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혁재 Feb 13. 2019

건장했던 택배 노동자는 왜 소파에서 일어서지 못했을까

[이기사]로 편입하는 글

"건장했던 택배 노동자는 왜 소파에서 일어서지 못했을까."

 

 "택배 없는 일상을 상상해 본적이 있나요?"

    

 필자가 가장 설레는 순간 중 한 순간을 꼽자면, 경비실에서 붙여준 택배 수하물이 도착했다는 메모를 확인한 순간이다. 가족 중 한 사람의 택배일지도 모르지만 어디서 어떤 택배가 왔는지 상상하는 순간만큼 '소확행'도 없는 것 같다. 근데 사실 살면서 택배 받는 것만 신경 써왔던 터라 어떤 과정을 거쳐 택배가 오는지 잘 모른다. 누구의 아침과, 누구의 밤과, 누구의 땀이 택배가 내 집앞까지 오는데 쓰였을지 깊게 생각한 적이 없다. 그러던 차에 한겨레에서 택배 노동자에 대해 다룬 르포 기사를 우연히 보게 되었다. 오늘의 시선을 택배 노동자에게 담아야겠다고 마음 먹은 이유는 단순하다. 르포 기사를 읽어보니 이러다 정말 '택배 없는 일상'이 일어날 수 있겠다 생각이 들어서다. 우리 모두의 소확행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한 번 같이 시선을 옮겨보자.    


 한겨레 르포기사에 따르면, 지난 1월 4일 CJ대한통운 소속의 택배 노동자 성씨(59)가 퇴근 후 심근경색으로 사망했다. 노조와 사측은 성씨의 사인에 대하여 장시간 노동으로 인한 과로사인가 아닌가 문제로 다투고 있다. 같은 기사에 따르면 노조는 “택배 노동자들은 아침 7시부터 저녁 8~9시까지 하루 평균 14시간가량” 일을 한다고 주장한다. 반면 회사는 성씨가 “지난달 평균 주당 노동시간도 성탄절이 낀 주(48.5시간)를 제외하면 63.3시간”이라며 주당 60시간이 넘는 노동량이지만 노조 측 주장이 허위사실이라며 부정하고 있다.

 택배 노동자의 삶을 들여다보기 전에 먼저 회사의 이야기를 들여다보자. 회사는 이번 성씨의 죽음에 대해 크게 세 가지 변명을 하고 있다. 하나, 배달 물량 설정을 택배 노동자 자율에 맡기고 있다. 둘, 자동 분류기를 도입하여 노동 강도를 낮췄다. 셋, 택배 노동자들은 개인 사업자이기 때문에 회사의 책임 적다. 첫 번째, 두 번째 이유는 쟁점이 된다 하더라도 세 번째 이유가 자꾸만 마음에 걸린다. 택배회사는 택배 노동자들의 노동으로 이윤을 생산함에도 왜 그들의 노동에 책임을 지지 않는 걸까?     


** 2019. 이준희. 한겨레. “‘과로사 의혹’ CJ 택배 가보니…아침 7시부터 숨 가빴다” (1월 13일).

http://www.hani.co.kr/arti/society/labor/878228.html#csidxd5323a36ba94c0296aa82b1ea8bf03c           



 - 한국 사회에서 노동은 언제부터 보호받지 못했을까?  


기업과 노동자의 관계를 파악하기 위해선 경제 개발이 본격화 된 박정희 정권 주도의 산업화를 논하지 않을 수 없다.  [출처 : 연합뉴스]


 경제활동 시스템을 단순하게 도식화하면 방금 던진 물음은 더욱 커진다. 경제활동 시스템에서 가계는 기업에 노동력을 제공함으로써 기업이 상품을 생산하도록 돕는다. 그에 대한 급부로 기업은 노동력 제공에 대한 임금을 가계에 지급한다. 이론적으로 노동력을 제공하는 가계와 임금을 지불하는 기업은 상호 호혜성을 띠는 관계다. 하지만 현실의 한국 사회는 기업과 노동자가 상호 호혜적 위치에 놓여있다 평가하기 어렵다. 오히려 기업이 노동자의 권익 위에 존재하는, 일방적인 우열 관계로 설명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택배 노동자의 사망 사례는 이론에서 벗어난 한국의 경제 현실을 반영하는 많은 사례 중 하나다.

