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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나연 Jul 15. 2021

저주를 푸는 이야기, 8부 죠죠리온에 대하여

아라키 히로히코, 죠죠의 기묘한 모험 (1987년~현재) 최신간 리뷰

<죠죠의 기묘한 모험> 8부 <죠죠리온>을 마참내 최신간(108화)까지 읽은 기념으로 그동안 내 안에 쌓인 덕톡을 해소해보고자 두서 없이 포스팅을 작성해본다. 6부 엔딩 스포일러가 포함될 예정이므로 아직 죠죠 정주행을 끝마치지 못한 분들은 주의하시길 바란다.


나는 2019년쯤에 <죠죠의 기묘한 모험>을 처음 접했다. 계기는 대단하지 않았다. 킬링타임용으로 볼만한 컨텐츠를 찾아다니던 중에 친구에게 죠죠를 추천받았기 때문이고, 그동안 '로드롤러다--!' 라거나 '팔이 얼었어!' 같은 밈짤을 많이 접해온 터라 그 원출처가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미리 밝혀두지만 나는 혈기왕성하고 강직한 질서선 주인공을 좋아하며 풍부한 여성서사에 환장한다. 따라서 처음 논-죠죠러의 입장에서 1부/2부를 시청했을 때 감상타래는 온통 욕으로 가득했다. 질서선 주인공 죠나단에게 이입하며 응원했지만 그 이상으로 주인공을 괴롭히는 디오가 싫었고, 쉴새없이 여성캐릭터를 성희롱하는 퀴퀴하고 올드한 전개가 싫었다. 당시 타래에 썼던 총평은 이랬다. "정말 X같은 만화인데 전무후무한 개성작임은 틀림 없다." 넷플릭스에 후속작들이 업로드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대로 잊혀지는듯 했다.


그러다 작년 12월 경에 무슨 바람이 불어서인지 볼거리를 찾아다니다가 VPN까지 써가면서 미국IP로 우회하여 넷플릭스 영어자막으로 3부를 시청했다. 몇 달에 걸쳐 아주 천천히 꾸역꾸역 감상을 해나갔다. 처음엔 분명 심심풀이 땅콩으로 보기 시작하던 것이 차차 정이 들어서 3부를 다 보고 나서는 크런치롤 사이트를 통해 4부 정주행을 시작했다. 올해 3월, 한국 넷플릭스에 4부까지 한국어자막과 함께 정식 수입이 되었다. 덕분에 4부를 시청하는 속도가 확 붙었다. 4부를 다 보고 나서는 아직 한국에 들어오지 않은 5부를 영어자막으로 감상했고. 5부를 다 보자마자 리디북스에서 6부를 질렀다. 6부 마지막 권을 덮고 곧장 7부를 결제하면서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죠죠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말 재밌는 만화라는 사실을, 나는 돌이킬 수 없이 죠며들었다는 사실을!


7부 읽는 내내 이런 느낌이었다

충격과 공포의 6부 엔딩 이후 7부로 넘어가니 별안간 찾아온 다그닥다그닥 우마머스마는 영 정을 붙이기가 어려웠다. 7부를 중간에 읽다 말고 8부를 찾아보기 시작한 것은 6부 엔딩을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고 단언한다. 앞서 말했지만 나는 질서선 캐릭터를 정말 좋아한다. 2019년 처음 죠죠를 접했을 때부터 8부를 볼 때까지 내 최애캐는 한결같이 1부 주인공 죠나단 죠스타였다. 수많은 풍파와 고통 속에서 한없이 올곧고 굳센 선조님만이 나를 위로해줄 수 있었는데... 대체... 어쩌다가 콘나 꼬라지니 났탄 말인가?


콘나 꼬라지니 나버렸다

나는 새로 치인 장르에 온고잉(실시간) 연재물이 존재한다면 무조건 거기까지 봐야 하는 습성이 있다. 그리고 죠죠 프랜차이즈의 가장 큰 특징은 무엇인가. 40년이 넘도록 온고잉 연재가 진행 중인 작품이라는 거 아니겠는가. 참새가 방앗간을 지나칠 수 없듯이, 나 역시 죠죠의 온고잉 연재작을 들춰보지 않을 수 없었다.


