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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llie 수현 Mar 30. 2019

당신이 전철을 잘못탔다면

[아나운서 그만두고 34가지 생활기록 - 3]


보스턴에 와서 본격적인 뚜벅이 생활이 시작되었다. 우버와 리프트 시스템에 워낙 잘 단련돼 있는 세상이지 않는가. 한국에서 카카오택시를 부르듯이 급할 땐 차를 타는 데 무리가 없었고, 버스와 지하철 연결이 꽤나 잘 되어있는 편이러서 도심 웬만한 곳을 오가는 데는 큰 불편이 없어보였다. 하지만 한국에서도 종종 갈아타는 환승구간에서 헤매곤 하지 않던가. 익숙한 내 나라에서도 "저기요, 여기 가려면 어디서 타야돼요" 묻곤 하는데 하물며 도착한 지 몇 주 지나지 않은 이곳에서야 오죽할까. 때론 역 명을 하나하나 따져보며 혹시라도 목적방향을 잘못 봤을까봐 재차 꼼꼼히 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덜컥 탄 전철이 다른 방향으로 달리고 있구나 알아차렸을 땐 어휴. 무거운 한숨이 힘없이 털썩 주저앉듯이 터져 나왔다. 아니 뭐 잘못탈 수도 있지. 회사에 늦지말아야 하는 것도 아닌데 뭐 어때. 하고 쿨하게 넘겼어야 하는데 때때로 억울했고, 조금은 오래 자책했다.


낯선 역에 도착했을 때는 승강장에 서서 타고자 하는 열차정보를 좀 더 유심히, 여러번 바라보게 된다. 초행길인 티를 내고 싶지 않아도 어쩔 수 없다. 그래야 '잘' 탈 수 있다.


꽤나 단순한 실수를 좀 한 적이 있었다. 정신만 제대로 차리고 있었다면 안 해도 됐을 전철역에서 할 수 있는 가장 1차원적인 실수. 그냥 반대방향의 전철을 타버린 것이다. 그것도 이미 몇 번을 지나왔던 익숙한 역에서 말이다. 한국에서는 특정 역 입구 어디로나 일단 계단을 탁탁 내려간 뒤에 '강남역방향으로 가는 열차'승강장으로 갈 건지, '시청역 방향으로 가는 열차'을 잡으로 반대 승강장으로 갈 건지를 선택하지 않던가. "일단 내려가면 되지" 하고 다다다닥 내려가 카드를 시원스레 찍고 입장했는데 웬걸, 내가 가려는 방향 열차 노선은 아예 희미하게 지워져 있다. 내가 들어온 입구 쪽은 그냥 특정방향만 향하는 전철만 서는 승강장이랑만 연결돼 있었다. 나, 시청역 가려고 내려왔는데 "여긴 강남역가는 열차만 정차해요" 이 상황. 아니 같은 역인데 반대방향 가는 열차는 아예 나가서 다시 입장해야 하는 거였다. 미리 사전정보만 조금 검색해봤으면 처음 관광객들도 실수하지 않을 수 있는 초보단계의 전철타기 오류. 삑삑. 정신차리자.   



보스턴 도심 곳곳을 연결하는 T 그린라인. 초록빛으로 채색된 판이 괜히 반갑다. 마치 서울 2호선 순환도를 보는 것만 같아서.


앗, 타려고 했던 열차가 서는 승강장이 아니네?라고 생각했을 때 두 가지 생각이 들었다. 첫째. 잘못들어왔으니 재빨리 다시 나가서 반대편으로 들어간다. 둘째, 이왕 돈내고 들어온 게 아까우니 이 기회에 잠깐 타고서 다른 목적지 어디라도 좋으니 들렀다가 온다. 당연히 전자를 택해야 할 것 같았지만 은근히 후자의 선택에도 조금은 미련이 남았다. 다시는 실수 하지 않을 수 있는 교훈을 얻었으니, 날아간 전철 요금쯤이야 '몇 푼 하지 않는 돈'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겠으나 (보스턴의 편도 지하철 요금은 2.75달러. 스타벅스에서 톨사이즈 아메리카노 한 잔 정도) '이왕 이렇게 된 거, 어디라도 다녀와 볼까.' 하는 10%의 미련이 머릿속에 뱅뱅. 마침 한번 가보고 싶던 카페도 있고, 식당도 있고 등등, 구실을 만들자면 뭐라도 못만들겠나. 서울시립미술관을 가려고 시청역을 가야했는데 이왕 방향 잘못 탄 거, 반대 방향 어디로라도 가볼까. 예정에 없던 구역이기는 하지만 강남역에서도 문화적 취향을 채울 수 있는 어딘가가 있겠지. 검색해볼까. 시립은 아니어도 사립 갤러리 몇 군데 있을거야. 그것도 나쁘지 않을 수 있지. 대안에 또 대안을 찾아내려는 노력들. 잠시 노선표 앞에서 서성거리다가 깔끔하게 제2의 대안을 찾지 않기로 했다. 아깝지만 가려던 길을 가자. 그렇게 뒤돌아 보지 않고 꼿꼿이 걸어나왔다. 몇 걸음을 오래 걷지 않아 제대로 된 승강장을 찾았고 가려던 곳으로 향하는 열차는 생각보다 금방왔다. 애태우지 않고 내가 제대로 찾아오길 대기하고 있었다는 듯이. 시원스럽게 미끄러지는 자태로.   


