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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강 Mar 26. 2019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

"자리 maketh 사람"

점심식사 후 디렉터가 급 발표할 게 있다며 우리 모두를 휴식 공간으로 불렀다. 혹시나 무슨 사고라도 터진 건가라는 마음으로 가봤더니 그곳에는 샴페인이 있었고, 들떠있는 디렉터는 우리 팀 내 승진자들이 있다며 기쁜 마음으로 발표를 했다. 예전부터 하는 업무 대비 낮은 직급을 갖고 있던 마케팅 담당자와 다른 부서에서 근무하는 친구가 승진했는데, 한국처럼 대대적인 회식 없이 간단하게 점심부터 샴페인을 마시며 승진자들을 축하해줬다. 덕분에 낮술을 마시며 오후에는 열심히 일할 수 없었지만, 승진에 기뻐하는 친구를 바라보며 같이 기뻐해 줬다. 그렇게 승진자들을 바라보고 있으니 때마침 지금이 3월. 많은 국내 기업에서도 승진 발표를 하는 시기라는 게 생각이 났다. 회사 생활 중 가장 큰 축제기간인 3월.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씁쓸할 수 있는 그런 조심스러운 시기. 오늘은 승진에 대한 경험과 생각을 다뤄볼까 한다.



직장인에게 월급이랑 승진 빼면 뭐가 있겠냐?

이는 드라마 미생에서 가장 강렬히 다가왔던 대사다. 필자는 이 말이 전적으로 맞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업무를 하며 얻게 되는 성취감, 힘든 하루지만 동료들과 같이 으쌰 으쌰 하며 오는 낭만, 어느 집단에 소속되어 있다는 소속감 등 충분히 개인이 찾을 수 있는 의미는 많다. 하지만 막상 높은 업무 강도와 무분별한 업무 지시에 정신없이 생활하다 보면 크게 느껴지지 않을 수 있다. 그리고 그렇다 보니 가장 쉽게 눈에 보이는 월급과 승진이 가장 중요하게 느껴지는 게 아마 당연하다고 볼 수 있다.


한국에서의 진급은 회사 생활을 얼마나 했는지와 그 외 평가들로 이뤄진다.

삼성은 국내 기업들 중 "성과주의" 인사제도들을 많이 언급하는 회사다. 말 그대로 일 잘하는 사람이 있다면 먼저 진급해주고 더 많은 기회를 제공하는 방식인데, 실제 경험한 바로 틀린 말은 아니다. 필자의 상사 중 2년 특진하여 주변을 놀라게 한 분도 계시고, 어린 나이에 임원이 되신 분도 계시다. 말 그대로 일을 잘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의 역량을 최대한 발휘해볼 기회를 주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케이스는 어느 정도 높은 직급의 이야기다. 신입사원이 입사 다음 해 대리를 다는 케이스는 기대하지 않는 것이 좋다. 입사 후 첫 진급은 대부분 어느 정도의 근속연수를 가지고 결정된다. 보통 사원으로 입사를 하는 경우 4년 동안의 근무 후 대리를 달게 된다. 그리고 또 다른 4년 후 과장으로 진급할 수 있는데, 성과에 따라서 특진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 예를 들어 진급을 하기 위해서 4점이 필요하다고 가정을 한다면, 어느 해 상위 고과 2점을 받아 3년 내로 4점을 채울 수 있다. 그럴 경우 특진 대상자가 될 수 있는데 그 외 언어나 회사에서 인정하는 자격증을 소지할 경우 추가 점수를 받을 수 있다. 그러므로 꾸준히 성과를 낸다면 특진이 충분히 가능한 곳이다. 진급은 직급이 올라갈수록 어려워지는데, 점수 외 상사 평가 결과 역시 중요하다. 아무리 점수가 높다고 하여도 아직 역량이 부족하다고 생각된다면 특진이 안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시작과 동시에 숨을 참고 반대편 끝까지 잠영으로 수영하는 고독한 레이스를 펼친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성과가 나오지 못하거나 위에서 잘 봐주지 않을 경우 진급이 누락될 수 있다. 때론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는데, 오히려 그렇지 않은 친구 중 좋은 프로젝트나 좋은 팀을 만나 먼저 진급하는 경우도 많이들 봤을 것이다. 불공평하다. 아무리 세상이 불공평한 세상이라고 하지만 한편으로 참 안타까웠다. 하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그 당시 필자가 과연 누군가를 평가할만한 기준을 제대로 알고 있었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실무자들은 대부분 위에서 내려오는 업무를 한다. 업무 자체에서 큰 어려움이 없기에 대부분 일을 잘하는데, 덕분에 누구를 "업무 못 하는 사람"이라고 하기도 어렵다. 그러므로 직장인은 일 뿐만 아니라 상사와의 관계와 타 부서에서 얼마나 인정을 받는지도 중요하다. 예를 들어 필자가 회사에서 만난 흥미로운 캐릭터들이 있다. 나이가 지긋하신 차장님이셨는데, 불같은 성격에 큰 소리로 회의실을 점령하시던 분이시다. 막상 이야기해보면 디테일에 약하시지만 다른 사람들이 갖고 있지 않은 본인만의 강점을 갖고 계셨다. 그분은 회의 전 모든 데이터를 암기해서 들어갔는데 덕분에 "회의를 위한 회의"를 자주 소집하셔던 분이셨다. 그렇게 그분은 모든 숫자를 외우시고 회의에 들어가셔서는 아무렇지 않게 사람들 앞에서 발표를 했다. "제가 알고 있기로는 그게 14%가 아니라 24%로 알고 있는데?". 이런 식으로 말이다. 그렇게 임원들 사이에서는 (이 분이 디테일이 약하다는 것을 아시는 분들도 많이 계셨지만) 그분은 숫자와 디테일에 강한 분이셨는데 실제는 그게 아니셨다. 또 다른 분은 싸움닭이셨다. 타 부서와 업무를 진행하는 도중 흔히 말해서 "방패막이"가 되어주시는 분이셨는데, 특히 본인의 후배 사원들이 고생하는 것을 보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어 막아주시는 분이셨다. 항상 따르고 싶은 선배였고 사람 좋기로 유명한 이 사람. 이렇게 굉장히 다른 두 타입의 선배가 있다. 과연 어떤 선배가 더 잘 됐을까?