난생 처음 일본어 원서 E북을 구매하여 8부를 읽기 시작하고 나서, 정말 놀랍게도 다른 놈도 아닌 8부 죠죠한테 완전히 치여버리고 말았다. 아니 진짜, 스스로도 이해할 수가 없다. 8부 죠죠는 절대 질서선이라고 볼 수 없는 캐릭터다. 지금까지 좋아했던 캐릭터 중에 이녀석과 비슷한 유형은 없었다. 그치만 감겨버리고 말았다! 덕통사고는 논리로 이해하는 게 불가능한 걸지도 모르겠다. 8부에 빠져든 속도는 너무나도 빨라서 입덕부정기 따위 거치지도 않고 어느새 그냥 아묻따 죠스케를 "우리 애"라고 칭하고 있더라. 죠죠 보기 시작하면서 이런 적이 없었는데 진짜 어이없음. 내가 이런 쉬운 오타꾸였나? 책임져, 죠스케! 내 인생 책임지라고! (죠스케: オレェ~?)


8부에 대해 1도 모르는 분들께 최대한 스포일러가 되지 않는 선에서 작품 소개를 해볼까. <죠죠리온>은... 하 이걸 뭐라고 설명해야ㅋㅋㅋ 정말 한 문장으로 정리하기 어려운 만화다. 오죽하면 연재 10주년이 된 지금까지도 "What the hell is Jojolion about?(아니 그래서 죠죠리온 대체 뭐하는 만화임?)"이라는 질문글이 레딧과 야후에 심심찮게 올라올 정도다. 정말 다행히도 첫화와 최신간에서 아라키 본인이 한 줄 요약을 해놓았다. 그런데 잘 보면, 이건 죠죠 프랜차이즈 전체를 관통하는 설명이기도 하다.


"이것은 『저주』를 푸는 이야기다."

<죠죠의 기묘한 모험>은 죠스타 가문 내지는 혈통에 내려진 DIO의 저주에 대항하는 인간의 투쟁을 그린 만화다. 애초에 시리즈 제목부터가 작품의 정수를 모두 담고 있다. (1)주인공의 이름 "죠죠" (2)작풍, 설정, 연출의 핵심 콘셉트 "기묘함" (3)"모험"의 사전적 정의: 위험을 무릅쓰고 어떠한 일을 함. 또는 그 일. 


한데 7부부터 그 양상이 약간 달라진다. <죠죠의 기묘한 모험>이라는 시리즈 제목부터 대담하게 버렸다. 연재 당시 7부의 제목은 <스틸 볼 런>이고 현재 연재 중인 8부의 제목은 <죠죠리온>이다. 6부의 엔딩을 생각하면 당연하다. 주인공 죠린이 비인간 DIO의 저주에 대항하는 비범한 인간의 의지, 죠스타 가의 의지를 조연 엠포리오 소년에게 넘겨주었고, 결과적으로 투쟁의 횃불을 이어받은 평범한 인간 엠포리오가 적을 쓰러트림으로써 완전히 새로운 세계가 시작되었으니 말이다. 아라키는 죠죠 세계관을 단순히 죠죠라는 주인공 한 사람, 죠스타라는 주인공 가문 하나에만 국한하지 않고 보다 넓게 뻗어내기로 결정한 것이다.


<스틸 볼 런>이라는 제목은 작품의 핵심 소재인 '마상 레이스 대회' 그리고 '회전하는 철구'를 중의적으로 의미한다는 것을 알기 쉽다. 그런데 <죠죠리온>은 어떠한가. 죠죠... 는 당연한 건데 거기에 '리온' 같은 걸 붙여서 얼렁뚱땅 신조어를 만들다니 어쩌자는 건가. <죠죠리온> 2권에 수록된 작가의 말에 따르면 [죠죠리온의 '리온'은 축복받는 것/복음/기념의 표시 등을 뜻하는 고어로, 죠죠와의 합성어를 통해 주인공 죠스케가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을 나타내고 싶었다]고 한다. 아니 솔직히 작가의 말을 읽어 봐도 주인공 이름이 죠스케라는 것 말고는 도대체 뭔 내용의 만화인지 알 길이 없다. 더군다나 4부 주인공의 이름과 8부 주인공의 이름이 동일하기 때문에(동명이인이다) 혼란이 가중될 뿐이다. 여태까지는 제목에서 작품의 주제나 소재, 방향성을 즉각적으로 알아볼 수 있었다면 8부는 제목에서부터 알쏭달쏭 난해함을 의도했다고 봐도 될 것 같다. 제목이 이러하듯, <죠죠리온>이 다른 부들과는 차별되게 갖고 있는 장르적 특색은 단연 미스터리·서스펜스가 대표적이다. 만화를 여는 첫 페이지에서부터 참신한 질문을 던진다. 


