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리 나가 주는 게 나한테 좋긴 하지 할 일이 많아"
노량진 고시원 골목에 위치한 한 서점. 고시원 두 곳이 모여 있는 건물 2층의 서점으로 발걸음을 빨리했다. '새로 뽑힌 대통령에게 시민들이 바라는 건 무엇이 있을지' 인터뷰를 따는 임무를 받고 노량진에 도착해 무작정 서점을 검색해 찾은 곳이다. '취업 시장 최전선의 사람들을 한 걸음 뒤에서 바라보는 사람에게 취업 준비생들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보는 것도 의미 있겠다'라고 막연히 생각하며 서점 문을 경쾌하게 열었다.
책장과 가판대엔 책들이 빼곡했다. 만화방에서 자주 보던 움직이는 책장을 옆으로 옮기면 뒷 책장에 또 책들이 빼곡한 풍경, 서점이다. 한 켠에는 제본 작업을 할 수 있는 공간이 따로 마련돼 있었는데 복사기는 쉴 새 없이 빛을 좌우로 뿜어댔고 연신 옆구리에서 복사 결과물을 토해냈다. '철컥철컥' 소리가 요란할 때 괜히 사장님 시간을 빼앗는 건 아닐까 쭈뼛거리다 "사장님 이제 인터뷰해도 될까요?"라고 묻자 시원하게 돌아온 대답이 이 글의 시작이다.
"사장님 서점 일 하면서 얼마나 학생들을 봐오신 거예요?"
"우리가 2천 년대 초부터 했으니까 거의 한 20년 정도 돼 가죠. 그래서 젊은 친구들을 많이 봤죠."
카메라 앞에서 질문에 대답하는 사장님은 당황한다거나 우물쭈물하지 않았다. 능숙하게 오래 해오던 일인 것 마냥 말들을 이어나갔다. 베스트셀러나 소설책은 오히려 보기 어렵고 수험서가 책장과 가판대에 빼곡한 서점의 한가운데 선 사장님이 답변을 이어나갔다.
"이번에 대통령이 바뀌게 됐잖아요. 사장님은 이번 대통령에게 바라시는 점이 있을까요?"
"여기서 있다 보면 젊은이들을 많이 보게 되는데 그 젊은이들이 좌절하고 또 극복해가는 과정들을 보면서 우리 어른들이 특히 정치인들이 잘해주고 그 판을 잘 만들어줘야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많이 하고 있어요."
방송 기사에서 인터뷰는 사실 몇 줄 나가지 않는다. 더군다나 이번 기사는 시민 여러 명의 인터뷰가 들어갈 예정이라 사장님의 말 실력 덕분에 이미 기사는 풍부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사장님의 편안한 음성 때문일까. 조금 더 이야기를 듣고 싶단 꽤나 즉흥적인 욕심이 생겼다. 손목시계를 슬쩍 바라보고 다시 사장님과 눈을 맞춘 뒤 질문을 계속했다. "사장님한테 너무 청년들 이야기만 물은 것 같아서요!" 이제 젊은이들 말고 서점 사장님으로서 이야기를 해달라고 졸랐다. 코로나가 심했으니까 매출이 줄었다거나 사장님도 힘든 일이 있지 않았을까.
"저는 서점을 해서 사실은 행복했다고 하는데"
힘들지 않냐는 질문에 돌아온 행복이란 단어. 몸이 순간 찌릿했다. '왜, 뭐가?' 쫑긋해진 귀는 사장님의 다음 말들을 더 집중해서 주워 담기 시작했다.
"저희들은 수험 전문이에요. 젊은 친구들이 많이 왔다 갔다 해요. 그런 친구들이 이제 학교에 입학해서 우리한테 인사를 온다든지. 승진을 해서 승진 책을 사기 위해서 와서 '사장님 옛날하고 똑같네요'라고 이렇게 이야기할 때 가장 기분이 좋아요."
마스크를 써서 그런지 사장님의 동그란 검은 테 안경이 눈에 더 잘 들어왔다. 그 동그라미 안으로 보이는 눈은 환하게 웃는 마스크에 가려진 입을 연상시키기 충분했다. 한 청년이 승진 책을 사러 와서 사장님과 만담을 나누는 그림이 머릿속에 순식간에 그려졌다.
"그래서 젊은이들이 더 이상 이런 방황을 안 할 수 있도록 어떻게 잘 만들었으면 좋겠는데... 그건 결국 일자리가 부족하기 때문에 그런 거 아닌가요 그죠. 더 신경 써서 젊은이들한테 희망을 줄 수 있는 그런 세상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사장님 이야기를 해달라고 했지만 결국 또 젊은이들 이야기로 돌아왔다. 처음 인터뷰를 요청할 때도 '사장님 요즘 장사 안 돼서 힘들지 않냐고 그런 힘든 점들 말씀해주시라' 할 때는 할 말 없으시다더니, '그럼 사장님께서 가장 취업 준비생들 많이 봐오셨을 텐데 그분들 위해서 하실 말씀은 있지 않느냐' 하자 그러면 괜찮다고 하시던 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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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이란 단어가 어색하게 느껴지곤 했다. 나이 든 사람과 생각을 나눌 자리는 많지만 자리가 끝난 뒤 '공감이 가는 대화를 했다'라고 느낀 적은 많지 않다. 보통 내가 경험해보지 못했거나 알지 못한 내용을 설명받는단 느낌이 강했다. 그런 대화의 마무리엔 내가 상대로부터 무언가를 배웠거나 배움을 거부했거나 둘 중 하나였다. 듣기는 많이 들었는데 그 배움에 대한 내 생각은 어떤지 말할 기회는 적다 보니 배웠다면 그날 대화 상대는 지식인이고 배움을 거부했다면 남이 되는 시간들이었다.
때로는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이 '어리구나'라고 느끼게 하는 대화도 있다. 그게 꼭 대화 내용의 측면만은 아니고 '저 사람이 저런 말을 하게 한 생각이 보일 때'도 그렇다. 가령 수습 기간 지구대 파출소를 돌다가 친해진 형님에게 '정말 쉽게, 너무 쉽게 돈을 여러 차례 빌려달라고 하는 지인이 미워 연락을 끊었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조용히 듣던 형님이 "오죽하면 그랬겠어, 나쁜 마음은 아니었을 거다." 한 마디 했다. '그러게 한 번 더 생각하고 그 말 안 뱉었다면 좋았을 텐데'라고 짧은 후회가 들게 하는 한 마디. 그 순간 형님은 어른이 됐다.
수험서가 가득 쌓인 가판대 뒤에 편한 자세로 서서 본인 힘든 이야기를 해달라고 해도 다시 젊은이들 이야기로 돌아온 사장님에게 어른이란 말이 너무 어울렸다. 인터뷰를 시작하기 전에는 생업이 바쁘니 빨리 끝내자고 툭툭 말씀하실 때나 파본이 잘못 들어왔다고 난감해하실 때는 떠오르지 않았던 단어다. 하지만 '서점을 하면서 힘들지 않았냐'는 질문에 '찾아오는 젊은이들 덕분에 행복했다'는 사장님의 답변을 들었을 때는 '진짜 어른이시네'라고 조용히 되뇔 수밖에 없었다.
"말을 잘했나 모르겠네"
인터뷰가 끝난 뒤 쑥스러워하시는 사장님에게 다가가며 말보다 악수를 먼저 건넸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정말 배웠다는 뜻을 전하고 싶어 손을 쥐었다. "너무 잘해주셨어요 사장님 진짜 감사합니다. 그리고 꼭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정말 다시 찾아가 그 사람의 생각을 알고 싶은 어른을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