   


서글프게도 데이터에 강한 분이 더 좋은 평가를 받으셨다. 위에서 바라봤을 때 본인들이 알고 싶어 하는 데이터를 항상 갖고 있는 사람. 상사 혹은 임원의 입장에서 그 차장님이 디테일을 아는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덕분에 그분은 좋은 프로젝트들을 관리하고 엄청 빠른 속도의 진급은 아니셨지만 당당히 부장을 달았다. 반대로 방패막이 되어주시던 분은 엄청 느린 속도의 진급은 아니셨지만 조금 천천히 진급했다. 이를 바라보며 누군가를 평가하는 기준에 대한 고민을 다시 해봐야 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지금의 생각은 조금 다르다. "본인의 자리"에 있는 일을 얼마나 잘해주느냐도 중요하지만 그 이상으로 "본인의 자리"에 있는 일을 잘하고 있는지를 윗 상사에게 보여주는 것 역시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를 외국에서는 상사를 관리한다 혹은 managing upward라고 일컫는다. 보통 관리란 후배들을 관리한다고 생각하는데, 그 외 상사들을 관리하는 것 역시 중요한 일이다. 여기서 상사와 후배를 관리하는 좋은 밸런스를 찾아야 하는데, 상사에게만 잘 보이려고 하는 사람은 꼴 보기 싫은 사람이 될 수 있고 후배 사원들에게 헌신하는 선배는 인정받기 힘든 세상이다. 대부분 회사 생활을 하다 보면 하나만 선택하는 경우가 많은데 본인의 스타일에 맞게 그리고 본인이 같이 근무하고 있는 매니저에 맞게 밸런스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현 매니저 같은 경우 둘 다 잘하지만 조금 더 윗 상사를 잘 관리하는 것 같다. 항상 중요한 일이 있을 때 언제 본인의 상사에게 알려야 하는지 (loop in 한다고 말한다) 잘 알고 있으며, 본인의 상사와 굉장히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깔끔한 업무 처리를 함으로써 문제가 생길 때 언제나 가장 먼저 다가가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된 것이다. 허나 필자 같은 경우에는 반대의 케이스인 것 같다. 조금 더 후배 관리에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하고 윗사람은 알아서 내 성과들을 알아주기를 바라는 성향이었다 (이에 대해서 반성하고 있다). 필자 역시 매니저를 바라보며 아직은 많이 부족하다고 느끼고 있고, 이를 개선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노력을 하고 있는 중이다. 좋은 예로 매니저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다. 도움을 요청하는 게 어떻게 일 잘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인지 의아해 할 수 있겠지만 단순하게 "일을 못 하겠어요. 도와주세요"라는 말을 하라는 것이 아니다. 필자의 경우 매주 진행하는 1:1 미팅에서 단순히 내가 요즘 뭘 하고 지내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닌 이번 주 objective에 대한 설명을 한다. 예를 들어:


이번 주 목표는 A, B, C야.
1. A는 여기까지 진행했는데 여기서부터는 네 도움이 필요해. 이 미팅이 끝나고 관련 자료를 보낼 건데 결정에 대한 네 피드백을 줬으면 좋겠어.
2. B 같은 경우에는 15명의 고객들과 미팅을 했는데 총 15명 중 12명은 X라는 피드백을 줬고 3명은 Y라는 의견을 줬어. 이를 바탕한 내 결론은 Z고 (+왜냐하면) 이 생각을 누구와 최종 합의를 해서 이번 주 내로 법무팀 Sign-off까지 받는 게 목표야.
3. C는 우선순위에서 뺐어. 내 생각엔 A에 집중하는 게 프로젝트 타임라인을 봤을 때 더 옳은 선택인 거 같은데. 왜냐하면 ABC이기 때문이야.
어때? 괜찮은 것 같아?

