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 생존기_03
날이 더 추워지기 전에, 어디든 한 번은 다녀와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땡스기빙에 맞춰 토요일부터 월요일까지 쉬는 3일간의 휴일도 딱 맞춘 것 같았다.
예산과 왕복 10시간 운전만 견딜 수 있다면.
단풍국에 왔으니 단풍 보러 가자! 이번엔 퀘벡이다.
사실 편도 5시간에 달하는 거리를 혼자서 운전해 갈 수 있을지 두려움이 앞섰다. 특히나 차로 5시간이면 서울에서 부산 정도의 거리인데, 청소년 1명에 어린이 2명을 태우고 무사히 갈 수 있을지 걱정됐기 때문이다. 차 안에서 벌어질 수많은 다툼과 쏟음(물, 음료, 과자 등)에 대비할 수 있을까.
그렇지만, 나는 대책 없이 무모하고 용감한 여자니까. 일단, 또 저질로 보기로 했다.
땡스기빙을 끼고 2박 3일 일정부터 정했다. 문제는 숙박이다.
유명하고 꽤 그럴듯해 보이는 호텔은 이미 다 찼고, 그 대안으로 규모는 작지만 위치가 훌륭하고 머무는 동안 꽤 만족했다는 리뷰가 달린 호텔을 찾았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4성급, 5성급은 아니지만, 나름 넓은 방과 자체 주차장이 있고 걸어서 올드퀘벡을 구경하기에 좋은 위치인 것 같았다. 연휴라는 극성수기라 그런지, 숙박료가 꽤 비쌌다는 건 안 비밀. 그래도 우리가 묵고 싶었던 샤토 프롱트낙(드라마 <도깨비> 호텔로 유명한 곳)에 비하면 퍽 저렴한 곳이었다. 샤토 프롱트낙은 1박에 무려 200만 원이 넘는다. 200 CAD 아니고, 200만 원.
어찌 됐든 숙소까지 예약했으니 이제 가는 거다!
출발 전날, 간단하게 일정을 짰다. P답게 , P스럽게.
첫날 : 10시 출발 - 12시 30분 점심 -16시 퀘벡 도착 - 17시 숙소 짐 풀고 외출(구경, 저녁식사+딸님 생일파티)
둘째 날 : 호텔 조식 - 방 바꾸기(첫날 고정하거나, 짐 맡길 수 있는지 문의할 것), - 외출(구경, 구경, 구경 _목 부러지는 거리, 올드퀘벡 상점들, 빨간 문, 알함브라 언덕 등)
셋째 날 : 체크아웃 - 조식 - 정오 전에 집으로 출발
대망의 퀘벡여행 날. 사실 이 날은 딸아이의 양력 생일이었다. 한국에 있을 땐 양력엔 간단하게 케이크를 먹고, 음력생일에 미역국을 끓여줬다. 음력생일을 챙겨줘야 잘 산다는 말에 혹해서 저렇게 1년에 2번씩 생일을 챙겨줬더랬다. 나는 미신의 나라 대한민국의 딸이니, 이 정도쯤이야. 이지피지. 본래 TNT(아시안 마켓)에서 케이크를 사주기로 했으나, 퀘벡 여행으로 인해 케이크는 퀘벡에서 사기로 했다. 이케아식 조식을 먹은 뒤, 남은 과일과 간식을 챙겨 출발했다.
하지만, 주유하러 가는 길에 지갑을 두고 나왔단 사실을 깨달았다. 어지간하면 그냥 가겠지만, 디파짓도 내야 하고, 캐나다 신분증도 지갑에 있기에 결국 집으로 다시 차를 돌렸다. 나는 지갑을 챙기고 형님과 아이들은 빼먹은 짐을 더 챙겨 예정시간보다 30분 늦어졌지만, 다시 출발! 장거리 운전은 몬트리올 이후 처음이라 조금 긴장됐지만, 아름다운 풍경과 끝없이 이어지는 직선코스 덕분에 그렇게 힘들진 않았다. 한국이었다면, 막히는 도로 덕분에 더 괴로웠으리라.
아우토반 뺨치는 직선 코스 덕분에 시속 150Km를 밟아도 도드라지지 않는다는 점이 특히 마음에 들었다. 나는야 스피드레이서.
그렇게 무사히(?) 몬트리올 근처 휴게소에 도착해 점심을 먹었다. 고속도로에서 빠지지 않고 식사까지 할 수 있는 휴게소가 몇 개 없었던 터라 선택의 여지가 많지 않았지만 꽤나 좋은 선택이었던 것 같다. 몇 개의 식당과 카페가 있고, 기념품 상점에 주유소, 야외 놀이터까지 있었다. 그리고 캐나다에 와서 처음으로 한국인 무리를 만났다. 아마 관광 온 것이라 추정된다.
