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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혁재 Mar 07. 2021

구 러시아 공사관과 고종의 길

고종이 다녔을 가능성이 매우 높은 길

서대문역 5번 출구로 나와 광화문역 방향으로 올라왔다.


하얀 경향신문사 건물이 보였다.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한적한 2차선 도로를 가로질러 반대편 인도로 발걸음을 옮겼다. 프란치스코 교육회관, 이화 정동빌딩을 차례로 지나 캐나다 대사관에 다다랐다. 왼편으로 오르막이 나있다. 이 오르막을 오르면 정동공원이 있다. 목적지다. 구러시아 공사관에 왔다.


구러시아 공사관은 6.25 전쟁을 거치면서 심하게 파괴됐다. 3층 전망탑을 복원했는데 사진으로 봤을 때 분명 하얀 탑이었다. 정동공원이 보여 공원 언덕 위에 있어야 될 하얀 탑을 찾았다. 푸른 천이 시야에 들어왔다. 정동공원으로 발걸음을 빨리했다. 3층 전망탑이 있긴 했다.



정동공원 가운데 팔각 쉼터는 코로나 때문인지 못 들어가게 '안전제일' 테이프가 쳐져있었다. 덕분에 보수 공사 중인 전망탑과 어울리는 공사장스러운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조금 허탈했지만 언덕에 올라 3층 전망탑을 더 가까이서 보기로 했다. 꽤 높은 언덕에 올라 푸른 천에 가린 전망탑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전망탑 주변에 구러시아 공사관 터가 있다고 하는데 펜스가 높이 쳐져있어 안을 들여다보진 못했다. 그래도 언덕에 오르니 서울시내가 훤히 보였다. 남산타워가 선명히 보였다. 한화 건물을 보고 시청 방향을, 코웨이 건물을 보고 충정로 방향을 읽었다.



지금이야 빌딩들이 공사관보다 높지만 1800년대 후반, 1900년대 조선은 달랐다. 한국콘텐츠진흥원 "구한말 정동 이야기 러시아공사관" 편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서울 안에 자랑할만한 건축물이나 나머지 열강이 지금까지 보여준 그들의 우세한 상징적 힘을 과시하는 건물도, 도시 서쪽 언덕에 위치한 프랑스와 러시아의 화려한 새 공사관저보다 강력한 인상을 주지는 못했다. (중략) 마치 수도와 황제의 궁전이 러시아와 프랑스의 깃발 아래 직접 보호를 받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지그프리트 겐테, 권영경, <독일인 겐테가 본 신선한 나라 조선, 1901> (책과함께, 2007), 200쪽)  


1901년 조선을 찾은 독일 기자 지그프리트 겐테가 구러시아 공사관을 보고 말했다. 언덕에만 올라서도 이 정도 시야를 자랑하는데 3층 전망탑에 오르면 얼마나 더 잘 보일까. 그 위에서 바라보는 낮은 조선 집들이 우스워보였을까 착잡한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공사관이 위치한 언덕에서 왼쪽, 지도 상으론 동쪽에 작은 문이 있다. 작은 문으로 들어서면 새로 복원해 깨끗한, 밝은 색 벽이 양쪽에 길게 서 있는 길이 나온다. 100m가 넘는 이 길이 '고종의 길'이다.


폭이 좁다고 느껴지진 않았다. 앞에서 4명의 여성이 나란히 걸어왔는데 지나갈 공간이 있었다. 길을 따라 걷다 보면 갈래 길이 나온다. 오른쪽 길 끝은 막혀있다. 갈래가 시작되는 지점 오른쪽 바닥에는 무엇인가 있었던 터가 나온다. 돌더미. 그 갈래 길로 들어서진 않았다.



왼쪽 길 끝에 경찰이 서있었다. 그 길을 따라가다 보니 왼편으로 내려가는 길이 나있다. 조선저축은행 중역사택으로 내려갔다가 유턴하듯 돌면 덕수궁 후문 방향으로 나가는 문이 있다. 고종의 길이 끝났다. 구러시아 공사관에서 덕수궁 후문까지 빠르게 갈 수 있는 지름길이다.

공사 중인 공간이 너무 많아 사실 풍경을 즐기긴 어려웠다. 공사관 전망탑이 공사 중이어서 고종의 길을 기대했더니 길과 가까이 자리 잡은 조선저축은행 중역사택, 덕수궁 선원전 터도 공사 중. 고종의 길을 빠져나와 덕수궁 돌담길을 보면 또 공사 중이란 팻말이 있는데 돈덕전이 복원 중이다.


