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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구름 Sep 24. 2021

최악의 여행

우리의 일상

그날은 날씨가 청명하고 아주 좋은 날이었다. 가을의 시원함이 잠시 움츠러들게 했다면 그날은 늦여름의 더위처럼 쨍하고 햇빛이 강한 날이었다. 여행 가기 더없이 좋은 그런 날씨였다.      


우리는 영주에 있는 부석사에 가기로 했다. 부석사. 이곳은 우리 집에서, 특히 우리 부부에겐 남다른 사연이 있는 장소였다. 물론 우리 부부가 함께 가보지도 않은 상태에서 쌓인 사연이지만.     


그 사연인즉, 나는 관광과를 다니던 대학시절에 과제 때문에 부석사를 처음 방문했다. 조별과제라 같은 수업을 듣던 선배와 친구와 함께 방문했는데 그때 동네 절만 가봤던 나로선 이 부석사에 처음 들어서는 순간부터 매료되었다. 고즈넉한 사찰이 봉황산 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어 숨 가쁜 계단을 모두 올라가면 보이는 경치가 참으로 인상 깊었다. “너무 좋다”를 연발하던 대학생 시절의 나는 그 뒤로는 차가 없어 부석사에 가고 싶어도 갈 일이 없었고, 결혼하고도 계속 가지 못한 채였다.     

 

신혼 때부터 여러 차례 가자고 말을 했는데 매번 일이 생겨 무산됐고, 첫 아이를 낳고 나서도 ‘멀어서’라는 이유로 가보지 못한 곳이었다. 그래서 나는 남편과 싸울 때 유일하게 고정적으로 나오는 레퍼토리가 바로 부석사였다.      


“내가 좋아하는 부석사 가자고 몇 년을 말했는데 안 가고! 자기 가고 싶은 데만 맨날 가잖아!”     


남편이 술, 담배를 하지 않고 일 마치면 재깍재깍 들어오는 사람인지라 고정적인 푸념을 할 만한 게 이것 밖에는 없었다. 그래서 늘 싸우면 하는 말이 그것이었고, 가까운 데 가고 싶다는 데는 다 가준? 남편은 억울했지만 부석사 단어만 나오면 입을 다물어야 했다.     


그래서 우리에게 [부석사는 대체 언제 갈 것인가?]가 난제였는데, 마침내 3살, 7살 아이를 데리고 그 멀고 먼 길을 가기로 다짐한 것이었다.      


최악의 여행이라는 타이틀을 거머쥐기 위한 머피의 법칙은 출발하면서부터 시작됐다.      


아이들 먹을 김밥을 사고 내가 좋아하는 햄버거 브랜드인 M사의 드라이빙 스루를 해서 햄버거 세트를 구매했다. 둘 다 콜라는 커피로 바꿔서 별로 오래 기다리지 않고, 평소처럼 받아 들고 출발했다.      


커피를 마시려고 꺼낸 순간 콸콸콸. 커피가 막 밖으로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운전 기어에 커피가 주르륵 쏟아지자 남편은 사색이 되었고 다급하게 “넘쳐서 그러니까 빨리 마셔!”를 외쳐댔다.     


덕분에 여유롭게 아침에 커피 한잔 하겠다는 낭만은 개뿔, 달리는 차에서 커피를 벌컥벌컥 마셨고, 운전대와 컵 끼워두는 곳이 흥건하게 젖어 물티슈로 급하게 닦았다.     

나는 커피를 계속 마시는데도 자꾸 새는 게 이상해서 보니 불량인지 어쩐지 플라스틱 컵 옆면이 쭉 찢어져 있는 게 아닌가?      


그 불량 컵이 바로 이 최악의 여행의 시발점이었다.

물티슈 응급처치를 하며 우린 서대구IC로 진입했다. 진입하며 보이는 엄청난 차들에 남편이 한 마디를 했다.


“아, 여기 이래서 원래 잘 안 오는데.”


외근이 잦은 남편은 서대구가 워낙 막히고 교통량이 많아 사고가 잘 나는 곳이란 걸 알기에 잘 오지 않는데 햄버거 사고 가장 가까운 IC가 거기라 어쩔 수 없이 이리로 온 것이었다.      


