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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llie 수현 Mar 27. 2019

[식食] 한인마트의 미학

보스턴에서 먹고 살아요 (1) - 없는 게 없는 곳의 마법

처음엔 시큰둥했다. 새로운 지대를 꿈꾸며 새 세상에 나아갔다면 새로움의 최대치를 영접해야지, 경험량을 늘리기도 아까운 시간, 굳이 향수를 자극하는 '과거'의 그 무언가에 집착해서 돌이키고 추억을 곱씹는다는 말인가. 음식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30여 년간 익숙해진 영역을 떠나 새로운 영역으로 향하는 데 있어 가장 기본적인 욕구를 채워줄 법한 의.식.주는 유학을 오면서 내게 가장 중요한 화두 중 하나. 나뿐만이 아니라 유학, 이민자 누구나가 그럴 것이다. '옷'은 해외이삿짐에 아쉽지 않게 넉넉히 넣었으니 비교적 걱정할 바가 아니었고 '주'에 해당하는 고민거리도 상대적으로 최저치 중 걱정 중 하나. 남편이 살던 집에 그대로 들어왔으니 사는 곳이야말로 초기 정착에 혼란을 최대한 줄이는 데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살아갈 동네와 집의 구조, 집을 둘러싼 전반적인 주거환경과 이웃 분위기를 알아보는 건 일찌감치 정착해있던 남편의 몫이 되었던 탓에 (그는 많이 고생했겠으나) 나는 그의 고생에 고마움을 표하며 고개를 돌릴 수 있었다. 이래저래 혼란범벅이었던 내게 시간과 감정적 에너지 소모를 줄여줬으니. 하지만 먹는 것은? 뭐, 한국에서도 한식을 안 먹는 나인데 그게 뭐라고. 모두들 한국음식이 그리울 거니까 많이 챙겨먹고가라고 했지만 나의 주요 이슈에서는 저 뒤로 밀려나있었다.


미국에 온 뒤 남편이 가장 먼저 데려갔던 '공부하기 적당히 좋은' 동네 카페 한 곳. 커피 한 잔에 빵 한 쪽이면 충분한 하루.


나 원래 한식안좋아해
커피랑 빵 맛집 많잖아. 찾아다녀야지.


고백하자면 나는 밥을 잘 먹지 않는다. 삼시세끼를 '안' 챙기는 것은 물론이고, 아침밥, 저녁밥 할 때의 그 '밥'이라는 명사가 아니라면 진짜 '쌀밥'은 먹는 횟수를 손에 꼽을 정도. 이쯤하면 이글을 읽고 있을 독자들에게도 잔소리가 스물스물 튀어나올 법하다. "아니 아무도 뭐라고 안그래?" 당연히 누구 하나 편히 내버려두지는 않는다. 집에서든, 회사에서든, "밥을 먹어야지, 밥을"이라는 소리를 늘상 달고살았지만, 타지에서 방송생활을 이어오며 살다보니, 밥보다는 간단하게 커피와 과일, 혹은 빵으로 대체하는 all day 브런치 일상이 나날이 이어졌고, 간식 군것질을 워낙에 좋아하하는데 밥까지 더불어 먹기에는 조금 과하고 그렇다고 군것질을 포기는 못하겠고, 결국엔 먹는량 총량 보존의 법칙에 기준하여, 밥을 포기하는 지경에 다다른 것이다. 아메리카노와 달콤한 쿠키 한 조각, 담백한 라떼 한 잔에 베이글과 크림치즈, 때때로 카라멜 향 풍성한 마끼아또 한 잔에 사각사각 샌드위치까지, 이리도 내 식욕을 채워줄 아메리칸스타일의 식사옵션이 많을 진대, 굳이 한식을 찾아 헤맬 필요가 있을까. 미국 여행을 때떄로 잠시 다녀갈 때도 현지의 한식당은 '반가운' 한글간판에 불과했을 뿐 내 식욕을 유혹하지는 못했다. 나는 한식을 좋아하지 않는다. 찾지 않을 뿐더러 잘 먹지 않는다. 혼자 자취생활을 이어오던 집에는 밥솥이 필요하지 않았고, 찌개와 국물요리, 심지어 온 국민의 소울푸드, 라면조차 심지어 싫어하기까지 한다.


