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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감정 사전

01. 무기력 속에 찾아온 활기

회사 밖에서 살아남고 싶은 욕구를 인정하다

by 채채

ㅣ 가뭄에 단비 같은 활기

활기. 굉장히 오랜만에 찾아온 친구다. 경험상 무기력감과 우울감이 심할 때 가장 눈에 띄는 상태는 '감정이 메마른다'는 점이다. 아무리 남편이 좋은 이야기를 해주고, 눈앞에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져도 뜨뜻미지근하다. 기분이 살짝 다운된 정도면 피자를 먹고, < 나는 솔로 >를 보고, 화창한 날씨에 산책만 해도 충분하다. 하지만 그걸 넘어서는 우울 속에선 비싼 레스토랑에 가고, 남편이 끊임없이 사랑을 표현하고, 제주의 가을 해변을 봐도 이상하게 뜨뜻미지근하다. 좋아해야 하는 게 자명한 상황에서조차 그렇지 않다는 게 기괴하다.


그래서 무기력한 와중에 올라온 '활기'는 퍼석퍼석 갈라지던 강바닥에 한 두 방울 떨어지는 빗물과 같다. 아직 강물이 넘실넘실 흐를 만큼은 못 되지만, 곧 시원한 비가 한바탕 올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심어주기엔 충분하다. 완전히 일상을 회복하기 까진 시간이 더 걸리더라도 고장 난 감정 센서가 돌아오고 있다는 증거다.


ㅣ회사 밖에서 먹고살고 싶다는 욕구

최근 회사에 다니고 싶지 않다는 걸 인정했다. 그리고 동시에 하기 싫은 걸 최대한 하지 않으면서 사는 게 나에게 매우 중요하다는 것도 인정했다. 그러고 나니 길이 좁혀졌다. 회사 밖에서 살아남는 방법을 최선을 다해 강구해야 했다.


그래서 gpt와 일주일 동안 아주 작은 실험을 해보기로 했다. 염두에 두고 있는 진로 중 하나인 심리 상담 분야에 지속적인 관심을 가질 수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한 주 동안 감정에 대한 글을 써보기로 한 거다. 그 외에도 무기력과 불안을 관리하기 위한 가벼운 루틴도 설정했다. 그때부터 이상하게 활기가 돌았다.


'출근을 안 해도 된다'는 단순한 사실에서 오는 활기가 아니다. 회사원으로 산다는 것 역시 대단한 일이며, 안정적인 수입을 가져다주는 직장이 이 사회에 얼마나 중요한지도 안다. 그래서 회사에 가고 싶지 않다는 욕구를 오랫동안 부인해 왔다. 무책임한 사람이 된 기분이었기 때문이다. 책임감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나로서는 괴로운 일이었다. 하지만 이젠 나의 욕구를 인정하기로 했다. 이 선택으로 인한 결과가 어떨지 겁이 나지만, 그래도 가보기로 했다. 자신의 욕구를 부인하면 얼마나 큰 무기력이 찾아오는지, 얼마나 많이 돌아와야 하는지 이번에 알았기 때문이다. 내가 나를 인정하는데서 오는 활기는 그래서 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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