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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담Tea Sep 11. 2024

받은 대로 물려주지 않으려

[오늘도 나이쓰]  54

얼마 전 근처에 새로운 고속도로가 개통이 되었습니다. 오랫동안 부분적으로 이용했었는데, 전 구간이 완전 개통되었네요. 교통 체증이 늘 있는 복잡한 기존 진입로를 통과하지 않고 아직은 한적한 고속도로위로 올라설 수 있어 편안합니다.


능선 사이를 지나 요리조리 달리다 탁 트인 들판을 만납니다. 파란 가을 하늘 위에 둥실 떠있는 새하얀 뭉게구름이 기다란 액자 속 풍경화처럼 보일 때쯤이면 도로 위에 선명하게 그어진 분홍색 라인이 자동차들을 끌어당기듯 하는 휴게소가 하나 나타납니다. '수동휴게소'. 


아마 지명에서 따온 이름일 텐데, 이름에서 느껴지는 것과는 다르게 이 휴게소가 전국에서 최초로 도입된 'AI자동시스템' 무인 조리 휴게소라고 합니다. (라면, 가락국수, 반조리된 레토르) 음식이 조리되는 탁 트인 주방 안쪽에 조리하는 사람이 없더군요. 


다시 목적지를 향해 달려가는 동안, 화장실을 다녀온 가족들이 잠든 사이 '자동'이라는 단어가 계속 맴돌았습니다. 어쩌면 제가 지금껏 살아오고, 살아가는데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단어가 아닐까 하고요. 나의 엄마한테서 아내로 이어진 집밥 말입니다. '얼른'하면 돼(었던 거)고, '뚝딱'하면 차려지는.


엊그제 새벽 4시 몇 분. 알람을 끄려다 보니 문자가 하나 들어와 있었습니다. 여리 엄마였습니다. 아침을 항상 조회시간에 학교 앞 편의점에서 들고 온 '쵸코'빵이나 '쪼꼬'우유라며 희죽거리며 때우는 성격 좋은 여리는 정시만 준비한다고 했던 우리 반 아이중 한 명인데 엄마는 수시도 도전해봤으면 하는 상황인 듯했습니다. 


일어나시면 보시라고 늦은 답변을 문자로 남겼는데, 몇십 초도 지나지 않아 바로 다음 질문이 온 겁니다. 마치 문자 앞에서 답변을 기다렸다는 듯이요. 많이 늦은 답변에 '너무 이른 시각에' 답변을 주어 '감사합니다'라고 천천히, 꼭꼭 눌러 (어쩌면) 몇 번을 고쳐 썼을지도 모르는 글자를 한참 들여다봤습니다. 


스물일곱 해의 학교 생활 동안 처음이었습니다. 학부모와 새벽 대화를 한 게. 물론 제가 새벽에 일어나기 시작한 지 몇 해 되지 않아서 그럴 테지요. 저처럼 새벽을 선물처럼 애용하시는 걸지도 모르지요. 혹여나 제가 모르는 유명한 작가분일지도. 아니면 새벽일을 하시는 경우일지도요. 아니면 갑자기 그날만 잠이 깬 걸 지도요.


아무튼 새벽에 일어나야 할 이유가 각자마다 충분히 많습니다. 그런데 유독 여리 엄마의 문자가 저에게는 자그마한 걱정이 아니라 진한 '불안'으로 읽혔습니다. 분명 제 마음 상태에서 출발한 걸 겁니다. 그(런 상황에서 그런 감정이 올라오는) 마음 태도는 우리 엄마한테서 (물려) 받은 거고요. 쉰 번이 넘는 사계절 내내 '자동' 집밥에 입맛이 들었듯이.    


몇 글자 되지 않는 문자 내용에, 이른 시각에 넝쿨처럼 이어진 깊은 불안감이 새벽을 깨웠을지, 깨어난 새벽에 일어났을지도 모르겠다, 고 확신한 저를 발견하게 된 겁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상황과 기준에서 외부 자극을 판단하게 되는 거니까요. 


부모가 되고 보니 (우리) 엄마는 '자동'이 되는 동안 얼마나 많은 불안으로 잠 못 드는 새벽을 보냈을지 자주 느껴집니다. 잠깐 자다 깨는 날은 그래도 다행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잠 못 들고 혼자 숨죽여 눈물 삼키며 가슴을 쓸어내렸을 시간들은 또 얼마나 많았을지.  


살아온 날보다 적게 남은 지금에도 조금만 찬 바람에도, 먼지에도, 뜨거운 햇살에도 불안과 걱정을 달고 사시는 걸 보면서 위로대신 (속으로) 화가 나는 제가 부끄럽기만 합니다. 부끄러움이 죄송함으로 바뀌는 이 새벽에 곰곰이 생각을 해 봅니다. 


모든 부모는 당신들이 하지 못한 것(들)을 자식에게 바라지요. 당신들보다 더 낫지 않은 삶을 살기를 바라는 부모는 없으니까요. (우리) 엄마의 마음속에는 (어쩔 수 없이) 제게 물려준 것들 중에 (다시 걷어들일 수만 있다면 그렇게라도 하고 싶은) 가장 큰 게 불안을 안고 사는 태도이면 어쩌지 하고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제라도 그런 태도를 지우려고 새벽부터 뚝딱, 얼른 서너 번을 차려내시고도 비가 와도 눈이 날려도 살얼음 위에서도 동네를, 개천변을 돌아 돌아 걷는 것이겠지요. 무릎이 나빠저 예전처럼 한꺼번에 몇 시간을 걷지 못하시는 걸 가장 답답해하시면서도 먼길 돌아 돌아 걷고 또 걷는 것일 겁니다. 


이제 그 마음 잘 알 것 같습니다. '자동'으로 좋게 타고난 것만 남겨서 물려주려면 그렇지 않은 것들을 '수동'으로 받아들이고 잘 다듬는 과정을 (처음으로 부모 세대보다 더 살기 팍팍해질지도 모르는) 남매들에게 고스란히 보여줘야 한다고 알려주시고 계신다는 것을요. 


이제야 제 마음이 그 마음이 조금씩 되어 가고 있습니다. 내 안에 일어나는 습관적 불안을 (당신이 했듯이) 모른 척하지 말고 직면해야 한다는 것을요. 불안을 들여다 보고 불안에 말을 거는 과정을 기록으로 남기면서 '수동'으로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는 것을요. 


외면 대신 직면을 통해 내 안에다 깊고 맑은 긍정의 우물을 만드는 마음 습관. 그 습관을 이제 막 성인이라며 살아 낼 남매들에게 가르쳐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소리가 당신의 한 발 한 발, 저의 한 글자 한 글자 사이에서 은은하게 새어 나옵니다.  


삶을 성실하게 사는 태도를 물려주셨지요. 이제는 그 태도에 당신이 그러지 못하신 명랑성을 가볍게 덧입히는 습관을 길들이는데 남은 시간을 다 쓰도록 할께요. 그래서 오늘도 읽다 걷다 쓰다 다시 걷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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