한인마트에 가지 않아도 발견할 수 있는 '신라면' 반갑기는 반가운데, 가만..."나 한국에서도 라면 안먹어!"


밥, 국물, 찌개보다는 예쁜 케이크와 정갈한 라떼거품 한 모금이 내 소울푸드라니까


보스턴에 온 지 사흘째쯤 되던 날, 남편은 일이 끝나고 집에와서 나를 한인마트에 데려갔다. 혼자 짐정리하고 집에서 내리 시차적응을 하고 있던 내가 무료해보였는지, 뭔가 입이 심심하다고 습관처럼 말을 내뱉고 있는 내가 안쓰러워보였는지, 돌발적인 그의 결정. 한국의 맛을 구경시켜주려는 눈빛이 다소 의기양양해보였다. 한식보다 스타벅스 커피가 더 반가운 나를 굳이 뭐, 차라리 별다방에 가자... 고 이야기하고 싶었으나 갑작스레 떠오른 호기심을 지울 수는 없는 법. 도대체 미국의 한인마트는 어떻길래. 왜. 어째서.


자그마한 한글 간판을 달고 있는 한인 식재료 마켓에 도착. 보스턴 도심에야 큼지막한 한인마트 대형체인점이 있다는 사실을 익히 들고 알고는 있었지만, 다운타운에서 한참 빠져나온 외곽에도 자그마한 한인상점이 있을 줄이야. (주거생활에서 한번 더 언급하겠지만, 정확히 내가, 우리 부부가 살고 있는 곳은 보스턴 중심 다운타운에서는 약 30분 정도 떨어진 Grater boston 북부지역이다.) 미국에 도착한 지 얼마되지 않았지만 어딜가나 '한국'의 흔적이 빼꼼히 고개를 내밀고 있음을 내내 체감하시 시작하던 시기가 바로 이때쯤. 보스턴 다운타운을 비롯해 캠브리지 지역에야 워낙 유명대학들이 몰려있고 한국 유학생 수요가 꽤나 있을 법하니 한식당이고 한국마켓이고 그 존재의 이유에 충분히 끄덕일 법하지만, 오호 여긴 거리감이 좀 있어서 한국인이래봐야 우리 부부 비롯 몇 안되리라 지레짐작했다. 미국생활 초보자의 명쾌한 오해였다. 자그마한 한인마트에 다녀온 뒤로 스타벅스든, 동네 카페에서든 우연히 의도치 않게 마주한 한국인 어른들만 10여 명이 넘어섰으니. 간판의 배색이 볼품없었고, 붙어있는 이름까지도 지극히 촌스러웠으며 마트안의 자잘한 홍보문구들마저 90년대 동네슈퍼를 연상케할 만큼 초라했으나, 있을 것은 다 있던 그곳. 신세계였다.


인천공항 라운지에서 마지막으로 주섬주섬 먹었던 유일한 '한식'은 RICE CAKE  이쯤하면 말다했다. 빵순이 떡순이


눈에 담는 것만으로도


쇼핑욕구를 채우는 듯한 기이한 체험을 했다.


