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한마 Jun 09. 2023

작가도 모르면서 예술작품을 왜 봐?

예술을 감상할 수 있는 자격



친한 지인과 술자리를 갖고 있을 때의 일이었다. 자정이 지나고 새벽의 중심에 선 시간까지 도란도란 술을 마시고 있었다. 사람들이 하나둘씩 나가고 어느덧 공간에는 다른 한 테이블과 우리, 이렇게 두 테이블만이 남아 있었다. 시간도 무르익었고 나른해지며 이야기가 끊길 듯 말 듯 할 때쯤. 남아있던 다른 테이블의 대화가 귓가에 크게 들어왔다. 먼저 변명하자면 결코 일부러 듣고자 귀 기울인 게 아니었음을 이 글에서 밝힌다.


귀가 가게 된 건 대화 속에서 들려온 익숙한 몇몇 단어들 때문이었다. '전시회','미술','예술' 같은 단어들이었다. 20대 초반처럼 보이는 앳된 친구들이 예술에 대한 심도 깊은 이야기를 나누고 있나싶어 반갑기도 해서 나도 모르게 그쪽 대화에 점점 집중하게 됐다. 아, 지인도 나랑 같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도 나랑 같은 타이밍에 말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들의 대화 속에서 나 또한 배움을 얻고자 지인을 망각한 채 그들의 대화를 파악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대화에 집중하면서 맥락을 파악한 뒤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주제였음을 깨달았다.


대화의 주체는 커플인 A, B 그리고 B의 친구인 C 이렇게 3명이었다. 서울 어디에서 어떤 작가의 전시회가 열린다는 이야기가 나왔고 B가 자기도 전시회를 좋아한다고 얘기했다. 그러자 A가 너도 전시회 좋아하냐며 무슨 작가 좋아하냐고 물어봤고 B는 작가에 대해선 잘 모르지만 그림이나 조형물 같은 예쁜 예술작품들을 바라보는 게 좋다고 말했다. 여기까진 아무런 문제가 없었지만 중요한 것은 그다음 A가 내뱉은 말이었다.


"작가도 모르면서 예술작품을 왜 봐?"


지금 기억을 더듬으며 쓰느라 정확하진 않지만 비슷한 뉘앙스의 말이었다. 그녀의 질문에는 의문과 질책, 그리고 약간의 조소도 섞여있었다. B는 그냥 좋다. 예쁜 그림, 예쁜 조형물들을 보면 마음이 차분해지고 기분이 좋다. 그래서 나는 예술작품을 보는 것이 좋다는 말로 응수했지만 A는 여전히 전혀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과 제스처를 취했고, 그다음부턴 둘의 끝나지 않는 공방이 이어졌다. 중간중간에 놀리려는 건지 진심인 건지 C가 A의 주장에 맞장구치면서 B가 잘못됐다는 듯 나무라는 과정이 반복됐다. 정리하자면 이것이다.





A의 주장 : 예술작품을 완전히 이해하고 그 안에 담긴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수용하기 위해서는 작가의 생각과 생애, 작품을 제작한 의도를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다면 예술작품을 감상하는 것은 무의미하고 가치가 없어진다

B의 주장 : 예술작품은 보고 즐기는 것이다. 내가 작가를 몰라도 작품을 보고 어떠한 감정을 느끼는 것은 내 자유고 그것이 내가 예술을 즐기는 한 가지 방법이다.

C의 주장 : A의 말이 옳다. B는 틀렸다.


들으면서 너무나 답답했다. 예술을 하고 싶었고 지금도 마음속에 예술을 품고 있는 나로서는 매우 안타까운 마음이 먼저 일어났다. 작가에 대한 정보가 없으면 예술작품을 감상하는 것은 가치가 없다는 주장에 탄식마저 나왔다.


A가 어떠한 과정을 통해 그런 생각을 갖게 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녀의 주장에 선뜻 동의할 수 없었다. 예술이라는 것은 감상자의 주관적인 경험과 해석에 따라 다양한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작가의 생각과 생애, 작품의 의도를 알아야만 예술작품을 100% 온전히 감상할 수 있다는 주장은 너무나도 제한적인 시각이다. A의 주장에 관한 나의 반론은 다음과 같다.






첫 번째, 예술을 주관적인 경험과 해석에 크게 의존하는 영역이다.