싸 온 샌드위치와, 휴게소에서 산 피자 등을 먹고, 큰 애는 동생들 몰래 아이스크림을 즐겼다. 어른들은 출발 전에 아이스커피셰이크(?)를 샀는데, 살짝 들큰한 것이 피로감 해소에 큰 도움이 됐다. 이곳 야외 놀이터에 반해 놀다 보니 시간이 조금 더 지체됐다. 결국 퀘벡에 도착하니 거의 저녁 시간이 다 돼 있었다.
퀘벡 내에서 길을 헤매지 않을까 걱정했었는데, 생각보다 금방 호텔을 찾을 수 있었다. 구글맵 만세.
호텔 앞 거리도, 주차장 진입로도 조금 좁았지만, 베스트드라이버답게 무사히 통과했고, 가장 안쪽 넓은 주차공간에 주차를 하고 로비로 들어섰다. 하지만, 아뿔싸 메일로 예약해 둔 호텔 내 주차장은 이용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호텔 측에서 회신을 안주기도 했지만, 우리 차가 커서 주차가 안된다고 했다. 대신 같은 가격의 근처 공영주차장을 알려줬고, 페이도 호텔에서 바로 처리해 주었으며, 친절하게 주차장 위치까지 지도로 표시해 주어 크게 불편함 없이 주차할 수 있었다.
또, 연박으로 쓸 수 있는 방이 없어서 각각 방을 예약했는데, 첫날은 2층이라 들어오고 나갈 때가 편한 대신 조금 어두웠고, 둘째 날은 제일 위층이었는데, (그래봐야 5층이다.) 확실히 더 밝았다. 아침에 쏟아지는 햇살 덕분에 더없이 따스한 기분으로 일어날 수 있었을 정도였다.
퀘벡은 우리가 지나는 오타와를 기준으로 동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덕분에 훨씬 추울 거라고 예상했고, 10월에 경량패딩을 입고 다니는 모습이 구글 로드뷰에 찍힌 걸 보고 우리도 니트와 장갑 등을 챙겼다. 그런데, 더 챙겼어야 했나 보다; 퀘벡은 정말 추웠다. 바람은 휘몰아쳤고, 특히 아침-저녁엔 손이 시릴 지경이었다. 가을이지만, 초겨울 느낌이랄까.
우리가 묵는 호텔은 시청 근처였는데, 시청 뒷마당은 핼러윈을 겨냥한 작품으로 꾸며져 있었다. 아이들은 그 작품 사이를 뛰어다니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고, 딸아이와 조카 역시 잔디밭을 뒹굴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근처를 조금 구경하고 나니 도시에 밤이 내려앉았고, 우리는 저녁식사 할 곳을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우리는 아이가 셋이나 있고, 미리 예약도 하지 않았던 터라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없었다. 가는 곳마다 만석이었다. 우리만 땡스기빙을 맞은 것이 아니었는데, 대명절(?)이었단 사실을 간과한 것이다. 그러다 130년이 넘은 한 식당에 줄을 서서 들어갔다. 앞으로 40분은 기다려야 한다고 한다. 하지만 다른 식당처럼 우리를 매몰차게 내치지 않았다. 기다리면 자리를 내줄 수 있다고 설명했으니. 어차피 다른 식당은 기다려도 마감시간으로 인해 들어갈 수 없었고, 추운 밖에서 대기를 해야 했기에, 따뜻하게 안에서 40분을 기다려 보기로 했다. 하지만, 30분도 채 기다리지 않았을 때 우리는 넓은 자리를 받을 수 있었다. 오래 기다리게 해 미안하다는 친절한 멘트와 함께. 시간이 늦어, 저녁 식사 겸 생일파티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마침
이곳에는 후식 케이크도 판매하고 있었다. 이렇게 고마울 때가. 저녁도 먹고, 케이크도 주문했는데, 혹시 생일초 같은 게 있냐고 물으니 어마어마한 초를 꽃아 축하해 주었다. 딸아이의 표현에 따르면 로켓 초였다.
둘 째날 아침, 방을 바꿔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긴 했지만, 오전 외출 전에 짐을 다음 방으로 옮겨놓고 나갈 수 있도록 준비해 줘서 한결 편하게 이동할 수 있었다. 이 페이지를 빌어 친절한 리셉션 직원에 다시 한번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그녀는 정말 친절했다. 올해의 친절상을 주고 싶을 정도로.
둘 째날 일정은 하루 종일 올드퀘벡의 거리를 즐기는 것이었다. 호텔 근처 작은 상점을 하나씩 둘러보고, 목 부러지는 거리와 풍경을 감상했다.
