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쿠시마 핵 오염수 방류라는 전대미문의 오염된 경제논리에서, 한 병사의 어처구니없는 죽음 앞에 보이는 어느 높으신 분들의 오염된 정치에서, 선생님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오염된 교육에서, 홍범도장군 흉상 철거 문제를 다루는 오염된 역사를 들으며,
아, 우리는 “오염된 세상”에 살고 있구나 하고 생각한다.
사실 우리의 많은 문제는 “문화적” 문제들이 아니던가?
정신의 문제이고, 의식의 문제이며, 공동체의 문제이자 삶의 문제 아닌가?
만일 문화란 “한 집단의 비유전적 기억의 총체”라는 로트만의 견해에 동의한다면, 문화는 언제나 역사와 연관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기억하라! “오늘은 정치이지만, 내일이면 역사가 된다는 사실을! 그리고 역사의 기억이 모이면 문화가 된다는 사실을!”
범죄 심리학에 “깨진 유리창 이론”이 있다. 깨진 유리창을 방치하면 그 지점을 중심으로 범죄와 무질서가 확산된다는 이론이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깨진 유리창”을 그대로 두면 더욱 추해질 것은 분명하다. 이 추한 세상을 어떻게 할 것인가? 옛날 옛적, 교육과 종교가 치료제라고 생각했던 전설 같던 시대도 있었다. 하지만 그 작동 기제를 상실한 지 오래되어 보인다.
과연 세상을 치유할 해독제는 없는가?
있다, 그것은 “문화”다.
왜냐하면 우리가 문화에 대해 생각한다는 것은, 우리가 아름다움을 향해 움직인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문화라고 쓰고 무엇이라 읽는가?
슈펭글러의 표현처럼 “문화란 들꽃처럼 목적 없이 자라나는 등급이 가장 높은 생명체”라면,
우리의 깨진 유리 조각들을 문화라는 생명력으로 청소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과연 우린 문화라고 쓰고 무엇이라 읽는가?
주지하다시피 문화(culture)의 어원은 “경작하다”라는 농업(agriculture)에서 시작되었다.
그리하여 문화는 오늘날 “자기 개발” 혹은 “교양”으로 개인적인 의미로 사용한다.
우리는 어떤가?
서구화의 영향, 일제 강점기와 전쟁 등을 거치면서 질곡의 20세기를 살아온 우리에게 문화란 자유로운 시간을 활용하는 “여가”의 개념으로 변형 수용되었고, 문화는 고단한 삶을 위한 “쉼”, 또는 “놀이”라는 측면이 강조되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문화라 쓰고 “휴식”이라 읽는다.
하지만 세상에는 또 다른 “문화” 개념도 존재한다. 그것은 러시아 문화다.
러시아 문화를 알아야 할 이유는 분명하지 않은가? 그것은 우선, 우리의 “교양”을 향상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고, 다음으로는 곧 다시 만날 “이웃”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는 시력을 회복할 것이기 때문이다.
흥미롭게도 러시아는 문화라는 단어의 어원을 서구처럼 ‘경작 (colere-cultura)’이 아니라 ‘숭배’ (cultus-cultura)라는 개념에서 받아들인다. [1]문화를 이해하는 방점이 ‘숭배’에 찍히게 될 때 러시아에서 문화는 개인적이기보다 집단적이며, 세속적이기보다 종교적인 의미를 지니게 된다.
그리하여 러시아는 문화라 쓰고 “숭배”라 읽는다.
경작과 숭배사이 - 공감!
문화가 숭배에 닿아 있을 때 가장 요구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공감”이라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예배의식에서 중요한 것은 신과 나, 우리와의 “공감대”가 형성되어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이 공감이야 말로 러시아 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공감되지 않으면 쉽게 마음을 열지 않는 러시아(인)의 특징을 보여준다.
아, 이제야 러시아를 국빈 방문하면 ‘공연장’으로 안내하던 그들의 의전 행사를 이해할 수 있다.
우리에겐 낯선 이 행위는 사회주의 잔재로 이해되어 왔지만 실제로는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닌다. [2]
이들은 함께 관람하는 공연을 통해 그 아름다움을 “공감”한 후 에야 친구가 된다고 믿는다.
다시 말해 공감의 여부가 “적과 동지”의 구분이 된다는 사실이다.
“공감”으로 문화를 받아들이는 러시아와, “휴식”으로 문화를 받아들이는 우리의 이 차이는 생각보다 간극이 넓다. 물론 이는 우열의 문제가 아닌 이해의 문제이다. 양국의 관계는 이러한 문화적 이해와 인정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정통과 이단 사이 – 참칭!
문화가 “신의 미션”이라는 종교적 숭배 의식은 러시아 역사에 깊이 각인되어 있다.
