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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페 Mar 06. 2020

첫 번째 사건 : 브레튼우즈 체제의 붕괴

행동엔 책임이 따르지 않는다 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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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류 역사상 최초로 치러진 범지구적인 전쟁이었던 1차 세계대전은 전쟁이 끝난 후에도 내외적으로 수많은 문제들을 발생시켰다. 패전국의 해체, 특히 오스만 제국의 해체 후 이뤄진 영국의 팔레스타인 지역 위임통치는 유대민족과 아랍 민족의 갈등을 조장하여 70년이 지난 현재까지 진행 중인 중동전쟁의 원인이 되었으며, 1차 세계대전이 끝난 1919년 국제 질서의 확립과 세계평화라는 거창한 명분 아래 열린 파리 강화 회의에선 베르사유 조약이 체결되었다.


   영국과 프랑스의 주도 아래 체결된 베르사유 조약은 세계평화를 도모하기 위해 열린 파리 강화 회의의 취지와는 다르게 패전국인 바이마르 공화국(현재의 독일)에 대하여 지나치게 가혹한 처분을 내림으로서 독일 국민들의 경제적 궁핍을 유발하였다. 오랜 궁핍은 독일 국민들에게 피해의식과 외세에 대한 강한 증오감, 적개심을 품게 하였고 이를 등에 업은 나치당이 집권에 성공, 정부의 독재화를 이뤄낸 아돌프 히틀러에 의해 세계는 대혼란의 시대를 맞이한다.




*생략 가능한 내용 : 베르사유 조약*

   베르사유 조약이 보복성을 짙게 띄게 된 이유는 프랑스의 강경한 태도에 있었다. 당시 미국의 대통령이었던 우드로 윌슨은 독일의 배상 책임을 일부분으로 한정 짓고자 했지만 1차 세계대전으로 500만 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한 프랑스는 전범국인 독일에 대하여 엄중한 처벌이 이뤄져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영국 대표단으로 협상에 참여한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전쟁으로 인해 지불능력을 상실한 독일에게 장기분할 부채상환(오랜 기간에 나눠 부채를 갚아나가는 것)은 한 세대 이상의 궁핍을 강요하여 강력한 반발심리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라고 주장해보지만, 전쟁으로 지게 된 막대한 채무를 감당할 수 없었던 영국 정부는 케인스의 주장을 묵살하고 프랑스의 주장에 동조했다.

   결국 1921년, 배상위원회는 최종적으로 ■1320억 "금"마르크에 해당하는 금액을 독일이 갚아야 할 전쟁배상금으로 책정하였다. 이게 얼마나 터무니없는 금액이냐면, 당시 독일의 세입 평균은 연 60-70억 마르크로 1320억 마르크를 온전히 갚기 위해선 독일 국민이 낸 세금을 단 한 푼도 쓰지 않는다는 가정하에 20년간 지불해야만 하는 금액이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패전국인 독일에겐 이를 갚을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 배상위원회의 무리한 요구에 독일은 ■디폴트를 선언하였고 배상금 문제에 대하여 강경한 태도를 고수하던 프랑스와 벨기에는 독일의 배상금 미지급을 이유로 독일의 루르 지방을 점령한다. 가혹한 처벌에 분노한 독일 정부는 노동자들에게 총파업을 지시하였고 독일의 산업은 완전히 무너지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이 매년 전쟁배상금을 갚아야 한다는 사실엔 변함이 없었다. 최악의 상황에서 독일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라고는 인쇄기에 의존하여 돈을 찍어내는 것 밖에 없었다. 독일의 통화 공급량은 1921년부터 1923년까지 7500배가량 증가하였고, 말기엔 1달러가 4조 마르크와 치환되는 지독한 수준의 ■하이퍼 인플레이션이 시작되었다.
땔감 대신 돈뭉치를 화로에 넣는 여성과 돈다발을 쌓으면서 놀고 있는 아이들
   시중에 돈이 너무 많이 풀리다 보니 아이들이 돈다발을 쌓으면서 놀고, 땔감 대신 돈뭉치로 난방을 하는 기이한 모습이 독일 내에선 당연한 일이 되었다. 독일에서 화폐는 신용을 잃었고 상인들은 마르크화를 받기를 거부했다. 이지경까지 와버리니 독일은 국가의 흥망이 아닌 존폐 여부를 걱정해야 할 정도로 불안정한 상태가 되었다.