 기업이 노동자를 책임지지 않는 모습들은 앞서 언급한 ‘기업과 노동의 불균형’으로부터 비롯된다. 이 불균형은 구조적 속성을 띠는데, 한국 현대사를 살펴봄으로써 ‘어떻게 이런 구조가 형성되었는지’ 설명할 수 있다. 한국 사회는 전쟁이 끝난 후 4·19 혁명을 통해 부정부패의 이승만 정권을 몰아냈지만, 당시 박정희 소장을 필두로 한 군부 세력에 의해 쿠데타가 일어났다. 이후 윤보선과의 아슬아슬한 표차를 극복하고 박정희는 한국의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민족중흥을 위한 경제성장’을 약속한 박정희 정권의 경제개발계획이 시작된 것이다. 박정희 정권은 본격적으로 성장의 발판을 마련하고자 자본 축적을 시작했다.

 하지만 해방 이후 전쟁을 겪고, 격변의 시간을 온 몸으로 견뎌낸 한국은 민족 자본가가 형성되기 힘들었다. 사실 자본가 형성은 고사하고 내수 활성화조차도 어려웠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박정희 정권에게 경제 성장을 위한 최선의 해답은 정부 중심의 수출을 통한 자본 축적이었다. 대통령의 강력한 힘이 작동하는 국가로 변모한 한국은 기업의, 특히 재벌 기업의 수출을 전방위로 도왔다. 경제 성장에 필요한 자본을 빠르게 마련하기 위함이었다. 국가는 기업이 수출을 잘 할 수 있는 혜택을 최대한 보장해주었는데, 노동자들의 임금을 줄이는 일 또한 그 혜택에 포함되었다. 기업이 이끌고 국가가 뒷받침하는 수출 우선의 경제 성장에서 ‘노조의 결성’과 ‘임금 상승 요구’는 ‘민족 중흥’에 반하거나 ‘반공’에 반대되는 처사로 인식되었다. 국가의 호위를 받으며 성장한 기업은 국가와의 유착관계를 강화시킴과 동시에 그 스스로의 크기를 확대시켰다. 재벌 기업들은 더 이상 사회가 견제하기 어려워질 정도로 거대해졌다. 재벌 기업이 이끄는 사회·경제 분위기에서 자연스럽게 노동자가 자리할 위치는 더더욱 줄어들었다. 한국 현대사에서 기업에 뒤쳐지는 노동의 위치는 그렇게 천천히, 하지만 깊게 자리 잡았다.     


** 유시민의 ‘나의 한국 현대사 (1959-2014, 55년의 기록)'. 돌베개  참고     


 - 협약의 민주화, 제도 정치권의 침묵      


 노동이 기업과 동등하지 못한 자신의 위치를 바꿀 기회가 완전히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87년 6월, 뜨거웠던 여름의 민주 항쟁은 전두환의 군부 독재를 밀어냈다. 6월 민주항쟁은 5·18 광주 민주항쟁을 토대로 재야세력과 학생 운동권, 야당 정치세력의 끊임없는 투쟁이 만들어낸 ‘민주화 경로’의 결과물이다. 하지만 끝내 이뤄낸 민주화 역시 제도권 정치에 노동계의 입성을 돕진 못했다. 즉, 우리 사회의 가치와 문화, 구조의 혁명적 변화를 만들 수 있는 기로에서 ‘노동’은 자신의 위치를 바꿀 수 있는 힘을 얻지 못했다는 뜻이다.

 보다 자세하게 설명하자면, 정당 정치의 개혁 실패 때문에 기업과 노동 간의 구조적 모순을 해결하지 못했다. 제도권에서 민주화 세력의 구심점이 되었던 야당은 사실 민주적인 정당구조를 가지지 못했다. 독재정권에 맞서다 보니 야당 조직은 보스 중심의 하향식 명령하달 구조를 띠는데다 비밀스럽게 운영되는 부분이 많았다. 김영삼, 김대중으로 대표되는 1인 중심의 사인 정당 정치는 언급한 야당 조직의 특성의 전형적인 예다. 민주화 이후에도 야당이 이런 조직 형태에 익숙하다보니 당원들이나 재야 세력들의 목소리가 정당에 반영되기는 쉽지 않았다. 1987년의 민주화가 ‘협약의 민주화’로 정의되는 이유도 정당 개혁의 한계와 연관 있다.