이렇게 현 업무 상태를 설명하고 끊임없이 피드백을 받는 것이다. 다음 미팅에서는 그 피드백을 바탕으로 어떤 개선을 했는지 보여준다면 아무리 결과 위주인 아마존의 매니저라도 미워할 수 없게 된다. 또 다른 managing upward로는 내가 어떠한 프로젝트를 할 때마다 누구보다 먼저 큰 소리로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이다. 겸손은 한국인의 미덕 중 하나다. 하지만 외국에서 일하다 보면 내가 잘한 것은 열심히 알려야 하는 문화를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누구든 이야기하지 않으면 누가 어떤 일을 했는지 모른다.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한다면 왼손은 평생 모를 것이다. 그렇기에 아마존에서는 내가 어떤 제품이나 개선안을 만들었을 때 주변 사람들에게 launch announcement를 보낸다. 말 그대로 "내가 이런 제품을 만들었으니 나 칭찬해줘!" 이런 것인데, 이렇게 스스로 본인의 업적을 알림으로 "아 얘가 일을 잘하고 있구나"라는 것을 알릴 수 있는 것이다.


아마존의 경우 승진이 정해진대로 이뤄지지 않는다.

아마존에는 근속연수에 따른 진급이 없다. 물론 평균을 나눌 수 있지만 업무능력에 따라서 한 직급에서 굉장히 오랜 시간을 지낼 수도 있는 것이고 굉장히 빠른 속도로 진급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필자와 같은 직급에 있는 어떤 한 분의 경우 아마존에서 근무한 지 13년이 넘었다고 한다. 필자의 매니저는 입사 3년 만에 진급했고, 들리는 이야기로는 몇 년 내로 (굉장히 빠른 속도다) 진급하지 않을까라는 이야기가 많이 나오고 있다. 그렇다면 아마존은 어떻게 진급을 결정할까? 방식은 생각보다 간단하다. 해당 매니저가 바라봤을 때 후배 사원이 다음 직급의 업무를 할 수 있는 능력이 갖춰줬다고 생각한다면 추천서를 작성한다. 추가적으로 타 부서 동료들의 피드백도 받아서 한 서류를 완성하는데, 이를 상사들이 모여 필독 후 결정을 내린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얼마나 이 사람이 "다음 직급으로 올라갈 수 있는 능력을 갖췄고 이전 경험을 통해서 보여줬냐"라는 것이다. 그 후 모두의 큰 반대의견 없이 결정이 된다면 담당 임원의 단체 메일로 모두에게 알려진다. 아쉽지만 회식은 없다. 점심시간에 샴페인을 가볍게 마시며 서로 축하해주고 저녁에는 깔끔하게 퇴근하여 가족들과 축하하는 자리를 가지면 되는 것이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 아마존에 적용되는 말은 아닌 것 같다. 되려 자리에 맞는 사람이 자리를 갖게 되는 것이다.




승진하면 기분이 정말 좋다.

당연한 이야기 같지만 아무리 회사가 싫어도 그 행복감은 3달 정도 간다. 새로운 명함을 받고 주변에서 나를 전 직급이 아닌 다른 직급으로 부를 때 오는 그 어색함과 뿌듯함은 글로 표현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수많은 승진턱을 내고 한 달 동안 만취 상태로 회사를 다녀도 크게 뭐라고 하는 사람이 없다. 그만큼 열심히 달려온 사람들에게 보상을 하고 큰 축하를 해주는 것이다. 필자 역시 겪어보니 자리는 사람을 만드는 것 같다. 본인이 느끼기에 부족한 부분을 새로운 직급으로 개선하는 사람들을 본 적도 있고 (부조리와 싸운다고들 했다), 되려 직급이 올라간 후 오히려 이상한 모습을 보여주신 분들도 계셨다. 하지만 그 분들이 그 자리에 앉는 것에 반대하는 사람 하나 없었을만큼 모두들 열심히 그리고 치열하게 노력했다. 필자의 다음 승진이 언제일지 모르겠으나 아무래도 회사 생활을 하는데 큰 동기부여가 된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진급 발표의 시기 3월. 승진하신 모든 분들에게 축하의 말씀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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