   하지만 마른하늘에도 비가 내린다고, 타개책이 보이지 않던 독일의 하이퍼 인플레이션은 아주 작은 변화에 의해 차츰 안정되기 시작했다. 변화는 통화 집행위원으로 임명된 얄마르 샤흐트로부터 시작되었다. 샤흐트는 가치가 없어진 파피어 마르크의 발행을 중단하고 독일 각지의 농장과 공장을 담보로 발행하는 저당증권 형태의 렌텐 마르크를 새롭게 발행했다. 동시에 두 화폐를 1조 : 1의 교환비로 교환해주기 시작했다.

   통화정책에 대한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종이 쪼가리가 되어버린 파피어 마르크를 바꾸기 위해 은행으로 몰려왔지만 독일의 경제 규모에 비해 시중에 풀리는 렌텐 마르크는 턱없이 부족한 수준에 그쳤다. 샤흐트는 초과수요라는 문제에 직면했고, 정부와 기업, 은행으로부터 렌텐 마르크의 발행한도를 늘리라는 압박을 받았다. 하지만 렌텐 마르크가 저당증권의 형태를 띠고 있는 이상 화폐의 발행한도엔 한계가 존재했으며, 샤흐트 본인도 농장과 공장의 한도에 따라 발행한도를 제한해야 화폐의 신용을 회복할 수 있다고 믿었다. 샤흐트는 그 어떤 압박에도 굴하지 않고 렌텐 마르크의 발행량을 철저하게 통제하였으며 렌텐 마르크는 샤흐트의 통제아래 안정적으로 시중이 풀리기 시작했다.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놀라운 변화가 찾아왔다. 렌텐 마르크가 시중에 풀리는 속도가 너무 느리다 보니 품귀현상이 빚어져 화폐의 신용이 회복되기 시작한 것이다. 화폐를 받는 것을 거부하던 상인들은 렌텐 마르크를 받고 물건을 팔기 시작했고 침체된 시장은 다시 활기를 띄기 시작했다. 그렇게 독일 국민들의 경제활동이 다시 시작되었다. 샤흐트가 옳았던 것이다. 샤흐트가 움직인 단 하나의 톱니바퀴는 무수히 많은 연쇄작용들을 일으켜 독일의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비록 호황기가 찾아왔다고 할 수는 없지만, 절망적이었던 독일의 경제에겐 가뭄속 단비와 같은 희망이었음은 분명해보였다.

   그와 동시에 프랑스가 독일의 배상급 미지급을 이유로 루르지방을 점거한 사건을 두고 국제사회의 비판을 받게 되면서 독일에 대한 동정 여론이 급부상하게 되었다. 평소 프랑스의 대독 정책을 비판하던 영국과 미국은 재정전문가 위원회를 설치해 독일의 배상금 문제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로 나온 게 미국이 8억 마르크에 해당하는 차관을 제공함과 동시에 5년간 상환할 배상금을 현실적인 수준으로 지정하여 점진적으로 갚아나갈 수 있게 해 준다는 내용이 담긴 도스 안 [Dawes Plan]을 협상국 측에 제안하였다.

   이 협상에서 미국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었고, 연합국 측은 이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프랑스의 군대는 도스안에 의거하여 루르지방에서 철수하였고, 유럽 최대의 공업 지역으로 불리는 루르 공업 지역은 파업을 철회하고 다시 가동할 수 있었다.

   호재가 겹친 독일의 경제는 매년 10~20억 금 마르크에 해당하는 채무를 상환할 수 있는 수준까지 회복할 수 있었다. 하지만 1929년, 미국발 세계 대공황의 여파가 독일을 강타하면서 전쟁배상금 문제는 매년 지불해야 하는 액수나 지불방식이 아닌 지불해야 할 배상금의 총액이 지나치게 높게 책정되었다는 점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었음 깨닫게 된다.



■1320억 "금"마르크 : 배상위원회는 처음부터 독일의 급격한 인플레이션을 예상하여 1914년 이후로 발행이 중단된 '금'마르크를 기준으로 배상할 것을 못 박아 뒀다. 배상액이 결정된 시기에 독일에 유통되고 있던 파피어 마르크로는 부채를 상환할 수 없었기 때문에 가축, 광석, 석탄, 농산물과 같은 현물을 통한 배상이 주로 이뤄졌다.


