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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한 역무원과 쿨한 승객

by 코와붕가

지하철역에서 근무하다 보면 별별 사람들을 만난다.


분명 방금 전에도 길을 물었는데 다시 돌아와 묻는 승객,

주변 아파트 시세를 묻는 승객,

(저는 공인중개사 준비 안 합니다...)

커다란 진돗개를 끌고 와서 같이 타려는 승객,

술에 취한 상태로 나라를 걱정하며 고래고래 떠드는 애국 취객,

개찰구 앞에서 어찌나 헤어지기 싫어 과감한 애정행각을 벌이는 연인들,

승강장 구석에서 토를 하면서 "역무원 양반, 등좀 두들겨 줘."라고 부탁하는 승객까지.

각양각색 모습을 볼 수 있는 곳이 땅속 지하철 풍경이다.


열차지연이 발생하다.


승객이 가장 많이 붐비는 출근시간에 열차고장으로 인해 지연되는 일이 발생됐다.

벌써 승강장에는 발 디딜 틈 없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행성안내게시기에는 '열차 지연'을 알리는 문구가 표시됐다.

관제에서는 안내방송이 끊임없이 나왔다.


이런 상황이 발생되면 역무원은 승객으로부터 표적의 대상이 된다.

역무실에 찾아와서 항의하는 승객을 상대하랴, 문의 전화받으랴, 여러 민원 공격을 받아내야 한다.


그때 한 승객이 다급하게 역무실로 달려왔다. 숨이 턱까지 차올라 마치 마라톤 완주를 한 모습 같았다.


"저기요, 강남 가려면 어떻게 가야 해요?"


내 머릿속에는 지하철 어플만큼 빠르게 경로 탐색기가 돌아갔다.

"여기서 5호선 타시고 영등포구청에서 2호선 갈아타시고, 사당 방면으로 가시면 됩니다.

혹시 빠른 길 원하세요? 그럼 9호선을 추천드리는데-"


사실, 설명이 좀 길어졌다.

나는 직업병처럼 '플러스알파'정보를 추가로 알려준다.

가까운 환승 위치, 출구 정보, 심지어 화장실까지.

내 안의 '프로 역무원 본능'이 끓어오르는 순간이다.


대부분의 승객들은 내 말을 듣는 척하면서 눈빛이 점점 흐려진다.

"아.. 네.. 네..(차라리 어플을 이용할 걸)"이런 반응이 일상이다.


그런데 이 승객은 달랐다.

숨을 고르면서 내 설명을 다 들었다.

그러고 나서 엄지 손가락을 탁! 치켜세우며 말했다.


"완벽해요. 제가 원하던 겁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는 뒤도 안 돌아보고 모델 워킹하듯 쿨하게 걸어갔다.


나는 의심이 들었다.

"뭐지? 내가 설명한 걸 한 번에 이해했다고?

이 사람 혹시... 전직 역무원 아니야? 아니면 *미스터리 쇼퍼?!"

* 서비스 품질을 평가하기 위해 위장한 사람


한편으로 별것 아닌데도 기분이 좋았다.

친절을 제공한 사람이 기분이 좋은 건 당연하다.

거기에 친절을 받아주는 방식이 이렇게 쿨하면 두 배로 행복해진다.


사실 역무원에게는 '진상 방어력'이 필요하다.

오래 근무하다 보면 얼굴만 봐도 어느 정도 '진상력'을 알 수 있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반복되는 질문에 시달리다 보면 목소리는 점점 건조해지고 표정은 굳게 된다.

그런데 승객으로부터 "감사합니다."라는 반응을 만나면, 마음속에서 작은 파티가 열린다.

"오늘 근무 버틸 만 한데?"


나는 생각했다.

나도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을 때,

쿨하게 "감사합니다."로 반응하자고 말이다.


우리는 서로의 친절을 '무겁게'만들지 않아도 된다.

때론 이렇게 가볍게 주고받는 쿨한 한마디가 지하철 한 칸의 피곤한 공기를 확 풀어준다.


오늘도 코와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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