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퇴사일지

제주도행 비행기표를 끊었다.

죄책감이 무기력을 부추길 때

by 채채

지난 8월, 비행기표를 예약만 하고 결제를 안 했다. 실수가 아니라 고의였다.


그렇게 좋아하던 여행도 이젠 싫어진 걸까? 덜컥 겁이 났다. 이번 여행은 무기력을 벗어나기 위한 계책이었다. 번아웃으로 일을 그만두고 쉬다보니 점점 우울해졌다. 조금이라도 좋아하는 걸 하면 나아지지 않을까 해서 선택한 여행이었다.

여행은 나에게 늘 정답이었다. 매년 혼자 여행을 갈 정도로 여행을 좋아했다. 짧든, 길든, 국내든, 해외든 좋았다. 그런데 이번엔 도저히 엄두가 안났다. 시간이 넘쳐 흐르는 데도 티켓을 끊는 게 어려웠다. 이마저도 안된다니 나 정말 고장났나봐...마음이 무너져 내렸다.


10월이 되어, 다시 나에게 물었다.


- 너 정말 여행 안가고 싶어?


답은 '아니'였다. 사실 여행이 가고 싶었다. 나중에 이 시기를 돌아봤을 때 여행을 안 다녀오면 너무 후회할 것 같았다. 그런데 마음 한 켠엔 이런 목소리들이 있었다.


- 신혼인데 남편을 두고 혼자 여행가는 게 맞아? 그게 옳은 일일까?

- 앞으로 어떻게 밥벌이 할지도 못 정했는데 감히 여행을?

- 여행 간다고 상황이 저절로 나아지는 것도 아닌데 이 돈을 여행에 쓰는 게 맞나?

- 뭘 잘했다고 여행을 가려는 거야?


강한 죄책감이었다. 여행에 대해서만 이런 마음이 드는 게 아니었다. 카페에 가도, 햄버거를 사 먹어도 마찬가지였다. 문제는 그럴수록 더 무기력해졌다는 거다. 커피를 마시고 간단히 끼니를 해결하는 모든 행위에 죄책감이 따라 붙었다. 일상적으로 죄책감이 쌓이다 보니 정말 작은 선택조차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영역처럼 느껴졌다. 나는 아무 것도 해서는 안 되는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무기력이 심해지고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 그런가? 내 수중엔 모아둔 돈이 좀 남아 있었다. 지난 달부터는 아르바이트를 시작해 소소하게 용돈벌이는 되었다. 물론 백수니까 아껴써야 한다. 하지만 죄책감을 넘어 스스로 수치심이 들 정도로 잘못한 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나를 용서하기로 했다.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책을 읽고 싶은 욕구를, 새로운 장소에 가서 잠시 혼자 시간을 보내고 오고 싶은 마음을 인정해주기로 했다. 그리고 그 정도의 돈은 얼마든지 다시 벌 수 있다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용서의 의미로 제주도행 비행기표를 끊었다.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는 요일에 맞춰 다녀오는 일정이었다. 그러고 나니 이상하게 기운이 났다. 기운을 되찾으려면 하루를 어떻게 보내야 할지 진지하게 고민하고, 루틴을 만들었다. 그리고 4일째 그 루틴을 지키고 있다.


공부를 하지 않은 것에 대해 스스로를 용서한 학생과 자책에 빠진 학생 중 전자의 경우가 실제 시험 성적이 더 높았다고 한다. 자책보다는 용서가 추후 좀 더 나은 선택을 하고 긍정적인 마음을 갖는데 훨씬 도움이 된다는 증거다. 무엇보다도 확실한 건, 무기력엔 자책보다 용서가 약이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