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때에도 걷고는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세상의 키가 점점 높아지기 시작했다
내 눈높이가 낮아지고 있는 것인지
저들이 자라나고 있는 것인지
문득 저 편만을 바라보고 있던 고개를
밑으로 밑으로 낮추자
떨고 있는 어린 다리를 보았다
이윽고 턱, 소리와 함께
더 이상 불안한 떨림조차 볼 수가 없었다
다시 고개를 높였을 때
세상의 키는 훌쩍이나 높아져 있었고
그 후 걸음이란 없었다
나는 그렇게 두 손바닥을 땅 위에 짓이기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무언가가 손등을 간질였다
그것은 계속해서 나를 간질여
결국 눈물 한 방울과 함께 흙 속에 묻어두었다
걸음도 잃고 고개도 잃었지만
애써 그 흙을 보듬어 보았다
얼마쯤 지났을까 떡잎이 자라더니
마침내 덩굴이 되어 나의 등을 밀기 시작했다
하는 수없이 나의 등은 밀리기만 했던가
고개를 들고 밝은 햇살을 보았고
새가 지저귀고 살가운 향기가 풍기고
서서히 세상의 키가 작아지고 있었다
나는 넝쿨을 타고 세상과 마주 보았다
그리고 다시금 밑을 보았을 때
꿋꿋한 다리만을 볼 수 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