새로운 세상이 열렸다. 미역이며 나물이며, 고추장된장은 물론, 한국판 때밀이 수건이며, 있을 만한 건 웬만하면 다 보유하고 있는 이곳이 바로 이름하야 한인마트. 간식에 웃고 간식없음에 우는 나에게 한국표 과자들은 보기만 해도 꿀맛, 그 자체였다. "어머 홈런볼이야. 어머 초코송이가 초코보이래" 과자 이름만 봐도, 혹은 한글이름을 영어이름으로 귀엽게 바꿔 새긴 자태만 봐도 어쩜 이렇게 반가운 건지. 장바구니에 쏙 넣어 결제하지 않았는데도 눈에 담는 것만으로도 쇼핑욕구를 채우는 듯한 기이한 체험을 했다. 옥수수강냉이 6.95달러! 한국에서 지낼 땐, 집 앞 아파트 단지에 주마다 온 뻥튀기 트럭을 도도하게 또각또각 지나쳤건만 저게 뭐라고 날 유혹하려드는가. 작은 봉지 뻥튀기 소박한 한 봉지가 왜 그리도 입맛을 돋우던지. 별다방 라떼 한 잔 가격을 뛰어 넘어서는 뻥튀기 한봉지에 지렁이 기어가는 글씨로 서툴게 붙어있는 가격표. 별것도 아닌 소박한 풍경에 괜히 잔잔했던 심장에 파도가 한판 일었다. 울 만한 일이 아닌데 눈물이 맺히는 상황은 바로 이런 것이었다. 배고픔인지, 이 모든 걸 아무렇지 않게 지나쳤던 과거 나에 대한 억울함인지, 소박한 식재료들 귀한 줄 모르고 지냈던 나에 대한 반성의 징표인지, 알 수 없는 울컥거림이 한인마트 공기를 서서히 채우는 듯했던 그 순간.


참으로 다양한 먹거리에 감탄했지만 그렇다고 많은 걸 사지는 않았다. 아마 남편의 의도도 그러했으리라. 집에 식재료가 떨어진 것도 아닌데 이곳에 굳이 데려왔던 건, 물욕과 식욕의 차원은 아니었겠지. 나 역시 한국표 그 무언가를 남편에게 '사달래기 위한' 목적으로 따라간 게 아니었듯이, 남편 또한 알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지친 아내에게 잠시나마 반가움이라는 재료로 마음의 혼돈을 '달래기 위한' 작전은 아니었을지.



마음의 혼돈을 달래기 위한 작전은 아니었을지


한 손에는 붕어 아이스크림을 들었고, 한손에는 자그마한 포장이 귀여운 초코과자를 집었다. 역시 이곳에 와도 끝나지 않는디저트 사랑이여. (이 작은 사례에서도 미뤄보건대, 사람의 습관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있을 때 잘하라는 말은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닌 듯하다. 매일보던 사람의 부재가 그리움을 극대화시키듯, 흔히 보던 요리와 그에 상응하는 식재료들은 좋아하지 않는 것들, 그러니까 똑똑히 말해 내 취향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보고싶은 마음, 간절히 찾고싶은 마음을 콕콕 찔러, 감히 불러일으켜 세웠다. 이런 추세라면 제 아무리 싫어했던 라면마저 호기롭게 봉지 뜯는 날이 오겠는 걸. 넉넉히 쌓인 수많은 라면봉지와 국수 컵, 만두포장과 전자레인지용 반조리 식품들에 마음을 단단히 빼앗기고 평소 입에도 대지 않던 김치와 새우젓 포장이 반갑게 느껴진 건 기분 탓인가. 집에 돌아와 자리에 누웠는데 미처 장바구니에 담지 않았던 짜장라면이 아른거렸다. 한두 개 넣어볼 걸 그랬나. 일요일은 그거 먹는 날이잖아! 선반 한 켠에 비스듬이 뉘여있던 당면도 조금 생각난다. 엄마가 한 가득 해놓고 냉장고에 넣어두었던 잡채 한 접시가 간절히 당기는 밤. 아쉬운 대로 아까 꼭 쥐고 온 붕어 아이스크림 봉지를 찌익 뜯어보았다. 아. 한국의 맛. 맛있네. 이거.


남편, 다음번엔 '사또POP'이랑 'Homerunball'을 좀 사다주겠어?
한인마트에서 가장 오래 머물렀던 코너는 단연 아이스크림이었음을 조심스레 고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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