그중 “참칭”의 역사는 러시아 문화의 중요한 특징이다.
“가짜 드미트리 1세가 출현한 이래 참칭왕은 러시아의 만성적 질병이 되었다”는 역사가 클류체프스키의 지적처럼 100명이 넘는 참칭자들은 각자 “신에 의해 간택된, 오시는 구세주”로서 등장한다.
이들은 늘 “정통과 이단”이라는 그림자 관계 속에서 “메시아적” 깃발을 들어 올린다.
이러한 정통과 이단의 참칭 속에서 도스토예프스키가 밝힌 러시아 영혼의 모순과 이율 배반성을 느낄 수 있다. 왜냐하면 이단은 정통의 그림자이고, 정통은 이단의 원 질료가 아니던가?
문화적 참칭의 한 예를 문학 속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러시아는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다....
러시아는 단지 믿을 수 있을 뿐이다.” (츄체프)
19세기 중반의 시인 츄체프의 이 시는 우리를 혼란스럽게 한다.
이성의 시대에 어찌 “이해”가 아닌 “믿음”을 강요하는가?
시인은 유럽 문화를 구원할 노아의 방주로서 러시아를 바라보았으며 이 시는 러시아의 메시아적 역할에 대한 슬로건으로 도입된다. 이 시는 특히 푸틴이 외국정상을 만나면 즐겨 암송하는 구절이기도 하다.
2007년 푸틴은 “러시아를 잘 알고 싶다”는 프랑스 사르코지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이 시를 읽어 주었다.
그러므로 참칭의 문화적 코드는 이러하다.
황제는 신으로부터 권력을 부여받아 “오시는 구세주”이며, 민중은 그가 세상을 구원할 것이라는 기다림의 의식이다. 이 문화는 정통의 러시아가 이단의 세상을 구원해야 할 임무를 가지게 된다는 메시아적 의미를 포함한다. 만일 이러한 러시아의 참칭성을 인정하지 않으면 대화는 단절된다.
하지만 러시아의 참칭을 인정하면 그들은 가슴을 치고, 자신의 후진성을 고백하며 진정한 친구로 받아들인다.
아, 이제야 지구상에서 “문화”라는 단어를 가장 많이 쓰는 지도자가 푸틴이라는 이유를 알 것 같다. (다른 지도자들의 입에서 문화라는 단어를 듣는다는 것은 참으로 어색한 일이 되었다!)
그러므로 러시아에서 문화는 “민주주의, 법, 교육, 식량”등 모든 것을 대체해 온 강력한 단어이다.
이것이 수많은 모순 속에서도 푸틴의 지지율을 고공 행진케 하는 이유이다.
문제는 문화야, 바보야!
오늘도 폐수처럼 쏟아져 나오는 우리의 오염된 정치들, 오염된 언어들, 오염된 인간들이 깨진 유리창 파편처럼 우리 삶을 어지럽힌다. 문화로 밖에는 처리할 수 없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사람들은 묻는다.
그래서 대체 “문화를 알면 무엇이 남는가?”
이 질문에 우린 이렇게 답해야 한다. "우리는 변화된 사람들로 남아 있을 겁니다."
이것이 문화의 존재 이유이며, 이것은 정치나, 경제의 영역이 아니라, 우리 삶의 영역이라고 말할 것이다.
대체 왜 ‘다른’ 러시아 문화를 알아야 하느냐고 꾸짖는다면 이렇게 대답하리라. “문제는 문화야, 바보야!”
그럼에도 또 문화가 무슨 이익이 된다고, “어찌 저렇게 목청껏 노래하느냐?”라고 완고하게 묻는다면 다시금 푸쉬킨의 시로 대답한다.
“오염된 세상 걱정 위해서가 아니라,
탐욕과 다툼을 위해서가 아니라,
창조적 영감을 위해서,
달콤한 소리와 기도를 위해서” 우리는 태어났기 때문이라고 외칠 것이다.
아, ‘나의 모국어는 침묵’이 아니지 않은가!
* 사실 러시아에 관한 칼럼은 1년정도 예정으로 모 언론에 연재하던 중이었다. 그런데 이 글이 전달된 직후 "오염"에 대한 부분을 삭제해 달라는 주문이있었고, 필자는 거부하면서 연재를 중단했다. 하여, 블로그와 브런치를 시작했음을 알려드린다.
[1] 물론 서구에서도 중세에 “문화-숭배” 주장이 대두된 적도 있다. 하지만 현대적 의미의 문화 개념의 확립은 르네상스 이후 인본주의사상의 영향을 받은 “문화-경작”이론이 주도적이다.
[2] 러시아 영향을 받은 북한을 비롯한 사회주의권 국가의 대부분 의전행사를 생각해 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