모자만 쓴 채 벌거벗은 남자가 땅 속에 파묻혀 있다. 
이 남자의 정체는 무엇이며, 왜 그곳에 있었던 걸까? 


8부 죠죠는 놀랍게도 기억상실증을 앓고 있으며, 자연스레 주인공의 진짜 정체를 추적하는 것이 초반의 주된 목표가 된다. 하지만 주인공의 신분 찾기가 만화의 주된 주제라고 하긴 어렵다. 그건 지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그 이상으로 또 다른 수수께끼들이 꼬리의 꼬리를 물고 줄줄이 소시지처럼 이어진다는 점이 중요하다. 자꾸만 새로운 의문이 생겨나고, 그 해답을 알아내기 위해 계속해서 마약처럼 다음 편을 펼치게 된다.


<죠죠의 기묘한 모험> 프랜차이즈가 그동안 시간적으로나(120년) 공간적으로나(영국에서 중동을 지나 일본까지) 방대한 서사를 쌓아두었기 때문에 Clean Slate로 산뜻하게 새 출발한 뒤에도 기존의 팬들은 "내가 좋아했던 캐릭터들이 새로운 신천지에서 어떤 모습으로 비춰질 것인가"라고 궁금해하기 마련이다. 아라키는 팬들의 요구에 응답하듯이 자가복제, 셀프오마쥬를 시기적절하게 응용하여 <죠죠리온>을 무척 흥미롭게 풀어나갔다. 아라키는 신규 독자가 부담없이 7·8부를 통해 새로 유입할 수 있도록 터를 닦아놓고 싶었다고 했지만 <스틸 볼 런>은 몰라도 <죠죠리온>만큼은 진정 100% 즐기려면 1~7부를 모두 읽어야 한다. 최소한 4부는 반드시 미리 읽고 오자.


앞서 언급한대로 8부 주인공의 이름은 4부 주인공과 동일한 히가시카타 죠스케다. (한자 한 글자가 다르지만 읽는 법은 같다.) 작중 무대 역시 모리오쵸로 동일하다. 조연들의 이름도 이전 작들에서 등장한 성씨를 재차 붙여준 경우가 많다. 단순히 이름만 재활용한 거라면 덕후가 이렇게 죽어나갈리 없다... 내가 보장한다. 공식이 주는 캐릭터 매쉬업의 참맛을 느껴보도록 해라. 상상해보라고! 일순 후의 캐릭터들이 일순 전의 캐릭터들의 이름/외모를 지니고 나와서 그들의 정신을 일부 계승하는 행동을 보인다? #오마이갓 #덕후살려

이것은 「저주」를 푸는 이야기다. 혹자는 「저주」를 머나먼 조상이 저지른 죄업으로부터 내려져오는 「부정함」이라 설명한다. 혹은 에도 정벌에서부터 이어져 내려온 「원한」이라고 설명하는 사람도 있다. 또 다른 해석으로는 태초에 인류가 태어났을 무렵 만사가 「백」과 「흑」으로 명확하게 구분 가능했을 적에 그 사이에서 생겨난 「마찰」이라고 설명하는 사람도 있다. 어느 쪽이든 간에 「저주」는 풀어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저주」에 져버리고 마는 것이다...

8부 <죠죠리온>은 저주를 푸는 이야기다. 누가 어떤 저주를 푼다는 걸까. 여기서 일순 전/후의 차이가 확실하게 드러난다. 일순 전의 <죠죠>는 죠죠에게 내려진 저주를 죠죠가 풀어내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일순 후의 <죠죠>는 단순히 주인공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따라서 저주의 대상 범위 역시 죠죠라는 주인공 한 명에 국한되지 않고 보다 넓게 적용된다.


8부 초반 무연고자 주인공을 거두어 후견인으로 나선 것은 모리오쵸에서 대대로 과일 장수를 하고 있는 히가시카타 가문이었다. 작품에서 표면적으로 가장 두드러지게 다루어지는 저주는 이 히가시카타 가문의 저주다. 히가시카타 가문의 장남들은 11세에 다다르면 온몸이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 죽음에 이른다고 한다. 히가시카타 가문의 저주는 작품 후반부에 이르러 해소 국면에 접어드는데, 이때 저주를 푸는 결정적 주체가 주인공 죠스케가 아닌 히가시카타 가문의 일원이라는 점이 무척 인상 깊었다. <죠죠리온>은 결코 주인공 죠스케만의 이야기가 아닌 것이다.


