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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담Tea Sep 24. 2024

잠깐 만끽하고 다시 하면 되죠

[오늘도 나이쓰] 56

활짝 활짝 열어 놓은 교실 창문으로 내다 보이는 가을이 참 좋습니다. 눈이 부시게 일렁이는 파란색. 얇은 카디건 소매 끝을 기분 좋게 간지럽히는 바람. 그 바람을 타고 온몸을 휘감는 따스한 햇살. 가을 아침. 8시 조금 넘었습니다. 이미 온 아이들이 이것저것 꺼내어 놓는 동안 한 명 한 명 등교하기 시작합니다.


우리 교실은 뒤쪽에 있는 중학교와 가장 가까이에 위치해 있거든요. 초록 운동장을 같이 사용하다 보니 아침마다 중학생들의 목소리가 날씨에 관계없이 창을 넘어 교실 가득 퍼집니다. 오늘 같이 맑은 날은 물론 비가 오면 눈이 날리면 일부러 더 뛰어다니기 때문이죠.


오늘은 목소리가 유독 잘 들립니다. 일부러 내다보지는 않았지만 열서너 살 남자아이들 둘이 합창을 합니다. '워~어. 어. 어. 어! 워~어. 어. 어. 어! (뭐라 뭐라 하는데 잘 안 들리는 부분)할께!! (뭐라 뭐라) 할께!!! 워~어. 어. 어. 어! 워~어. 어. 어. 어!'. 아마 좋아하는 팀 응원가 같더군요.


피곤한 얼굴로 앉아 조는 아이, 팔짱을 낀 채 눈을 감고 음악을 듣는 아이, 상체를 활처럼 휘어 눈알이 쏟아지게 빨간 문제집에 얼굴을 들이 댄 아이, 아직 가방을 멘 채 두 손으로 폰을 감싸 쥔 채 버석한 미소를 짓는 아이, 오른팔을 뻗어 베고 자려는 아이 사이사이로 가늘고 높은 명랑한 음색이 파도처럼 찰랑거립니다.


그 파도를 타다 저와 눈이 마주친 몇몇 아이들 표정이 그럽니다. 늦게 온 미리는 '좋을 때다'라는 눈짓으로 피식하고 웃습니다. 하라고 했을 때 마음껏 못했던 4, 5년 전을 아쉬워 하는 걸까요? 다시 놀고 싶은 지금은 일같은 공부를 해야 만 해 아무것도 못하는 것을 서운해 하는 걸까요? 다시 주어 앞으로의 4, 5년 시간을 채울 준비를 하느라 버거워서 그런걸까요?


혼자 궁금해 하다 갑자기 다른 생각으로  갠뒤 처마끝 물방울처럼 툭하고 떨어집니다. 며칠 저와 옆반 담임선생님이 다소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거든요. 수시 접수를 하는 정신없이 바쁜 와중에 어떤 아이의 부탁을 받고 잠깐 도움을 주려고 나서 해결을 해준 후 손에서 손으로 두툼한 외장 하드를 다른 아이의 손을 거쳐 돌려주었습니다. 다른 아이들 접수와 서류 발송을 도와주느라 그리고는 잊었습니다.


며칠 뒤. 외장 하드 주인인 아이가 나중에 보니 모아두었던 중요한 파일이 모두 지워져 있었답니다. 2테라나 되는 데이터가 포맷이 되어 있었다는군요. 기술적으로 누가 어떻게 지웠는지 모르는 상황이랍니다. 복구를 하는 중이라는데 미지수라고 합니다. 비용이  것이라고도 합니다.


학부모는 우리들 손에서 분명 지워졌을 거라고 심정적으로 확신하는 억울한 상황입니다. 전화도 없이 찾아와 불쑥 돈이야기부터 꺼내 놓고 돌아갔답니다. 옆에는 풀칠하는 것조차 이제는 도와줘서는 안되겠네, 하는 자조섞인 목소리들이 들립니다.


하지만 오늘은 가을 하늘을 만끽했습니다. 하늘과 저 사이에 충만한 바람도, 햇살도, 열서너 살 낭랑한 노랫소

리도, 피곤하지만 애쓰는 열아홉의 눈빛들도 같이요. 얼마나 아까워요. 여름내내 이토록 기다리고 기다린 오늘인데. 어서 지나가 버릴 가을인데.   


다시 창문만 한 파란 하늘을 한참 올려다봤습니다. 그리고 조례 시간에 열아홉살 사람들에게 당부했습니다. 점심 먹고 단 5분이라도 건물밖에 나갔다 들어 오라고. 오늘 하늘을, 지금 햇살을, 바람을 살짝이라도 만끽해 보라고. 다시 종례때 물었습니다. 몇몇 아이들을 촉촉한 미소로 머리를 끄덕여 주더군요.


열아홉살 사람들의 눈빛이 그럽니다. 이런 아침은 계속 올텐데, 분명히 매일 올텐데, 지금 당장 할 게 많아 몸도 마음도 바뻐 나중에 나중에, 다 완성되고 나면, 그 끝에 도달하면 그때가서 만끽해도 늦지 않을거라고요. 맞아요. 할게 좀 많아요? 해도 해도 끝이 없는 일같은 공부니까요.


그런데요. 지나면서 보니까 열아홉살 정도때부터 단 5분만이라도 무엇인가에 만끽해 보는 연습. 그 연습이 되지 않으면 넉넉하게 만끽할 수 있는 상황이 되어도 만끽하지 못한다는 것을, 조금 알겠더군요. 마치 어릴 때부터 발이 묶여 성장한 서커스단 코끼리처럼 말이에요.  


먹을 수 있을 때 먹어야 하는 것처럼, 할 수 있을 때 해봐야 하는 것처럼, 만끽할 수 있을때 해야 합니다. 그래야 만끽할 수 없을때도 잘 살아낼 수 있으니까요. 내일 다시 찾아 올 오늘이 또 기대되는 이유입니다. 오늘도 모두 애 많이 쓰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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