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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담Tea Aug 13. 2024

#소심해도 대범해도 친절해야 하는 이유

[오늘도 나이쓰] 50

8대의 러닝머신이 주르륵 이어져 있는 창가. 자주 올라가는 왼쪽 두 번째 러닝 머신 앞에는 자그마한 TV가 밤새 놓여 있습니다. 두 번째와 세 번째 사이에 걸쳐 있는 식으로 총 3대가 있죠. 보통은 이어폰으로 음악을 들으면서 볼륨은 0으로 해두고 화면만 봅니다. 그런데 한 날은 볼륨을 조금 높여야만 했습니다. 5살 동생에게 서툰 한국어 인사말을 가르치는 8살 언니가 꽤나 어른스럽게 보이는 화면이 가득했기 때문입니다.           


어린 자매가 한국에서 일하고 있는 아빠를 찾아가는 흔한 프로그램. 어린 언니는 아빠를 만난다는 기대감에 즐겁게 한글을 배웁니다. 그때마다 인사말을 쪽지에 조금씩 적어 둡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그런 프로그램에 자꾸 눈이 머뭅니다.


5년 전부터 경기도 외곽 한 공장에서 일을 하고 있는 서른일곱의 아빠. 서른둘의 엄마와 어린 자매는 7시간의 비행기를 타고 인천공항에 도착, 다시 2시간 넘는 지하철과 1시간 넘는 시간 동안 다시 버스를 타고 바람에 먼지만 일어나는 썰렁한 공단 입구 공터에 버려지듯이 내리더군요.           


8살 언니는 동생과 한국어를 한마디도 못하는 엄마를 이끌다시피 해서 아빠가 쉬고 있다는 근처 낚시터를 찾아갑니다. 공장 인근 낚시터. 네팔, 스리랑카, 필리핀, 우즈베키스탄 등에서 온 외국인 근로자들의 유일한 쉼터, 경품 추첨을 한다는 광고 전단지를 보고 주인공 아빠를 포함해 그날 비번인 사람들은 다 거기 가 있었다, 고 자막이 흐릅니다. 


영상 통화를 할 때 5살 동생의 가장 큰 소원이 자전거 타는 거라는 걸 알게 된 아빠는 마침 2등 경품이 분홍색 자전거라는 사실을 알고 응모를 한 거였죠. 낚시를 좋아하지 않으면서도. 같은 나라에서 온 친구가 자전거보다 1등 세탁기가 더 좋은 거 아니냐는 말에도 무조건 자전거가 제일 좋다고 한 이유입니다. 그건 공장 대표와 낚시터 주인이 (방송국님들과) 합작한 몰래카메라였습니다. 


방송작가의 시나리오 대로 당연히 자전거 경품은 아빠와 가장 친한 동료에게로 돌아갑니다. 아쉬움 진한 표정이지만 주인공 아빠가 하얀 이를 드러내며 축하 박수를 치는 순간, 낚시터 데크 한편에 있던 커다란 세탁기 종이 박스 덮개를 뚫고 두 자매가 불쑥 올라옵니다. 저를 포함 TV속 누구나 예상되었지만 혼자만 전혀 눈치채지 못한 아빠는 순간 얼음이 된 채 큰 눈이 벌겋게 달아오르더니 소리도 내지 못하고 주르륵 눈물을 흘립니다.         

박스 안에 갇힌 듯한 자매가 얼른 박스 바깥으로 나오지 못하는 사이에 십몇 초간 계속. 문제는 저였습니다. 뻔한 연출, 뻔한 장면, 뻔하게 예상되는 상황인데 주인공 아빠를 보면서 그만 터져 버린 겁니다. 정말 갑자기. 러닝머신 위에서. 참아야지 하고 생각할 겨를도 없이. 순간 저도 저한테 놀랐죠. 8개의 러닝 머신 위에는 저 말고 한 칸 건너, 다시 두 칸 건너에 비슷한 시각에 자주 보는 분들이 걷고 달리고 있었거든요.           


어쩔 수 없이 저의 얼굴 상태를 가리려면 속도를 높이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러닝 머신 속도를 7에서 10으로 올렸죠. 띡띡띡띡띡, 아주 급하게. 눈물에 땀이 더 섞이도록. 일부러 더 헉, 헉 호흡을 크게 내뱉으면서. 다행히 장면이 바뀌었습니다. 어둑한 조명에 화면상에서도 눅눅하게 느껴지는 침대 위에 걸터앉은 부부. 직접 구워서 동그랗게 싸가지고 온 커다란 고향식 빵을 아내가 조금 잘라 주인공 아빠입에 넣어줬습니다. 