 작품을 감상하는 사람들은 각자의 개인적인 삶의 배경, 경험, 가치관들을 갖고 있기에 예술작품은 각각의 개인에게 다양한 의미와 감정을 전달할 수 있다. 이는 작품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과정에서 개인의 자유로운 관점이 큰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강아지 그림이 있다고 할 때, 작가가 사랑스러운 애완동물의 이미지로 강아지를 그렸다고 해도 키우던 강아지가 죽은 기억이 있는 사람에겐 슬픔과 그리움의 감정이 먼저 떠오를 수 있다. 그렇다면 후자는 잘못된 해석인가? 이처럼 경험, 문화적 배경, 성격, 감성 등에 따라 작품에 대한 해석이 달라진다. 한 사람에게는 사랑스러운 강아지가 느껴질 수고 있고, 다른 사람에게는 떠나간 강아지의 슬픔이 느껴질 수도 있다.


두 번째, 예술은 소통의 수단으로 작용한다. 

 작가의 생각과 생애, 작품의 의도를 모르더라도 예술은 언어의 한계를 넘어 감정과 아이디어를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예술작품은 작가의 내면세계를 표현하는 것뿐만 아니라, 받아들이는 사람의 내면과 직접적으로 대화하고 소통한다. 작가의 개인적인 세계와 심미적인 표현이 예술작품에 녹아있기 때문에 수용자 개인의 경험과 감성을 자극하여 각자의 해석과 감정을 일깨울 수 있다. 예술은 감정과 아이디어를 비언어적으로 전달함으로써 보다 직접적이고 강렬한 인상을 주는 경우도 많다. 이는 아마 주절주절 설명하지 않아도 예술이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과 영감을 주는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세 번째, 작가의 생각과 생애, 작품의 의도를 알아도 모든 작품이 완전하게 이해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예술은 개인의 주관과 상상력에 의해 완성되는 경험적인 영역이다. 작품은 작가의 의도를 담고 있을 수는 있지만, 작품이 완전히 이해되기 위해서는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작품과 연결시키고, 자신만의 해석을 형성해야 한다. 이는 예술이 개인의 창조성과 자유로운 사고를 존중하는 영역임을 의미한다. 두 번째에서 말했듯이 예술이라 함은 기본적으로 작품과 주고받는 커뮤니케이션이다. 이 커뮤니케이션은 작품을 바라보는 모두에게 개별적으로 다가오기 때문에 작가의 모든 의도를 알고 있다고 해도 각각이 받아들이는 작품의 해석은 모두 다를 수밖에 없다. 감상자는 작품과 상호작용하며 질문을 던지고, 스스로의 답을 찾으면서 관점을 넓혀나간다.







주저리주저리 길게 썼지만 요점은 간단하다. 예술은 대중에게 공개됨으로써 작가의 손을 떠난다. 작가의 의도와 신념을 반찬으로 지어진 밥상이지만 그것을 먹는 사람은 맛을 다르게 느낄 수 있다. 물론 작가의 생각과 생애에 대해 잘 알면 작품에 대해 더 잘 이해할 수 있겠지만 작품은 그 자체로도 감정과 아이디어를 전달할 수 있다. 작가의 생각과 의도는 참고할 수 있는 하나의 요소일 뿐 예술의 해석과 받아들임은 개인의 경험과 다양성에 기반하기 때문이다.


각 개인의 주관과 배경에 의해 작품은 다르게 인식되며 이는 작품이 그 자체로 독립적인 존재임을 나타낸다. 따라서 작품의 온전한 감상을 위해서는 개인의 주관적인 해석과 경험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우리는 예술작품을 통해 자유롭게 사유하고 상상하며, 작품과의 대화를 통해 새로운 인사이트를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이 우리가 예술작품을 감상하는 이유라고 생각한다.


작가의 정보도 모르면서 작품을 왜 보냐는 그녀의 말은 작가를 모르는 일반대중은 예술을 감상할 자격이 없다는 소리로 들렸다. 세상을 배워가는 아이들이나 예술에 큰 관심이 없는 시민들은 작품을 감상할 기회조차 박탈돼야 하는가. 작가의 모든 것을 알아야 온전히 예술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다고 하는 것은 교양을 가장한 지적폭력이며 선민의식이 아니면 뭐라 할 수 있을까. 한때 예술에 발을 담그고 싶었던 사람으로서 그날의 대화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 줬다. 하지만 나에게 심란함을 남겨줬던 그녀는 남자친구를 개안시키기 위해 애쓰고 있었지만 정작 대화 내내 고갱과 고흐를 헷갈려했다. 그녀에게 예술작품의 전시는 누구를 위한거라 생각하고 있었을까. 한동안 전시회를 가면 그녀의 조소에 찬 표정이 생각날 것같다.




작가의 이전글 [칼럼] 영화로 보는 인공지능 2_ 아이,로봇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