그렇다고 주인공 죠스케가 저주를 푸는 데에 있어 아무것도 안 하는 나가리 신세냐, 그런 건 절대 아니다. 위에서 인용한 나레이션 3번 해석에 따르면 저주란 옳고 그름이 명백하게 구분되던 시절에 선과 악이 치열하게 대결을 벌인 끝에 탄생한 결과물이다. 흑과 백이 맹렬하게 마찰한 끝에 탄생한 회색 빛깔이 저주라는 것이다. 마침 또 죠스케가 첫 스탠드 대결에서 상대 스탠드 유저를 쓰러트린 결정적인 한 수가 다름 아니라 바닥의 마찰을 없앤다는 발상에서 기인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마찰=저주를 풀어나가는 <죠죠리온>이라는 이야기에서 죠스케가 가지는 위상을 상징적으로도 알 수 있다.


드라마 평론가 나리마 레이치(成馬零一)는 <죠죠리온> 서평에서 본 작품을 <죠죠> 사상 최대의 문제작으로 일컬으며 저주에 대한 재밌는 풀이를 남겼다. 히가시카타 가의 바위 질병 외에도 세상에는 수많은 불치병이 있다. <죠죠리온>의 최대 쟁점은 어떤 불치병이든 등가교환이라는 법칙 하에 치료해주는 만병통치약의 존재다. 나리마 레이치는 이 만병통치약의 기적과도 같은 효능에 따르는 필연적 대가를 저주라고 해석하며 동시에 저주를 낳는 기적을 원하는 사람의 마음, 즉 의료를 필두로 하는 문명 자체를 저주라고도 볼 수 있다고 정리했다. 거기에 한 발 더 나아가 이러한 기적과 저주의 연쇄를 작품의 주된 적(메인 빌런)이라고 평했다. 어유, 정말 눈이 번쩍 뜨이는 듯했다. 아라키의 만화 작법이 최종보스 1인 체제에 안주하지 않고 진화하고 있는 만큼 우리 독자의 시각도 넓혀야 하는 게 아닐까 싶었다.


<죠죠리온>에서 사람을 살리는 기적과 사람을 죽이는 저주는 등가교환의 법칙에 따라 표리일체다. 흑백이 마찰한 끝에 탄생한 회색이 저주인 거라고 앞서 해석했다. 나는 <죠죠리온>의 색채라고 한다면 회색이 떠오른다. 앞선 부들은 선악을 뚜렷하게 구분하며 선악의 고전적 대립 국면을 화려하게 그려내고 있다. 그에 비하면 아군 적군 피아 구분 없이 모호하고 난해한 8부의 회색 빛깔이 밋밋하고 심심하게만 느껴질 수도 있겠다. 8부에 이르러 아라키는 처음 시작했던 1부 <죠죠>와는 완전히 다른 작품을 만들어내고 있다. 독자들이 끊임없이 의심하고 추리하도록 아라키는 독려하고 있다. 우리도 그에 발맞춰 <죠죠리온>의 회색을 만나볼 필요가 있다. 주인공과 같은 지붕 아래 살고 있는 히가시카타 가문이라고 해서 마냥 주인공의 편이 되어준다는 보장은 없다. 선한 의도를 가진 사람이라고 해서 반드시 선한 행동만을 취하는 것도 아니다. 현실과 꼭 닮은 잿빛 혼돈에 <죠죠>만의 기묘한 분위기와 연출법이 합쳐지니 엄청난 시너지 효과가 생겨난다. 질서선을 사랑하는 나조차도 눈 깜짝할 새에 휘감아버린 <죠죠리온>의 카오틱 챠밍, 알만하지 않은가.

아 이것 말고도 정말 하고 싶은 말은 많다. <죠죠리온>에서 특출나게 돋보이는 모계서사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싶고, 전작들의 오마쥬 요소들을 하나하나 세세하게 짚고가고 싶다. 역대 죠죠들과 주인공 죠스케를 비교하는 캐릭터성 고찰도 넘나 탐나는 맛도리 주제다. 그렇지만 이녀석들은 8부 스포일러 없이는 절대 논할 수 없기에... 이번 포스팅은 통일성 있게 이정도로 끝맺어보겠다. 


<죠죠의 기묘한 모험> 제8부 <죠죠리온>은 올해 안으로 한국에 정식 발매될 예정이라고 한다. 많은 관심을 부탁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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