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좀비처럼 시험을 보았다.
사람의 마음이 글씨 상태를 반영하는 것 같다.
빼곡한 논술형 시험지를 채울 때 작고 깨알만 한 글씨로 그래도 알아볼만하게 반듯하게 글을 쓰는 나였는데 말이다.
오늘은 삐뚤빼뚤 엉망진창 글씨가 제멋 데로다. 자꾸 쓰려던 글자를 틀리는 바람에 수정펜으로 벅벅 다시 쓰기를 여러 번. 무슨 공사차량이 지나간 것처럼 답안지는 난도질 한 모양새다.
아무리 집중을 하려 해도 몸은 정직한가 보다. 글씨를 쓰는 것은 내 손이니 이 손이 말을 안 듣는다.
그나마 내용이라도 알차면 좋으련만 뇌가 정지된 것처럼 작동을 안 하니 내가 생각하기에는 아무 말대잔치다.
사람이 이렇게도 바보가 될 수 있다.
내가 이 정도로 바보가 되면 나는 아마 진작에 포기했을 것이다. 나는 항상 무언가를 할 때 그것이 요리가 됐던 공부가 됐던 80점 이상은 맞아야 속이 편한 사람이다. 아주 뛰어나진 않아도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야 속이 후련한 사람이다.
항상 그 상향선을 정해놓고 잘 안되면 괴로워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나는 이번에 그 상향선을 포기하였다. 가정의 갈등과 힘듦을 겪으며 공부에 집중이 안 됐다.
완전히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못할 바에는 말이다.
그런데 그러지 않기로 했다.
이렇게 못하게 된 나를 참기로 했다. 불성실하게라도 완결하는 나를 참기로 한 것이다.
나는 지난 학기에 학과 일등을 했다. 과목 교수님 한 명 한 명의 점수를 합산해 일등을 한 것이니 참으로 기뻤다.
그런데 내 의지와 상관없는 가정의 아이들 일로 나는 금세 바보가 됐다.
평소에 100만큼 하던 일을 50도 못하고 있다.
그런 날이 있다.
엄마라서 그런다.
못하는 나를 참고 그냥 좀비처럼 살아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