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 <해를 쫓는 아이들> 출판 일지] #2
이만하면 됐지
내가 그림책을 내기 전 무수히 되뇌었던 말이다. '이만하면 됐지, 이만하면 됐지... 여기서 뭘 더 어떻게 하자는 거야...' 사실 내 머릿 속에는 그림책에 대한 기준이 확고히 있었다. '내용'에서부터 '문체', '그림', '디자인(무조건 금박!)'까지. 하지만 작업을 하다 보니 하나하나 점점 타협하게 되었다. 일단은 '출판'을 하는 것이 중요했으니까. 내용도, 문체도, 그림도, 디자인도. 모든 면에서 하나씩 타협을 봤다. '아, 내가 상상하는 것은 있는 그대로 구현될 수는 없는 거구나, 어쩌면 내가 상상한 '완벽'이란, 정말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런 나약한 중얼거림이 습관이 되어간다는 건 참으로 무섭고도 슬픈 일이다.
다른 누구보다 나 자신에게. 어느 순간 나는 점점 더 내 의견을 솔직히 말하지 않기 시작하였는데, 그건 비단 남 뿐만 아니라 나 자신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원하는 걸 점점 타협하면서, '나 자신'에게 가장 솔직해지지 않을 때의 비극은, 내가 '나 자신'을 더이상 모르게 되는 지점이 온다는 사실이다. 나는, 점점 더 나를 알 수 없었다.
나는 아주 뛰어난 결과물을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나의 한계가 분명했다.
나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결과를 빨리 내고 싶었다.
그건 나의 조급함인 동시에,
어쩌면 시기적절한 결단이었다.
나를 알 수 없었으므로, 남들에게 피드백을 더욱더 요구했고, 그럴수록 점점 더 내가 원래 원했던 것을 알기가 어려웠다. 나는 왜 이 글을 썼더라? 나는 왜 이 책을 내려고 하더라? 이 책을 내서 대체 무엇을 하고 싶었던 걸까? 모든 목적의식과 의미가 퇴색되어갔다. '해'를 쫓는 연과 한의 강한 의지와 달리, 나는 점점 더 '해'를 쫓지 않게 되었고, '해'를 쫓는 걸음을 멈추는 것을 합리화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내 여정은 서서히, 삐거덕거리는 낡은 소리를 내며 멈춰갔다.
그 당시 읽었던 책이 헤르만 헤세의 <수레바퀴 아래서>이다. 그 책에서 주인공 한스 기벤라트는 우등생으로신학교에 입학하지만, 자유분방하고 반항적인 친구 하일너를 만나 점점 둘만의 세계에 갇혀간다. 주변 친구들과 선생들은 배경으로 밀려나고, 그 사이 한스는 수업 진도를 놓치고 만다. 그러다가 어느 날, 자유로운 영혼 그 자체인 하일너는 신학교에서 홀연히 사라진다. 한스에게 별다른 언질도 없이. 냉정하고 또 냉정하게. 안 그래도 고립되어 있던 한스는 수업에도, 친구들에게도, 선생에게도 적응하지 못해 고향으로 돌려보내진다. 고향에서 견습생 일을 하던 한스는 서서히 파멸한다. 한스의 천성이었던 우등생으로서의 재능도, 나름 동경했던 하일너의 자유분방한 용기도 없던 한스의 죽음. 사고 같지만 당연했던 죽음...
나는 그 죽음에 나를 이입했다. 수레바퀴 아래 깔린 한 존재. 다만 나의 수레바퀴는 학교 따위의 제도가 아니었다. 그건 그저 내 안에 있던 나태, 오만, 안일함 등이었다. 나는 나 자신이 과거에 쌓아올린 것들에 짓눌려가고 있었다. (이렇게 고백하니 한편으로는 속이 편할 정도이다) 나는 수레바퀴 아래에 깔려 거의 죽음까지 갈 뻔 하였다.
사람이 바닥을 치면 좋은 점은- 나의 바닥을 직시한 만큼 다른 사람들의 바닥도 보인다는 것이다. 다만 그 바닥들이 꼴보기 싫다거나 아니꼽다 등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내 안의 바닥이 네 안의 바닥과 별반 다를 것 없음을 알기에(그 안에 담긴 내용물들의 결이 조금씩 다를지는 모르지만), 공감과 연민이 인다. 누구든 자신이 직면하기 어려운 바닥이 있으며, 아무리 잘난 누구든, 삶의 어느 때에는 자신도 원치 않는 바닥을 칠 수 있다는 사실도.
정말, 정말이지 말야.
예전에는 그토록 당연했던 것들이 더이상 당연하지 않게 되는 순간이 오면(가령 예전에는 능숙히 읽었던 영어 문장이 이제는 한 줄 읽기도 힘들다거나, 예전에는 어떤 글만 봐도 훤히 보이던 구조가 이제는 한 문장 한 문장 파악하기도 어려워진다거나, 당장 어제와 오늘, 내일이 토막토막 파편화되어 눈을 감으면 인생이 사라질 것 같은 우울과 불안에 잠식당하는 등), 한 사람이 느낄 수 있는 좌절은 헤아리기가 어렵다. 당연히 보던 사람이 어느날 갑자기 시력을 잃게 되었을 때 (물론 시력을 상실하고도 그걸 상실로 여기기보다는 평안으로 여기는 이들도 있다. 시력 상실을 불행으로 치부함도 아니다) 그때의 어둠이 유난히 더 깜깜하듯.
나는 그 어둠 속에서 과거에 했던 일들마저 '할 수 있을까?'하는 의구심에 빠졌다. 책을 출판한 것. 이미 했던 일이다. 글을 쓰는 것. 자주 했던 일이다. 그런데 왜 그 작업들이 '감히' 엄두 내기도 어려울 정도로 버거워졌지? 어디서부터 이 막힘이 시작되었지? 자문해들어가며 나는 침잠했다. 침잠. 그것은 사색이나 몰입이기도 하고, 우울에의 잠식이기도 하다. 사색과 몰입 끝에 명료해진 것들이 있다. 우울에 잠식당한 끝에 희뿌얘진 것들이 있다. 그 혼란한 안개 속에서 나는 바닥으로 떨어졌고, 그렇게 나의 바닥에 있던 것들을 직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 바닥의 끝에서 가장 작고 강렬하게 들려왔던 목소리가 '이만하면 됐지. 뭘 더 바라는 거야' 하는 무기력하고 나태한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는 오랜 시간 동안 내가 지쳐있었음을 주장했지만, 글쎄, 나는 그마저도 핑계로 들리는 걸 보면, 내가 가혹하거나, 그 판단이 진실이거나.
여하튼 분명한 건 하나였다.
작가가 '해를 쫓는 의지'를 상실했는데, 이야기가 어떻게 설득력을 얻을 수 있나.
그래서 나는 '해를 쫓는 의지'를 하루하루 조금씩 내보려고 한다. 그 첫걸음이 나의 밑바닥을 마주하고 고백하는 이 글에서부터이다.
지금의 내 상태에서만은 정말 '이만하면' 되는 걸지도. 여기서부터가 단단한 기초를 다지는 시작점일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