■디폴트 : 국가규모의 채무불이행을 의미한다.


■하이퍼 인플레이션 : 물가상승률이 정부의 통제를 벗어나 단기간에 수백 % 이상 치솟는 상태를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중앙은행이 통화량을 급격하게 늘리면서 발생하며 국가 경제의 혼란을 야기하고 실물경제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히기도 한다.



   1939년 독일의 선제공격으로 인해 시작된 두 번째 세계대전은 전쟁의 규모부터 여타 전쟁과도 비교할 수 없는 막대한 인적, 물적 피해를 야기했다. 공식적으로 확인된 사상자만 5500만 명, 비공식적으로는 7000만 명에 육박하며 7년간 이어진 전쟁으로 발생한 전쟁비용과 물적 피해는 그 규모를 산출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수준까지 치솟았다. 이 전쟁으로 전 세계를 주름잡던 유럽의 열강들은 하락세를 걷기 시작했고 세계의 패권은 대영제국에서 전쟁의 승리를 주도한 자본주의 진영의 미국과 동유럽 전체를 세력권에 편입시킨 사회주의 진영의 소련으로 넘어가며 양강의 냉전시대가 개막되었다. 또한 유럽의 열강들 이 부족한 군수물자를 미국으로부터 조달하는 과정 속에서 막대한 양의 금이 미국으로 유출되었고, 종전 당시에는 전 세계 금의 70%를 미국이 보유하게 되어 세계의 통화체계엔 큰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





첫 번째 사건, 브레튼우즈 체제의 붕괴

   현재 대부분의 국가들은 국가의 신용을 담보로 발행하는 신용화폐를 사용하고 있지만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국가의 통화제도는 금본위제 아래에 있었다. 금본위제는 화폐의 가치를 금의 가치와 동일시하는 고정환율제도로 금화 본위제와 금지금본위제로 구분할 수 있다. 금화 본위제는 화폐를 금화로 발행하여 유통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실제 금으로 화폐를 만들면 무게와 부피 때문에 유통에 불편함이 있었기 때문에 1차 세계대전 이후 대부분의 나라는 일정량의 금과 같은 가치를 가지는 보조 화폐를 발행하여 유통하는 금지금본위제를 채택하였다. 이 보조 화폐를 바꾸는 행위를 금태환, 바꿔주는 중앙은행의 역할을 하는 기관을 태환성이라고 한다. 금본위 제도가 유지되기 위해선 경제규모만큼의 금을 보유하고 있다는 전제가 필요하다.


   각 국가는 전후 피해를 복구하고 경제를 활성화시키기 위해 돈을 찍어낼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두 번의 세계대전으로 인해 국고가 바닥난 유럽 국가들은 금본위제를 실행할 충분한 양의 금을 갖고 있지 않았고, 연이은 두 번의 세계 대전을 통해 수많은 국가들이 한순간에 사라지는 것을 보고 겪은 국민들에게 국가의 신용을 담보로 발행하는 신용화폐의 사용을 강요할 만큼 세계의 정세가 안정된 상태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시간을 두고 대책을 찾기엔 전 세계가 너무나도 혼란스러운 상태였기에 이들에겐 하루빨리 통화질서를 세워 세계경제의 혼란을 바로잡아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 출범한 것이 바로 브레튼우즈 체제다.


   브레튼우즈 체제는 두 번의 세계대전으로 무너진 각국의 통화체계와 금융질서를 바로잡기 위해 44개국이 참여한 통화 금융 회의에서 출범한 체제로, 달러를 기축통화로 지정하여 금을 1온스당 35달러로 고정시키고, 각국 통화의 환율을 기축통화인 달러에 고정하여 1% 범위 안에서 조정할 수 있도록 한 패권국가 주도형 금본위제를 의미한다. 패권국가가 세계의 경제를 주도하는 개방 경제 체제 아래에서 패권국가 주도형 금본위 제도는 환율에 대한 위험을 크게 감소시켜 자유무역을 통한 빠른 경제성장을 이끌어낼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기축통화의 가치는 절대적으로 안정되어있어야만 한다는 전제가 깔려있었다. 실제로 브레튼우즈 체제의 출범 이후 미국은 압도적인 금 보유량을 바탕으로 달러를 안정적으로 운용할 수 있었고, 자유주의 진영 국가의 경제는 미국의 주도 아래 전쟁의 피해를 딛고 대호황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하지만 여기서 딜레마가 발생한다.


