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알게 된 일본인 친구(라고 적지만, 실은 열 살 이상 어린)가 있다. 남편 회사 후배의 아내. 일본 지사에서 3년을 근무하다 올 초 한국으로 들어온 그 후배는, 떠날 때와는 달리 혼자가 아닌 둘이 되어 돌아왔다. 그는 바쁜 회사일로 야근과 출장이 잦았고, 한국말이 서툰 일본인 아내는 낯선 땅에서 혼자 하루를 버텨야 했다. 그러다 지난여름 그 부부에게 작고 소중한 생명이 다녀갔다.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지난 시간 아팠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그렇게 나는 얼굴도 모르는 그녀에게 마음이 쓰이기 시작했다.
두 달쯤 전 우연한 기회에 부부가 함께 만났고, 그 후로 이따금 안부를 주고받았다. 그러다 어제는 남편들 없이 둘이서만 만났다. 한국말이 서툰 그녀와 일본어는 인사말 정도밖에 모르는 나. 말이 잘 통하지 않는 낯선 땅에서의 생활에 불안과 두려움을 고백하는 그녀를 보며, 남편의 일 때문에 한국 생활을 정리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살고 있는 리밍 작가의 책 <나는 일상을 여행하기로 했다>가 떠올랐다.
이곳에 온 뒤로 늘 긴장하고 살았던 것 같다. 길을 잘못 들면 안 될 것 같았고, 길을 잃어서도 안 될 것 같았다. 길바닥에서 서성이는 내 모습이 부끄럽고 창피하게만 느껴졌다. 하지만 나는 이방인이 아니던가. 에라, 모르겠다, 하는 심정으로 긴장의 끈을 살짝 놓자 평소와 달리 어리바리하게 굴어도 웃음이 났고, 조금만 다른 길로 들어서도 새롭게 펼쳐지는 풍경에 다시금 여행자가 된 기분이었다.
ㅡ리밍, <나는 일상을 여행하기로 했다> 가운데
일상을 여행하는 기분으로 살기로 마음먹자 불안과 두려움을 다르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그녀가 내게 물었다. "그분은 아직 일본에 계신가요? 지금은 잘 적응하고 지내시나요?" 개인적인 친분은 없지만, 가끔씩 글을 보면 작 적응한 듯하다고 말하자 그녀의 표정에 희미한 빛이 내려와 앉았다. 2년쯤 후엔 지금보다 좋아지기를 기대해 보겠다는 그녀에게 나는 웃으며 말했다. 한국에 처음 왔던 8개월 전 보다 훨씬 좋아진 지금을 생각해 보라고. 8개월 만에 이만큼 달라졌다면, 2년 후엔 굉장할 거라고. 그녀의 2년 후를 상상하다 보니 어느덧 우리 앞에 놓인 커피 두 잔과 디저트 세 개는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우리는 커다란 플라타너스와 은행나무가 가득한 길을 천천히 걸었다. 떨어지는 낙엽이 실시간으로 포근하게 쌓여가는 길을 걸으며, 일상 속에서 발견하는 반짝이는 작은 순간에 대해 이야기했다. 불안은 불안을 먹고 몸짓을 더욱 키워간다. 그러나 반짝이는 순간들은 불안보다 더욱 강력한 힘을 갖고 있다. 그러니 불안에 치우쳐 반짝이는 순간을 놓치지 않기를. 그렇게 잡아낸 반짝이는 찰나들이 오늘을 의미 있게 만들어 줄 거고, 그런 하루하루가 쌓여 우리의 삶은 더 빛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