민주화 세력의 '지도자' 격의 김영삼 전 대통령과 김대중 전 대통령은 그들이 의도했건 하지 않았건 사당 정치의 흔적은 신세력의 제도권 정치 진입을 막았다. [출처 : 한겨레 21]

 야당은 민주화를 함께 이끈 재야 세력과 운동권, 노동세력의 제도권 정치 입성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지 않았다. 오히려 구시대의 정치법( ; 정당설립, 정치자금에 관한 법률, 선거법, 노조 정치활동 금지 등), 제도 정치권으로의 진입 장벽을 그대로 유지했다. 그 결과로 13대 총선과 대선에 노동을 비롯한 새로운 세력의 제도권 정치로의 진입은 실패했다. 결국 민주화로 인한 권력 경쟁의 확대는 기성 제도권 정치 세력에게만 국한된 것이지 시민 사회에의 참여로 확대된 것은 아니다. 실질적으로 노동의 힘을 키울 수 있는 능력을 얻지 못한 노동 세력은 점차 급진 노동세력화 되면서 대중의 지지를 잃는 절차를 밟았다.     


** 박찬표의 ‘정당 민주화론의 반성적 성찰 : 정당민주화인가 탈정당인가’.사회과학연구 참고

    


 - 신자유주의, 노동의 후순위에 쐐기를 박다.


마가렛 대처, 로날드 레이건을 필두로 세계에 전개된 신자유주의의 바람이 한국에도 매섭게 불어닥쳤다. 피해는 고스란히 서민과 노동자에게 이어졌다. [출처 : 김용택의 참다운 이야기]

     

 1997년 금융위기를 겪으면서 한국의 경제 체제는 대변혁을 겪는다. 기존의 국가 주도의 경제계획체제는 완전히 무너지고 김영삼 정권 이래 조금씩 추진되기 시작한 ‘세계화’ 즉 신자유주의의 물결이 급격하게 한국 경제의 판도를 바꾸기 시작했다. 자유주의적 성향의 진보정권은 한국 경제를 살리기 위해 구조 개혁을 실시하면서 신자유주의를 받아들였다. 재벌 개혁은 흐지부지 된 반면, ‘비정규직의 증가, 파견 근로직의 확대, 정리 해고의 유용성’ 등이 사회에 뿌리를 내렸다. 불균형한 구조에서 고통 받던 노동계는 더욱 상처가 깊어졌다.

 진보 정권 10년 동안 만족스럽지 못한 경제 성장과 증가한 사회 양극화는 진보 정권에 대한 국민들의 배신감을 일으키기 충분했다. 진보 정권에 대한 심판으로 국민들은 다시 보수 정권의 재집권을 선택했다. 하지만 그들 역시 양극화를 심화시킬 뿐이었다. 법인세는 낮아졌고 말 뿐인 복지정책에 양극화 개선의지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양극화’는 힘없는 노동계의 상징이자 동시에 더욱 강력해진 자본 권력의 상징이다. 촛불의 힘으로 들어선 현 정부에 와서야 최저임금 인상을 시작으로 노동계에 대한 배려가 시작되었으나 여전히 비정규직 감축이나 파견 근로직 문제를 해결하려는 구조적 움직임의 노력은 미미한 편이다. ‘택배 기사가 과로로 죽었다!’ 라고 기업 앞에 속 시원히 주장할 수 없는 노동계의 형편에는 한국 현대사가 만든 기업과 노동 간의 불균형한 우열관계가 숨어있다.      


** 손호철의 ‘촛불혁명과 2017년 체제 : 박정희, 87년 체제, 97년 체제를 넘어서'. 서강대학교출판부 참고

     


 다시 대한통운의 택배노동자 이야기로 들어가 보자.

 ‘책임지지 않으려는’ 기업이 말하는 자율 물량 설정과 분류 기계에 도입은 일부는 맞고 일부는 틀린 이야기다. 택배노동자의 삶에 가까이 다가가면, 기업과 노동 간의 불균형한 우열관계에 숨겨진 이야기가 들린다.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전하기 전에 불균형 구조가 형성된 역사를 설명한 것도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조금 더 귀 기울여 듣기 위함이다.