  브레튼우즈 협약에 따르면 달러는 금에 고정이 되어있고 각국의 통화는 1%의 탄력성을 가지고 달러에 고정이 되어있다. 즉, 달러의 가치가 떨어지면 각국 통화의 가치도 떨어진다. 한마디로 브레튼우즈 체제가 금본위제를 바탕으로 둔 통화체제인이상, 필요에 의한 것이라 해도 보유하고 있는 금의 양 이상의 화폐가 시중에 유통되고 있다면, 화폐의 신뢰도는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하지만 1960년대 말, 브레튼우즈 체제하에서 대호황기를 누린 유럽과 6.25 전쟁의 수혜를 입어 전후 피해를 빠르게 복구한 일본이 세계 2위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한 것과는 다르게 미국은 베트남 전쟁으로 인한 전비 지출과 만성적 국제수지 적자로 지속적인 금의 유출이 발생한 상태였다. 또한 세계경제가 브레튼우즈 체제하에서 대호황기로 들어서며 그에 따른 '달러화'에 대한 수요 또한 급격하게 늘어나 통화팽창 현상도 발생했다.


   결국 통화팽창에 의한 달러의 가치 하락과 금 유출 현상의 장기화로 미국의 금태환 능력에 대한 불신이 국제사회에 확산되었고, 불안감을 느낀 일부 국가들이 미국에 금태환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상황이 이지경까지 와버리자 금태환으로 발생할 혼란을 감당할 수 없을 거라 판단한 미국은 1971년, 달러 안정을 명분 삼아 일방적으로 금태환제의 폐지를 선언함과 동시에 금태환제 폐지로 발생한 환율 변동으로부터 자국 산업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수입품에 대하여 10%의 관세를 부과하였다. 이로 인해 30년간 이어진 세계경제의 호황기는 막을 내리게 되었으며 브레튼우즈 체제는 사실상 붕괴, 각국의 통화제도는 대혼란에 빠지게 된다. 자유주의 진영의 대표들은 갑작스러운 브레튼우즈 체제의 붕괴로 인한 금융혼란을 진정시키기 위한 타개책으로 스미소니언 협정을 체결하여 각국 통화의 환율 조정폭을 1%에서 2.25%로 바꾸고 달러화를 평가절하해봤지만 미국의 국제수지 적자가 지속되었고, 스미소니언 협정은 2년 만에 파기되었다. 이는 국제사회가 고정환율제도와 결별하고 변동환율제도를 채택하게 된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투기꾼과 외환위기로부터 미국을 지키겠다는 명분 하에 이뤄진 금태환제의 폐지로 인해 닉슨은 정치적으로 큰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하지만 국제사회에 퍼져있는 달러의 가치 하락은 가속화되어 전 세계적인 스태그플레이션 현상(경기침체와 인플레이션이 동시에 발생하는 현상)을 야기했다. 그리고 이 사태를 더욱 악화시킨 것은 1973년, 약 19일이라는 짧은 시간 진행된 4차 중동전쟁이었다.








참고자료


1. 1920년대, 초인플레이션이 독일에 남긴 것

https://eiec.kdi.re.kr/material/clickView.do?click_yymm=201512&cidx=2204

2. Renew the Bretton Woods System

https://www.chathamhouse.org/expert/comment/renew-bretton-woods-system?gclid=CjwKCAiA44LzBRB-EiwA-jJipBF3GsEQsMx2jJA-t_GFoii2N1Zmk3516kv2HsrFtPNgIxDKwJw8dBoCVXEQAvD_BwE

3. 베르사유 조약

https://ko.wikipedia.org/wiki/%EB%B2%A0%EB%A5%B4%EC%82%AC%EC%9C%A0_%EC%A1%B0%EC%95%BD

4.Treaty of Versailles

https://www.history.com/topics/world-war-i/treaty-of-versailles-1

5.Creation of the Bretton Woods System

https://www.federalreservehistory.org/essays/bretton_woods_cre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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