그래. 복원되면 다시 오자 마음먹고 오늘 본 장면들을 정리할 겸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커피 한 잔 마시면서 고종의 길을 검색했다.  


조선일보가 2018년 11월 30일 보도한 "高宗도 모를 '고종의 길'"을 보고 안 누를 수가 없었다. 기사를 보아하니 문화재청이 아관파천 때 고종이 이용한 길이라 고종의 길이라 이름을 붙였는데 근거가 부족하단 내용이었다. 카메라를 가방에서 주섬주섬 꺼냈다. 고종의 길 안에 있던 안내에는 뭐라 써져 있는지 다시 찾았다. 고종이 이 길로 덕수궁과 공사관을 오갔다고 적혀있었다.


고종의 길을 가려고 마음먹었던 이유는 고종이 이 길로 아관파천을 했다는 글을 봐서였는데. 손을 이마에 갖다 대고 관자놀이를 여러 차례 눌렀다. 무엇이 사실인지 확인을 해야 오늘 답사가 헛되지 않을 것만 같았다. 집에 돌아와서 문화재청이 조선일보 보도에 어떻게 답했는지 찾아봤다.


보도자료 핵심은 사료를 잘 참고해서 만든 길이란 내용이다. 문화재청은 "아관파천 당시 고종이 피신하였던 길은 지금도 논란이 있지만 「덕수궁 복원정비 기본계획」(2005년) 용역 시 전문가들이 모여 발굴된 지도를 검토할 당시에도 러시아, 영국, 미국 공사관 경비들이 상호 경계를 서서 일본군의 침입이 불가능한 이 길을 아관파천 길로 추정하였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덕수궁 복원정비 기본계획을 찾아봤다. 이 길 같은 모양이 지도에 나와 있는지 내 눈으로 꼭 확인하고 싶었다. 내가 알아볼 수 있는 지도 자료가 두 개 있었다. 이 기본계획 431쪽에 "허영환, 정도 600년 서울지도, 범우사, 1994"라는 출처를 밝히며 지도 사진을 첨부했다.

1900년 서울지도인데 중앙의 경운궁이 덕수궁이다. 인화문도 보인다. 경운궁 위로 영국 공사관(영관)이 보이고 서쪽으로 미국공사관(관미), 러시아공사관(관아)이 보인다. 관아가 내가 다녀온 구러시아 공사관이다. 관아에서 경운궁 서쪽 문으로 이어지는 길이 하나 보이는데, 혹시 이 길이 고종의 길이 아닐까 생각했다.


고종의 길로 공사관에서 걸어 내려왔을 때 덕수궁 후문이 가장 가깝기도 했으니 단순화해서 지도에 옮겼다고 가정하면 저 길이 고종의 길은 아닐까 상상했다. 그다음 지도는 조금 복잡해 구글어스와 비교했다.


(왼쪽) 1903년 경부철도주식회사발행, 경성도 1903 동경. 덕수궁 복원 정비 기본 계획 435쪽


구글어스와 비교해 보니 1903년 지도가 꽤나 정교했다. 미국 공사관과 중명전이 위치한 부지가 끝이 뾰족해서 지도에서 찾기 쉬운데 이 부분이 1903년 지도에도 잘 나타나 있다. 그곳을 기준으로 지도를 나름대로 비교해보니 구러시아 공사관, 영국 공사관, 덕수궁 돈덕전 위치를 가늠할 수 있다.


중요한 부분은 고종의 길 위치다. 고종의 길의 끝은 덕수궁 돈덕전 모서리와 맞닿아야 한다. 그런데 1903년 지도에는 구러시아공사관과 덕수궁 돈덕전을 사이에 길이 없다.


다시 문화재청 보도자료를 봤다. 해방 이후 지도가 첨부됐다.

여기 표시된 King's road가 고종의 길을 증명하는 자료라고 문화재청은 설명했다. 문화재청은 이 지도를 대한제국기에 제작된 지도로 착각했다고 인정하면서 해방 이후 지도라고 정정했다. 해방 이후 지도를 보면 고종의 길이 끝나는 지점에서 돈덕전이 바로 보일 수 있다. 고종의 길에서 나오면 세 갈래 길이 나오는데 밑으로 내려가는 길과 정면으로 가는 길이 만든 모서리에 돈덕전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문화재청은 "러시아공사관에서 바라본 '고종의 길'" 이란 사진을 첨부했다. 1900년대 초 모습이다.  