IC에서 고속도로를 타기 위해 대기하는 중이었다. 고속도로를 타려면 두 차선이 한 차선으로 합쳐지는 곳이라 안 그래도 차가 많은 곳이 더 북새통이 되었다.


그렇게 굼벵이 기어가듯 조금씩 진입하는 데 옆 차가 갑자기 막 밀어붙이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분명 그 차 옆에 공간도 꽤 있었고, 직진만 하면 합류되는 차선이라 무리하지 않아도 되는 데도, 우리 뒤차에 비켜주기 싫었던 건지 계속 꾸역꾸역 무리해서 들어오다가 우리 사이드 미러와 접촉했다.     


점잖은 남편은 우리를 타박하는 그 차 운전자의 말에 화가 났고, 가만히 있는 차를 무리해서 들어와서 왜 박냐고 언성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두 사람이 언쟁할 동안 그쪽도 부인으로 보이는 사람이 옆에 타고 있었고, 나도 조수석에 타고 착잡한 심정으로 앉아 있었다.


뒤에 차들은 빵빵 거리고, 끼어들려는 차들은 막 들어오는데 괜히 햄버거를 샀나, 괜히 이 IC를 탔나. 괜히 부석사를 가기로 했나. 후회가 밀려오기 시작했다.      


사고를 낸 차는 잠시 앞으로 빠지더니 5분 정도 비상 깜빡이를 켜고 내리지도 않고 있자 우리도 옆으로 다시 따라붙었다. 그 5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남자는 갑자기 차분한 말투로 사과를 했다. 미안하다고. 그 말에 남편도 이 북새통에 사고 접수를 하는 민폐를 끼칠 수 없어 그냥 보내주었다.      


단조로운 고속도로를 운전하며 남편과 나는 뭔가 심상치 않은 여행인 것 같다는 생각을 했지만 차를 돌리기는 이미 늦어 버려 우리는 목적지를 향해 갔다.      


2시간 반을 쉬지 않고 달려달려 부석사에 도착했다. 주차장은 한산했고, 날은 좋았지만. 일단 너무 더웠다. 땀을 뻘뻘 흘리는 네 명의 식구들은 주차장 앞에 있던 화장실에 갔다가 올라가기로 했고 물, 음료수, 기저귀, 간식 등을 꾸역꾸역 담은 가방을 들고 내렸다.


20개월인 둘째가 또 영역표시를 위한 응가를 했고, 처리하느라 시간이 걸렸다. 그래도 말끔하게 처리하고 올라가려는데 꾹꾹 담아두었던 가방이 넘치면서 첫째 딸의 물통이 바닥에 팍! 하고 떨어졌다.  

    

콰직.

얼마 전에 산, 요즘 최애 하는 어피치 캐릭터의 물통 뚜껑이 아주 박살이 났다. 그것도 아이의 눈앞에서.   

  

나는 당황하지 않은 척하며 아이한테 엄마가 오늘 다시 주문해줄게. 했다.

아이는 속상해했지만, 주문해야 택배가 오고 그러려면 기다려야 한다는 걸 아는 7세라 그런지 체념하듯 터덜터덜 올라갔다.      


부석사 매표소에서 표를 끊고 이제 입구에 올라가려는데 계속 계속 보이는 산길. 오르막.

둘째 아이는 멋모르고 날뛰고, 첫째는 더워서 가기 싫다며 보이콧을 하기 시작했다.   

   

아직 사찰 입구도 못 갔는데!!!

     

휴. 왜 나는 산 중턱에 있는 부석사에 가려고 했을까? 아직 이 아이들이 올만한 사찰이 아니란 걸 내가 간과했다.


그리고 출발할 때부터 남편이 아이에게 오늘은 엄마를 위한 여행이야.라고 강조해서인지 처음부터 가고 싶지 않아 했던 게 그 결정적 순간에 터진 것이다. 지난 주만 해도 놀 거리 가득한 놀이공원에 다녀왔는데 엄마가 좋아하는 곳이라고 하지, 오르막길만 나오지. 물통은 깨졌지. 아이는 가기 싫다고 징징댔다.   

