에서 사용하는 영어와는 아~무 관련이 없고 그저 한국식 영어 트레이닝이기 때문에 역시 영유에서 배우는 영어와는 상관없다.
아마도 이쯤 되면 엄청난 반론이 예상된다. '우리 아이는 영유부터 시작해서 지금 해외 유학 가 있어요, 국제 학교 다니고 있어요' 등등의 케이스들. 아마 이 경우는 영유를 보낼 재정적인 여유도 계시고 그 이후에도 영어 노출이 더 많이 가능한 지원과 해외 유학, 국제 학교를 보낼 수 있는 경제력이 있으신 경우라고 생각된다. 그렇다면, 꼭 영어 유치원이 아니어도 다른 지원이 합쳐져서 영어 교육이 완성된 경우라서 영유만 보고 판단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단 하나 영유에서 가지고 나올 수 있는 것은 영어 발음인데, 이것도 사실 외국에 나가보면 인도식 영어 발음, 필리피노 영어 발음 다 통하기 때문에 굳이 영어권 사람들의 발음과 완전히 똑같아질 필요는 없다(좋으면 좋긴 하다.)
그리고 사실 나의 속마음은 이것을 한번 묻고 싶다.
당신의 아이와 어떤 언어로 소통하고 싶은가요?
난 영국에서 아이를 출산하고 아이의 한국어를 노출시키려고 노력했지만 아이의 한국어 발화가 되지 않아서 다니던 직장과 살고 있던 집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엄청난 경제적 손실을 감안하고도 나에겐 굳건한 한 가지 이유가 있었다.
'아이와 한국어로 소통하기 위해'
난 한국인 엄마이다. 한국어가 모국어인 사람이 내 아이와 한국어로 대화하지 못한다는 것이 끔찍하고 무서웠다. 내 아이와 같이 한국어로 웃고 울고 화내고 하는 것이 나에겐 삶의 문제였다.
이렇게 생각하게 된 계기가 있다.
내가 아는 옛 회사 동료는 부모님이 중국계 화교인데 영국으로 이민을 와서 자신을 낳았다. 그리고 그 동료는 어렸을 때 영어만 할 수 있는 보모 밑에서 컸기 때문에 중국어를 전혀 하지 못한다. 그래서 영어를 잘하지 못하는 자신의 부모와 거의 대화를 할 수 없다고 했다. 난 내 동료가 하는 얘기를 들으면서 내가 영국에서 아이를 낳게 되면 무슨 언어로 소통해야 하는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게 되었다.
다른 나라에서도 이중언어를 자연스럽게 노출해서 발화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럴 경우 대부분 부모가 이중 언어가 가능한 경우였고 (그 유명한 올리버쌤이라는 분도 부모 모두가 아이와 한국어+영어로 대화가 가능하시고, 이탈리아인 알베르토 부부도 이태리어, 한국어 둘 다 가능한 경우다) 우리 남편은 한국어가 아직 초보였기 때문에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아이를 데리고 한국으로 들어가는 선택이었다.
그래서,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정반대로 정말 어린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기 위해 애쓰는 현상을 보고 안타까운 마음도 들었다. 일단 언어는 주입식으로 시켜도 느는 것에 한계가 있다. 한국에서 영어를 배우면서 대부분 간과하는 점이 있는데, 언어는 사람과 소통하기 위한 도구이다. 아무리 언어를 배우더라도 소통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면 배울 동기도 없고, 잘 늘지도 않는다. 그리고 만 2, 3, 4세 아이들은 엄마 아빠와 소통하기 위해 언어라는 도구를 이용한다. 엄마 아빠가 한국어를 사용하는데 아이들이 영어를 사용하고 배울 동기가 생길 이유가 없다. 왜냐하면 언어는 효율성을 따라가기 때문이다. 엄마 아빠와 한국어로 대화할 수 있는데 영어를 배울 효율성이 없다는 말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내 아이가 영국에서 내가 하는 한국어는 다 알아 들었지만 영어로 대화하는 이유도 단 한 가지였다. 자기가 영어로 말하면 엄마 아빠가 둘 다 알아듣기 때문에 효율적이지만, 한국어도 대화하면 엄마만 알아듣기 때문에 한국어로 대화할 이유가 없다.
영어가 안되면 살아남을 수 없는 한국 사회에서 당신이 한국에서 백날 공부해 봤자 외국인과 대화할 때마다 말이 안 나오는 답답해 온 것, 사실 언어의 효율성의 측면에서 이것은 당연한 일이고 속상해할 일이 아니다. 한국어를 가장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환경에서 영어를 잘해야 하는 이 모순이 문제지. 챗 GPT가 나오고 인공지능이 발달하는 2024년에도 아직까지 가장 비효율적으로, 엄청난 돈을 써가면서 영어 유치원을 꼭 보내야 한다면, 적어도 그것의 의미가 무엇인지, 그 이후에 나올 아웃풋이 생각보다 크지 않아도 괜찮을지 정도는 생각해 봐야 한다. 또 영어를 사용하면 상을 주고, 한국어를 사용하면 벌을 받는 환경에서 자신의 아이가 한국어에 대해 어떤 이미지를 가지게 될지도 정말 심각한 일이다.
그리고 이 나이의 아이가 모르는 외국인과 영어로 대화 한마디 하는 것보다 나와 한국어로 더 깊이 소통할 수 있다는 것이 더 소중하다는 것도 한 번쯤 이야기하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