A행을 타든, B행을 타든, 두 선택 모두 가치 있는 여정을 선물했을 것임은 분명하다. 원래 타려던 열차를 타기 위해 약간의 지출변수는 있었지만, 제 시간에 내길을 찾아 시간낭비 없이 내가 걷고자 했던 여정을 이어왔다. 하지만 다른 선택을 했다면? 예정되지 않았던 구간으로 향하는 '모험' 역시 가치 있었을 것이라 상상한다. 가는 도중에 전철 안에서 인상깊은 대화를 엿들었을 수도 있고, 생각외의 맛집을 발견해서 "남편, 대박! 오늘 진짜 가장 행복한 맛을 경험했어" 라고 집에오자마자 소리질렀을지도 모를 일이다. 혹은 아무일도 경험하지 못한 채 그저 시간만 너덜너덜 버리고 피곤한 몸을 이끌고 오다가 덜컥 초봄감기에나 지독하게 걸려버렸을 지도 모른다. 어떤 경로를 택했든 기분 좋은 선택이었을 수도 있고, 제대로 망한 결정이었을 지도 모를 일.


약 10년 전에 다니던 첫 직장을 관뒀던 적이 있었다. 그 때 당시 심경을 적어둔 일기장을 얼마전 이삿짐정리를 하다가 발견했는데 닮은 이야기가 적혀있는 쪽을 발견했다.

"지하철을 타고 있다. 분명히 잘못된 방향의 노선을 타고 있는 건 알겠는데 뱅글뱅글 순환만 하고 있을 뿐 도무지 어디에서 내려야 할 지 모르겠다... 차라리 내가 타고 있는 이 전철이 강제로 종착지에 떠밀려 갔으면! 그렇다면 역무원이든, 옆에서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는 아저씨든, 그 누군가는 여기서 내려야 한다고 등을 떠밀기라도 할 텐데. 그렇다면 이 끝이 보이지 않는 깜깜한 순환선 속에서 비로소 껑충 뛰어내릴 수 있을텐데" (2009년 3월. 어느 봄 날의 일기)


당신이 전철을 잘못탔다면,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첫째, 당장에라도 내려야 한다? 차선을 찾으려 할 수록 스스로에게 비굴해지고 스스로를 더 나약하게 느끼게 될 게 뻔하므로. 둘째, 이왕이렇게 된 거 괜찮아괜찮아. 토닥토닥 즉흥적으로 새로운 방향을 찾아보며 제2의 선택에 몸을 맡기고 머리와 마음을 최선을 다해 설득시킨다? 선택에는 정답이 없다. 나는 첫 번째의 여정을 고수했으나, 여기저기 헤매고 있는 것이 일상이 되고 있는 이방인의 신분이기에 조금은 몸을 사리고 있는 관계로, (정확히 말하며 그래야할 것만 같아서) 모험심을 조금 덧대어야 하는 두 번째 경로를 호기롭게 택하지는 못했음이 살짝은 아쉬어지더라. 입사와 퇴사, 결혼과 비혼, 육아맘과 워킹맘 그 어떤 대척점에 선 선택을 할 때도 마찬가지 아닐까. 지금 타고 있는 전철, 혹은 타려고 하는 전철이 잘못된 방향임을 문득 깨달았을 때, 나는 또 어떤 마음으로 승강장에 서게 될 것인가.


향하고자 하는 최종 목적지를 잘 확인하고 열차를 타야한다. 전철도, 꿈꾸는 직장도, 결혼하고자 하는 배우자도, 나의 방향과 어긋나 있다면 낭패. 잘못탄 걸 알았다면 당신의선택은?


같은 역이지만 향하는 지점이 정반대인 열차가 교차하는 공간. 정반대 지점으로 폴짝 뛰어넘을 수는 없다. 결국은 언제라도 용감한 선택을 '하기는 해야한다' 아니면 감수해내거나.
가끔은 이미 걸어버린 계단 수가 억울해도 다시 돌아나가는 게 현명할 수 있다. 너무너무 억울해도 더 억울해지는 상황을 더 감당하는 것보다는 시간도 돈도 아끼는 셈.
원래 내가 가려던 방향으로 오길 잘했다. 차선을 찾으려 애썼다면 보지 못했을 '보스턴의 봄햇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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