이 사진으로 모든 논란이 종결됐음 좋겠지만 사진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먼저 1900년대 초라면 계속 언급한 덕수궁 돈덕전이 고종의 길 끝에 보여야 한다. 정확하게는 러시아 공사관에서 내려다본다 가정했을 때 고종의 길 끝 지점에서 오른편에 돈덕전이 보여야 한다. 돈덕전이 만들어졌다고 추정되는 시기가 1901년이다. 1900년대 초 사진이라 했으니 돈덕전이 보이면 명확하겠는데 아쉬움이 남는다.


덕수궁 복원계획 2005. 돈덕전 조감도. 뾰족한 구조물이 보인다.


돈덕전이 서양식 건물이라 눈에 띌 수밖에 없다. 조감도를 보면 뾰족한 모양의 건축양식이 인상적이다. 눈에 확 들어왔을 텐데 1900년대 초 고종의 길 사진에 돈덕전이 없어서 속이 시원하지 않다.


또 다른 의문점은 "water tower"다. 문화재청이 참고했다는 해방 이후 지도에는 고종의 길 중간 부분에 동그란 점이 표시됐고 "water tower"라고 쓰여있다. 보도자료에도 "급수탑 (철거됨)"이란 표현이 있다.

 

그럼 이 급수탑은 언제 세워진 걸까. 1900년대 초 저 사진을 찍었을 땐 없었다가 해방 이전에 세워졌고 해방 이후 어느 시점에 다시 철거한 걸까. 1900년대 초 사진을 공개하면서 구체적인 정보를 함께 제공해줬다면 고종의 길을 다녀오고 찝찝한 마음이 싹 사라졌을 텐데 여러모로 아쉬웠다.


1992년 12월 29일 조선일보에 "러시아 군인 한국기행<1885~1896>"이란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아관파천을 다뤘다. 러시아 군인의 기록에 의존한 듯 보인다. 기사 일부를 발췌했다.


"1896년 2월 11일 오전 7시30분 공사관 동쪽 문 앞에 두 개의 가마가 도착했다. 당시 공사관에 머물고 있던 이동진은 왕이 이 공관으로 온다는 것을 미리 알고 이른 아침에 우리에게 그 소식을 전해주었다. 쪽문은 즉시 열렸고 공관 앞으로 두 개의 가마가 다가왔다. 한 가마에는 궁녀 한 명과 왕이 타고 있었고, 다른 가마에는 궁녀와 세자가 있었다. 엄한 감시를 받고 있었던 왕은 궁녀들과 장교 이기동의 도움이 없었다면 탈출할 수 없었을 것이다. 탈출은 이렇게 이뤄졌다."


동쪽 쪽문. 정동공원에 도착하고 공사 중인 3층 전망탑이 있는 언덕에 올라 왼쪽을 바라봤을 때 있었던 문이 떠올랐다. 기사를 읽고 고종의 길을 알리는 그 문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문화재청 보도자료가 말했듯이 이 지역이 미국, 영국, 러시아의 공사관이 있었던 탓에 각 공사관을 지키는 병사가 주둔했다. 고종이 이 지역으로 도망쳐야 적어도 일본군의 추격을 막을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았을 테다.


이때 즈음 의병이 서울에 많아져 러시아 공사관이 병력을 늘렸다는 내용이 조선일보 같은 기사에 담겼다. 고종이 이 길로 다녔을 근거를 보강해준다. 왕의 길이란 표현이 해방 이후 지도에도 있으니 근거가 없다고 보기도 애매하다.


힘없는 나라의 왕이 다른 나라 공사관들이 위치한 길로 피신했던 사실은 치욕스럽다. 치욕스럽기 때문에 더 처절하게 사실 검증을 했어야 했다. 아픈 역사에 상상이 더해지면 더 치욕스러운 역사로 변할 수도 있다.


사실은 여지가 없다. 그래서 받아들이면 된다. 하지만 고종의 길은 정확한 근거가 없기 때문에 이 길 위에선 아관파천의 역사보다 이 길로 고종이 왔느냐 마느냐가 더 중요해질 수 있다. 부정확함이 만드는 부끄러운 혼란스러움이다.


정확한 기록이 없었다면 고종의 길이란 이름은 나중에 지었어야 하지 않을까. 정확히 말하면 고종이 다녔을 가능성이 높은 길이다. 그 길을 걸으면서 '고종은 어떤 기분이었을까' 상상했던 불과 몇 시간 전의 나는 어쩌면 바보 같은 상상을 한 것일지도 모른다.


안내 표지판은 고종이 덕수궁과 러시아공사관을 다닐 때 이 길을 이용했다고 한다. 이 말은 믿어도 되는지 혼란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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