   

남편도 그때 이 계속되는 머피의 법칙들에 완전히 나가떨어져 버렸다.     

 

“아오. 뭐고 이게. 못 가겠다.”

“하아”     


나는 한숨을 내쉬었고, 그렇게 오고 싶었던 부석사인데 입구에서 돌아가자니 속이 뒤집어질 것 같았다. 아쉬워서 나 혼자라도 갔다 올 테니 애 둘 보고 있을래 하니 한창 엄마 찾는 둘째를 데려가란다. 하아.     


그때를 생각하니 다시 또 한숨이 난다. ㅋㅋ

어쨌거나 멋모르는 망아지처럼 날뛰는 둘째는 내려오는 어른들의 귀여움을 잔뜩 받으며 기분이 좋았지만, 우리는 최악의 여행 앞에서 옴짝달싹 할 수 없을 만큼 지쳐있었다.  

    

‘아, 저기까지만 가면 될 것 갚은데.’     


오르막길이라 대체 어디까지 가야 입구인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입구가 어디쯤인지를 보기 위해 혼자 조금 올라가 보았고, 생각보다 입구가 그리 멀지 않았다.


그래. 여기까지 몇 시간을 왔는데 돌아갈 순 없다 싶었다. 나는 둘째를 안아 들고 천천히 산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무량수전까진 못 올라가도 밑에 만이라도, 올려다보기만이라도 하자 싶어 쉬엄쉬엄 올라갔다.      


우리는 마침내 부석사의 108계단이 시작되는 입구에 다다랐다. 둘째를 안고 108계단을 어떻게 가지? 막막해하고 있는데 뒤에서 첫째 딸과 남편이 꾸역꾸역 올라오는 게 보였다.


나는 드디어 웃음 지었고, 계단 앞에서 아이에게 가위바위보 해서 올라가기를 제안했다. 결과는 대성공.     


남편은 짐을, 나는 아이들과 가위 바위 보를 하며 마침내 108계단을 다 올라왔다. 물론 108계단이 108 번뇌를 생각하며 만든 계단이고, 어쩌고 저쩌고 하는 고차원적 감상 따위 하나도 할 시간 없이 올라왔지만.      


옛날처럼 홀연히 나 혼자 감상을 만끽할 수 있는 솔로 시절이 아니구나를 맘속으로 개탄하며 무사히 올라온 것에 감사를 했다.      


다행히 계단 효과 덕분에 재미있는 것이 많다고 생각한 건지 첫째의 기분은 완전히 다 풀렸고, 아이들은 부석사 무량수전 앞에서, 국보인 석등 앞에서도 그저 깔깔거리며 놀기 바빴다.      


나는 무량수전이라는 내게 뜻깊은 이름인 그곳을 잠시나마 돌아보고, 배흘림기둥에 기대 서보기도 했다. 굵은 배가 열린 배나무 앞 그늘에서 네 식구와 휴식을 취하며 잠시 풍경에 젖어 보기도 했다. 산에서 내려오는 맑은 물에 손을 씻어보기도 하고 곤충도 보고, 장난을 치며 좋은 시간을 보냈다.


그래. 그래도 이만하면 됐다. 싶었다.      

긴 시간을 달려 짧지만 알찬 시간들을 보내고 저마다의 재미를 찾아 놀면서 내려왔다.     

 

“자, 이제 돌아가는 것만 잘 돌아가면 되겠다.”     


그렇게 말하며 나는 조수석에 앉아 콜라를 열었고, 언제 어디서 흔들린 지 모를 콜라는 울컥울컥 콜라를 밖으로 쏟아냈다. 하하.


다시 또 운전대 기어가 젖자 남편은 비닐봉지를 가리키며 “아! 여기다 쏟지 차라리!” 하며 화를 냈고, 나는 이 최악의 여행이 부부싸움으로 종지부를 찍지 않기 위해 그냥 침묵했다.      


그래. 최악의 여행은 끝나지 않은 것이었다. 내가 방심했다.     


부석사. 너무너무 좋은 곳이지만 향후 5년간은 갈 일이 없을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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