가장 많이 들어가 본 곳은 크리스마스 상점이었는데, 테마별로 다양한 장식이 진열돼 있어 구경하는 재미가 있었다. 또 인상적이었던 곳은 눈앞에서 직접 유리공예를 볼 수 있는 공방이었는데, 아이들을 위해 눈사람 장식을 하나씩 구매했다.
도깨비의 도시 퀘벡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또 무엇인가. 바로 빨간 문과 아브라함 언덕이다. 한 가지 놀라운 건, 아무것도 아니라는 그 도깨비의 빨간 문이 관광지가 됐다는 것이다. 인근 목공예상점에서는 도깨비 묘석까지 나무로 깎아 만들어두고, 빨간 문 앞에는 관광객들의 줄이 수미터 가량 늘어져있었다.
목 부러지는 계단엔 사람이 너무나도 많았다. 인산인해란 이런 걸까 싶을 정도로. 아마 연휴기간이라 관광객이 더 많았을 테지만, 목이 부러지는 게 아니라 사람에 치여 죽을 수 있겠단 생각에 아찔해질 정도였다. 그보다 진짜 목이 부러질만한 경험은 아브라함 언덕을 오르는 계단에서였다. 구글맵이 왜 나를 그 길로 인도했는지 모르겠지만, 언덕을 오르는 그 계단은 고소공포증과 체력의 한계로 그만두고 싶은 마음을 10번쯤 먹게 했다. 정말 거짓말이 아니다. 쉬고 싶고 그대로 주저앉고 싶은 순간이 정말 많았지만 발밑은 아찔했고, 내 아이는 이미 저만치 앞서 가고 있었다. 6살의 꺼지지 않는 배터리를 소유한 딸아이는 제일 먼저 그 계단 끝까지 오르는 기염을 토했고, 엄마인 나는 결국 묵묵히 그 뒤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고지에 올랐을 때 숨이 턱까지 차고 눈앞에 아찔했지만 다행히 그런 사람들을 위한 급수대가 자리하고 있어 목을 축이며 숨을 돌렸다. 언덕 위는 놀랍도록 평온했고, 광활했다. 아이들은 물 만난 고기처럼 그 언덕 위를 뛰고 구르며 에너지를 소비했다.
아브라함 언덕길 끝에는 그 유명한 도깨비 언덕(?)이 자리하고 있다. 저 멀리 푸른 물줄기와 샤토 프롱트낙이 내려다 보이는 초원이다. 이미 수많은 인파가 이곳 정경에 취해 있었다. 언덕 위 칼바람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이. 우리도 한동안 자리를 지키고 풍광을 바라보았다. 눈과 가슴에 한가득 이곳의 정취를 눌러 담은 후에야 언덕을 내려왔는데, 아래로 내려오니 신기하게도 바람이 어느 정도 잦아들고 추위도 한결 덜해졌다.
밤이 내린 올드퀘벡 역시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거리 곳곳에 장식돼 있는 작은 알전구가 내뿜는 열기 따위는 사람들의 반짝이는 눈빛과 열정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 정도로, 아름다운 거리와 사람들로 북적였다.
도심 안 공원에선 단출하게 꾸려진 무대가 세워졌고, 예술가들의 공연이 이어졌다. 불어를 알아들을 순 없었지만, 모든 길이 로마로 통하듯, 예술은 으레 그래왔든 사람들을 하나의 심상으로 이끌어주었다. 모두가 한 마음으로 공연자를 응원하고 분위기를 즐기는 사이 퀘벡의 밤은 더 깊어졌다.
그리고 마지막 날, 집으로 돌아오는 날이 되었다.
오전 중에 퀘벡을 떠나기로 계획했지만, 예상했던 식당에 가지 못해 아침 먹을 곳을 찾느라 시간이 지체됐고, 그 김에 퀘벡의 거리를 조금 더 즐기기로 했다. 올드퀘벡에 푹 빠진 조카가 올드퀘벡 한가운데 자리한 라발대학에 진학하고 싶다는 소취를 밝히면서 바로 옆 노트르담 대성당에도 방문했다. 몬트리올에서 노트르담 성당에 들어가며 입장료를 냈던 우리는 입장료가 무료라는 점에서 한 번, 실제로 미사가 이뤄지고 있는 것에 두 번 놀랐다. 성호를 그으며 성당 안에 들어서니 소담하지만 아름다운 내부 장식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름다웠던 퀘벡 일정은 메이플캔디로 마무리했다. 왜 벌써 집에 돌아가야 하냐는 아이들의 성화에도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어 아쉬울 따름이다. 하지만, 박수칠 때 떠나라고 하지 않던가. 즐거운 기억이 한가득 생겼으니 아쉬움은 뒤로 하고 다음을 기약해야지.
즐거운 퀘벡의 이모저모를 더 풀고 싶지만, 다음 여행기를 위해 오늘은 여기서 마친다.
어쨌든 오늘도 생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