 이 글 서론에 인용한 같은 기사에 따르면 택배 노동자가 한 택배 당 받는 돈은 단돈 ‘700원’이다. 자율 물량 설정을 하더라도 택배 노동자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하루에 250개 이상의 물량을 감당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말만 ‘자율’일 뿐, 물량은 정해져 있는 셈이다. 자동 분류기가 도입되어 일이 편해진 것은 사실이나 그럼에도 실 근무 시간이 높다는 것이 택배 노동자들의 주장이다. 여전히 자신에게 해당되는 택배를 고르는 작업은 택배 노동자들이 직접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기업은 자신들이 배려하고 있음을 너무나도 쉽게 주장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과로’의 기준을 자신들의 시각에서 정하고 있다는 기분을 지우기 어렵다.


 물론 우리 사회가 CJ 대한통운 사례만 가득한 것은 아니다. 사회가 이와 같은 사례들에 완전히 무관심한 것도 아니다. 최근 ‘위험의 외주화’ 아래 희생된 비정규직 노동자 ‘김용균’씨의 죽음이 산업재해에 대한 처벌 규정을 높이는 ‘김용균 법’의 통과를 이루어냈다. 김용균씨 이전의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억울하게 죽은 수많은 노동자들의 염원이 실현된 것이다. 기업 활동의 저해를 걱정하는 이야기들이 버젓이 들리는 국회에서 김용균 법은 힘들게, 힘들게 통과되었다.


일하다 죽을 수도 있다면 그렇게 죽음으로 내모는 것이 외주화라면 우리의 시선은 어디로 향해야 할까. 떨궈진 노동자의 시선을 차마 마주할 수 없다. [출처 : 오마이뉴스]

 

결국 변해야하는 것은 사회 분위기다.
노동의 목소리에 진심으로 귀 기울일 수 있는 사회 분위기로.


 하지만 산업재해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는 것과 산업재해로 인정하는 것은 조금 다른 문제다. 법과 제도가 산업재해의 처벌 기준을 높인다하더라도 애초에 노동자들이 받는 피해가 산업재해로 인정되지 않는다면 법 제정의 의미가 줄어들기 때문이다. 대한통운 노동자가 그러하였듯이 기업의 잘못(산업재해)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받아들여지는 것이 불가능한 사회라면 산업재해의 처벌을 강화하는 것은 무용지물에 가깝기 때문이다. 특히나 노동자들이 산업재해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기업에 대항해 파업이라도 하면, 기업이 막대한 금액의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일이 빈번하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노동계는 속시원하게 산업 재해라 주장하기도 어려운 형편이다.

 잔인하게도 역사적으로 노동계는 지는 것에 익숙하다. 자욱한 섬유 먼지 속 근무 환경을 견디지 못해 자신의 몸을 불태우고 나서야 노동 환경은 한 발자국 나아졌다. 그만큼 불균형한 기업과 노동의 관계를 정상화 시키는 것이 힘들다는 이야기다. 다시 한 번 냉정하게 말하자면 기업이든 노동자든 자신의 이해관계가 뚜렷하기 때문에 한 측의 주장만을 따르는 것은 분명히 위험하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오랜 기간 노동자의 주장이 조금 더 편협하다고 인식해 왔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우리 사회는 오랜 기간 노조나 노동 세력의 주장을 따라 얻게 되는 이익은 일부 노동자에게 국한되어 있다고 학습해왔다. 이와 같은 배움이 확실히 검증된 이야기로부터 비롯되었는지 판단하기도 전에, 또 한 명의 김용균씨가 죽었고, 또 한 명의 구의역 비정규직 노동자가 죽었다. 컨베이어 벨트는 상품이 오르는 자리지 사람이 끼어죽을 자리가 아니지 않는가. 일을 하다 사람이 죽었다면 그 사람을 고용한(파견 근로로 계약하던, 최고 사용자에게)기업에게 그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럼에도 왜 우리는 노동자의 죽음에 대한 목소리보다 기업의 분기별 성적에 대한 우려를 더 많이 듣게 되는 것일까. 지금 우리는 혹시 과감히 역사의 경로에 벗어나 기업과 노동 사이 균형추를 점검해야 할 때는 아닐까. 오늘만큼은 시선을 택배 노동자의 담고 싶은 이유다.                   

매거진의 이전글 조금 시간이 걸려도..! (2)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