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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숲 이야기집 Oct 14. 2024

현실은 원래 '차가운' 것일까?

일생경험보고서 3

나는 오랫동안 '현실'에 정을 붙이지 못했다. '이상'과 비교해서 그렇다는 뜻이다. 내게 현실이란 '꿈 깨, 이 사람아' 같은 것이었다. 차갑고, 매섭고, 혹독한.. 마치 (한 번도 가본 적 없지만) 눈보라가 몰아치는, 귀가 찢어질 듯한 추위에 험난한 에베레스트산을 등반하는 느낌이랄까.


누구나 한 번쯤 해본 무료 MBTI 버전, 이상주의자로서 '현실을 생각한다'는 것은 엄살 더해 뼈를 깎는 고통이었다. 주로 상상을 더하고 더하기만 했지, 언제 빼고, 빼고, 뺀 적이 있었던가. 현실을 생각하는 것은 내가 열심히 덕지덕지 이어 붙인 가능성을 하나씩 제거하는 것이었고, 나는 그게 그렇게 못 견디게 싫었다.


'원래' 현실이 냉혹하고, 잔인한 게 아니라, 현실은 그저 현실일 뿐인데 - 판단/평가 없이 있는 그대로를 바라보면 될 뿐인데 - 하필, 내 주변의 현실주의자들이 '부수는' 사람들이었다. 좋은 아이디어가 생각나 이야기하면, 그들은 '글쎄.. 잘 모르겠는데', '안 될 것 같은데' 하며 되돌려 보내기 일쑤였다. 결국, 사기도 꺾이고, 기분도 안 좋아지는 건 나였다. 이런 경험들이 하나씩 촘촘히 쌓여 '현실'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은 것'으로 강화되었던 것 같다. 만약 그들이 '이 부분을 수정하면 진짜 해볼 수 있겠다' 식의 '디벨로퍼'가 돼주었다면, 좀 달라졌을까? 현실을 보다 긍정적으로 여기게 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었다.


..


몇 달 전,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 살고 있는 얘기도 하고, 넋두리도 곁들이고 있었다. 그러던 중, 친구가 '현실을 생각하는 것'에 대해 가능성에서 하나씩 소거하는 것이라는 말을 했는데, 처음으로 그 말이 '고통'이 아니라 '이로운 가지치기'로 다가왔다. 세상에 진짜 '정수'만을 내놓기 위한 장인 정신 같은 마음가짐으로 느껴졌다. 신기했다.


오랫동안 인정하고 받아들이기 싫었지만, '아이디어, 생각, 이상'이라는 것은 '현실'로 '구현'이 될 때 비로소 의미가 생긴다는 것을 납득하게 된 것 같다. 진실로, 생각은 그것이 '실현'이 될 때 가치를 갖추게 되는 것. 그러기 위해선 필연적으로 '현실'을 보아야 하고, 이상에서 발을 뻗어 현실이라는 땅에 닿아야 한다. 만약, 상상만으로 무엇이든 만들어 낼 수 있고, 돈이 된다면, 나는 이미 조 단위 부자가 되고도 남았을 텐데, 아쉽다.


차갑고, 혹독한 환경이라고만 생각했던 현실이 이제는 큰 캔버스, 도화지라는 물상으로 이미지가 바뀌게 되었다. 좀 진부한 표현일 수도 있지만, '현실'이란 내 상상을 펼쳐내는 도화지. 그렇게 생각하니 현실이 꼭 냉랭하고 암담한 것만 같지는 않다. 마음 가는 대로, 마음껏, 자유롭게 붓질할 수 있는 도구가 손에 쥐여진 것 같다. 이상 없는 현실은 어쩐지 시시하고 재미없고, 현실 없는 이상은 한여름 밤의 꿈, 몽상에 불과하다. 이제야 균형을 조금씩 잡아나가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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