빵을 오물거리는 커다란 덩치의 아빠는 또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면서 얼굴을 카메라 바깥으로 피했습니다. 이런! 그 모습을 보자니 심장은 터질 듯한데도 저도 따라 다시 눈물이 흘렀습니다. 다행히 몇 분 전보다 땀이 더 많이 흘렀지만, 눈동자에 그 비싼 올리브유를 잔뜩 뿌려놓은 듯 앞이 잘 보이질 않더군요. 윈도 브러시가 고장 나 폭우가 내리는 날 앞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던 언젠가의 기억처럼. 


땀과 섞여 코 양쪽으로 지나쳐 입속으로 짭조름한 눈물이 스며드는 것을 느낄 수 있을 뿐이었습니다. 일부러 눈동자를 자주 깜빡였네요. 앞 거울에 비친 저의 얼굴은 마치 황토방에 오래 있다가 습식 사우나에 방금 들어온 얼굴처럼 변해 있었습니다. 이런 일이 있었다고 밥 먹으면서 아내하고 따님한테 그러니 원래 그러듯 놀려 댑니다. 


그런데 그 눈빛들은 꽤나 오래전부터 같은 편이 된 듯합니다. 눈물 하면 서러운 두 사람 사이에서 그렇게 태어나서 먹고 사느라 시종일관 진지 모드였던 제가 단박에 명랑해지고 쉽게 눈물 흘리는 요즘을 더 사랑해 주는 것 같다는 느낌을 안 받을 수 없었죠. 얼마 전 저녁밥을 먹던 열아홉 따님이 무심코 물었었습니다. 아빠는 얼마동안이나 자기를 안 보고 살 수 있느냐고. 갑자기 물어본 질문에 얼른 답을 하지 못했습니다.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나는 한 달 정도?'라고 따님이 먼저 말하더군요. 뻥인 거 다 압니다. 따님의 마음속에는 이미 계획이 다 있다는 것을. 지금하고 있는 공부 결과가 어느 정도 나오면 그걸 들고, 하고 싶은 공부를 하러 바다를 건너가려고 한다는 것을. 물론 플랜 A가 그렇죠. 그래도 류시화 시인이 말했듯이 플랜 A까지만 인간이 계획하는 것이고, 플랜 B부터는 신이 계획하는 것이라고 해도 이제는 떠나보내는 건 매한가지입니다.    

세상의 모든 부모는 자식을 떠나보내야만 합니다. 반드시 그렇게 해야만 하기도 합니다. 잘 알고 있습니다. 제가 그렇게 떠나온 것처럼. 엊그제. 아내 생일 파티를 해주신다며 낮부터 이른 저녁까지 난생 처음으로 1일 2 카페에 들르고 급기야 국수는 꼭 먹여야 한다며 1일 2 식당까지 순회공연(?)을 해 주신 경호 씨, 순자 씨. 35년 전에 열일곱 먹은 아들을 혼자 타지로 보낸 뒤 쓸쓸한 마음이 지금껏 이어지는 게 분명한가 봅니다. 


당신들의 마음이 이 마음이었을까 하고 요즘 많이 느낍니다. 노랫말을 흥얼거리듯이 '보고 있어도 보고 싶다'라고 자주 이야기하는 순자 씨의 마음을. 요즘 자주 흠흠거리며 먼산 바라보는 경호 씨의 마음을. 그러다 보면 산책을 하면서도 우연히 스치는 모르는 타인들도 꽤나 많이 만나지 못하고 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늘 하게 됩니다.           


어느 해 어느 날. 같이 갔다가 출장 때문에 하루 일찍 먼저 올라와 혼자 들어오던 어둑한 집에서의 (지인네에 맡겨둔 타닥이가 달려 나와 반기는 소리조차 없던) 짧은 하룻밤의 긴 허전함이 또렷하게 계속 기억나는 것처럼. 보고 싶을 때 단박에 볼 수 있는 게 가장 큰 행복이라는 걸 살다 보면 자주 느낍니다. 뻔해서, 다 알고 있어서 더 아린 마음이 사랑인가 봅니다. 


어느 누구 하나 마음은 물론 몸 어디에라도 깊은 사연이 담긴 크고 작은 상처 하나 없는 사람은 없죠. 인종도 성별도 국적도 나이도 관계없이. 사람이 미워질때는 그것만 생각하려 합니다. 우리 남매들도 바깥에서는 어린, 서투른 타인들 중 하나라는. 


원래 그런 사람은 없으니까요. T인척 하는 F여도 그 반대여도. 깡마른 사막에서 버텨야 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은 선인장이 되었더라도 말이죠. 소심해도 친절하고 대범해도 좀 더 친절해야 하는 이유가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말이 어렵다면 눈빛부터 입꼬리라도. 무뚝뚝해도 친절하려는 마음은 단박에 전달되니까요. 친절이 누군가에게는 분명 잊지 못할 위로가 될 수 있을 테니까요. 요즘처럼 먹먹한 더위속에서는 더욱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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