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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람 Oct 30. 2024

어른이지 않아도 괜찮다.

좋은 어른이 되고 싶었다. 살면서 어른이라고 부르고 싶지 않은 어른들, 나이만 어른인 사람들을 무수히도 많이 접해왔다. 좋은 어른을 한 명이라도 만나보고 싶었다. 그렇게 '어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일까. 좋은 어른은 어떤 모습일까.' 하는 물음을 계속해서 던지던 시기에 '코칭 coaching'을 만나게 되었다. 그 시절 접한 전문 코치coach는 내가 생각하는 진정한 어른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타인의 말을 귀 기울여 경청하고, 섣불리 판단하거나 조언하지 않고, 자신의 연약한 부분도 투명하고 유연하게 내비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코칭하는 법, 바로 코칭 대화법을 배우면 되는 걸까 호기심이 올라왔다. 직업인으로서의 코치가 될 생각은 요만큼도 없었다. 그저 좋은 어른이 되고 싶어 코칭 공부를 하기로 결심했다. 공부를 하다보니 자격 시험을 응시하고 준비하는 여정에서 더 코치다워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자격을 취득했고 코치가 되었다. 나이가 들어 어른이 된 사람처럼, 자격이 있어 코치인 사람이 된 것이다.


나는 단어만 바꿔서 다시 질문을 던져야만 했다. '진짜 코치가 된다는 건 무엇일까. 좋은 코치는 어떤 모습일까. 자격이 있다고 코치라 말할 수 있을까. 코치다운 코치가 되기 위해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스스로에게 계속해서 질문을 던지며 코치가 된 이후의 시간을 쉼없이 달려왔다. 누구보다 짧은 시간에 코치로서 많은 경험을 하며 스스로를 단련하였다. 솔루션을 주지 않는 직업인이 코치이지만 세상에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당신이 어떤 모습이어도 괜찮아요. 그저 당신이 원하는 삶을, 당신답게 살아주세요." 이런 말을 뱉는 내 스스로가 언행일치되는 삶을 살지 않으면, 내 마음 속의 진실된 바람을 실현시키는 삶을 살지 않으면 그 누구도 아닌 내 스스로가 나를 코치라 말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렇게 코치로서 스스로를 몰아부치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날, 덜컥 턱에 걸려 넘어졌다. 열심히 튀어나온 턱을 탓했다. 원망했다. 턱을 보지 못한 내 잘못도 인정하려 했지만, 그보다도 더 크게 뒤섞여 올라온 것은 원망의 마음과 화나는 마음, 억울한 마음이었다. 다친 곳이 아파 한참을 울었다. 혼자서만 낮은 턱에 엎어진 것 같아 외로웠다.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넘어진 것을 발견한 사람들이 여기저기에서 다가와 함께 앉아주고 손수건을 내어주고 손을 잡아주고 등을 토닥거려주었다. 그래도 쉬이 진정이 되지 않았다.


잠이 오지 않던 밤이었다. 잠자리에 누워 생각의 나래를 펼치는 중 '아, 나는 아직 내가 원하는 모습의 어른일 수 없는데 그 어른의 모습으로 살고자 했구나. 그저 지금 이 모습 그대로 부족하다고, 도와달라고, 떼를 써보기도 하고 어리광을 부려보아도 좋았으텐데, 결국 나답지 못했던 거구나' 하는 생각이 올라왔다. 돌이켜보면 늘 그래왔다. 어려서부터 책읽기를 즐기며 애어른 소리를 듣던 나로서는 주변 친구들이 시시했고 유치했으며 또래보다 일찍 초경을 시작하고 나서는 '난 더이상 어린 아이가 아니야!' 하는 생각을 했다. 청소년이어서 다 컸다고 생각했고, 스무살이 넘어서, 성인의 날 꽃을 받으며 이제는 진짜 다 컸다고 생각을 했다. 이뿐이었으랴. 대학 졸업 후에는 진짜 사회인이 되었기에, 서른이 넘고 나서는 더 이상 20대가 아니었기에 늘 '이제 진짜 어른이야. 어른답게 굴어야 해' 라는 나만의 신념에 나를 가둬왔던 것이다.


그런데 그 오랜 신념이 어쩌면 그 나이의 나를 나로써 존재하지 못하게 막아섰겠구나 - 하는 생각이 그날 밤에서야 들었던 것이다. 나로서는 아주 얇은 바늘에 풍선이 팡- 터지듯 새로운 인식이었다. 내 안의 어린아이를 인식할 때면, 토닥이기는 커녕 얼른 지금의 내 나이만큼 자라라며 스스로를 몰아세우기만 했던 내가 떠올랐다. 턱에 걸려져서 넘어진 것이 '감사하다'까지는 아니더라도 '다행이다'는 생각을 불러일으켰다.


나한테 필요했던 시기, 필요했던 경험이었던 것이다. 처음에는 너무 상황에 순응하는 것은 아닐까. 무력하게 반응하는거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내게 좋지 않았던 경험, 아팠던 경험을 '어떻게 해야 나에게 도움이 되는 경험으로 바꿀 수 있을까' 궁리해보니, 결국 그 경험을 의미있게 만들 수 있는 선택을 하고 행동을 하는 것이 좋겠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그 누구도 아닌 나를 위해서 말이다.

실컷 주저앉아 울었으니 이제 다시 벌떡 일어날 때이다. 아픈 곳은 조금 쑤시지만 반창고를 붙여두었으니 곧 아물 것이다. 다시 원래의 내 생활을 이어나가기로 한다. 한가지 달라진 것이 있다면 더 이상 '어른답게'의 관점으로가 아니라 '그저 아이처럼 Just Kids!' 을 지향하기로 했다는 것. 어른이 아이의 솔직함을 드러낼 수 있다면, 순수함을 닮을 수 있다면, 호기심을 가질 수 있다면, 재미난 것에 빠져드는 그 열정을 배울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어른다운 것이 아닐까. 그게 더 코치다운 코치이지 않을까. 턱에 걸려 넘어졌지만 다시 일어났으니 턱 위로 올라 폴짝 - 점프를 해볼까 한다. 그저 아주 작은 턱일 뿐이니, 힘차게 뛰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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