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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감정 사전

02. 불안하지 않은 게 어색한

그러나 싫지 않은

by 채채

ㅣ 불안한 게 더 익숙하다

일요일 저녁, 남편과 침대에 누워 각자 핸드폰을 보다가 불쑥 그런 말이 튀어나왔다.


"오빠, 나 이제 통장 잔고가 비어가는데 어떡해?"

"괜찮아, 내가 벌고 있잖아. 천천히 생각해도 돼."


한결같이 따뜻한 멘트가 고맙기도 했지만, 내가 놀란 건 그런 말을 하면서도 마음이 편하다는 거였다. 그리고 그런 편안함이 상당히 어색했다.

대학 때부터 돈 버는 일을 쉬지 않았다. 늘 아르바이트를 했고, 적은 돈이어도 벌면 조금이라도 모았다. 회사에 다닐 때도 마찬가지였다. 언제나 돈을 아껴야 한다는 생각으로 가득했다. 집안 사정이 늘 좋지 않았고, 아르바이트로 모은 돈을 부모님께 드려야 하는 상황도 있었다. 나중에 부모님이 다시 돌려주셨지만 그런 경험이 쌓이고 쌓여, 잔고가 조금만 줄어도 생존의 위협을 크게 느꼈다. 그런데 플랜 B도 없이 일을 그만둔 데다 무기력에 빠져 구직도 못하고 있었으니. 일을 그만두고 정확히 3일 후부터 불안함이 산사태처럼 몰려왔다.


남편이 있으니 괜찮다는 친구들의 말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하루아침에 엄마를 잃은 경험이 있어서, 지금 남은 가족도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공포가 심했다. 아빠가 갑자기 아프거나 다치실 수도 있고, 동생은 직업이 있지만 사회초년생이지 않은가. 오늘을 무사히 넘겨도 내일이, 내일모레가, 일 년 후가 두려웠다.


그런 상태로 이미 3개월이 지났다. 상황은 오히려 더 안 좋다. 이젠 진짜 잔고가 바닥을 드러내고 있다. 그런데 난데없이 불안하지 않다니? 마음이 편하다니? 어색한 게 당연했다. 그럼에도 남편에게 저런 말을 한 건 일종의 위장이었다. 태평한 나를 남편이 이상하게 생각할까 봐 던진 연막탄일 뿐이었다.


ㅣ 사람은 불안을 싫어한다. 안정을 원한다.

가장 먼저 올라온 생각은 '나 너무 안일하다'였다. 하지만 곧이어 질문 하나가 떠올랐다.


그래서 싫어?


스스로에게 물었다. 사람은 불안을 싫어한다. 안정을 원한다. 어색하긴 해도, 안일한 자신이 못마땅하긴 해도 싫은 건 아니었다. 그 순간, 불안이든 안정이든 마음이 느끼는 '감정'이지 '조건'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잔고에 얼마가 있든 불안하려면 얼마든지 불안할 수 있고, 편안함 역시 마찬가지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니 불안이 활활 태우고 간 마음에 새살이 돋는 게 보였다. 그곳이 기분 좋게 간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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