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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돈도니 Sep 21. 2024

엄마는 내게 복종의 씨앗을 심었습니다

영화 <보 이즈 어프레이드>를 보고서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호아킨 피닉스(Joaquin Phoenix)가 출연하는 영화를 제법 본 것 같다. 작년에 개봉했던 나폴레옹(Napoleon, 2023)부터, 오늘 본 보 이즈 어프레이드(Beau Is Afraid, 2023), 조커(Joker

, 2019), 이레이셔널 맨(Irrational Man, 2016)

, 그녀(Her, 2014), 투러버스(Two lovers, 2014)  그리고 글리에이터(Gladiator, 2000)까지. 개봉 예정작인 조커 : 폴리 아 되(Joker: Folie a Deux, 2024)는 용산 IMAX관으로 예매해 뒀다.


1. 호아킨 피닉스(Joaquin Phoenix)


좌 영화 <그녀>의 테오도르 역, 우 영화 <조커>의 조커 역

호아킨이 연기하는 인간상이 좋다. 그가 연기하는 역들은 파멸에 저항하지 않으면서 담담하게 고통 받아들인다. 카뮈의 소설 <이방인> 속 뫼르소가 그러하듯 그의 배역들도 무기력하게 삶의 부조리를 수용하는 듯하다. 호아킨 피닉스는 이런 배역을 연기할 때 존재의 약점을 순수하게 드러내면서 관객을 몰입시킨다. 왜 이런 파멸하는 인간상의 서사에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건지. 일종의 대리 파멸을 보는데서 오는 만족감과 해방감일까. 덧붙여서 나는 호아킨의 천진난만하게 웃는 모습이 좋다.

베니스 영화제 초청작<조커 : 폴리 아 되>의 시사회 참석한 호아킨 피닉스


2. Boy is afraid (소년은 -을 두려워한다.)


보 이즈 어프레이드(Beau Is Afraid, 2023)는 환상과 현실을 오가며 주인공 보를 비롯한 등장인물들의 무의식과 억압된 자아를 다룬다. (이런 무의식, 억압된 자아를 주제로 하는 작품을 좋아한다.) 주인공 보는 강압적인 엄마 밑에서 크며, 말 그대로 엄마라는 위계의 하부에서 불안정한 인간으로 자란다.

영화 피아니스트(The Piano Teacher, 2002) 스틸컷

이 영화를 보면서 이자벨 위페르(에리카역)가 나오는 영화 피아니스트(The Piano Teacher, 2002)가 생각났다. 보와 에리카 모두 엄마로 인해 자신을 억압하는 성인으로 자라며 보는 조현병에 걸리고 피아니스트의 주인공은 성적 집착이 심했다. 다만 피아니스트는 그 관계가 엄마와 딸이었고 여자 주인공이 영화관에서 음란물을 보는 등의 기행의 묘사는 남성인 감독이 여성이 연인 간의 관계에 있어 어려움을 엄마가 여성에게 끼치는 악영향 탓으로 돌리는 것 같아 당시에는 굉장히 편협적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오늘 영화를 보며 엄마가 억압적이고 침투적으로 자녀의 삶에 관여할 때 우리는 기형적인 무의식이 자리 잡을 수 있고 그로 인해 얼마나 불안한지까지 생각해 볼 수 있었다. 흥미로운 건 이 두 영화 모두 엄마가 자녀의 리비도를 억압하면서 둘의 무의식에 문제가 발생한다는 점이다.


3. 마미, 내 안의 빅브라더


영화에서 보는 엄마 눈에 의식된 자아라는 자기 검열적 시선이 내면화되어있다. 과연 보만 그럴까. 우리도 자신을 엄마가 바라보는 내 모습이라는 걸로 인식하며 세상을 살고 타인과 관계하는 게 아닌가. 엄마가 좋다고 하는 게 좋은 거고 아닌 건 아니고, 그래서 부모님의 말을 안 듣는 게 ‘거역’하거나 ‘거스르는’ 게 되어버린다. 영화는 마지막에 보가 탄 배가 뒤집어지며 관을 형상화한다. 피아니스트에서는 이자벨 위페르는 자살한다. 우리는 한 인간이 건전한 정신을 가지기 위해서 어느 단계에서 엄마라는 존재를 우리 ‘정신에서’ 죽여야 할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정신이 죽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보가 엄마를 질식시키는데 실패하는 걸 보면서 안타까웠다.


4. 당신만 당신처럼 생각하는 이유 중 하나는


에어리언이 자신의 자신을 심고, 그것이 태어나고. 사진은 트레일러컷

보의 엄마는 기형적인 무의식을 보에게 주입한다. 그러나 그런 엄마조차도 그녀의 엄마로부터 그런 자아를 이식받았다. 마치 에어리언의 로물루스(Alien: Romulus ,2024)가 자신의 씨를 인간에게 심어서 에어리언이 탄생하듯이. 그렇게 에어리언이 에어리언을 낳는다. 무의식적 폭력의 유산이다. 비단 이 영화에서 뿐만 아니라 금쪽이 같은 프로그램을 보더라도 부모는 자녀보다 정신적으로 우위에서 의도하든 그렇지 않든 자녀를 착취하고 억압하며 자녀의 정신건강에 영향을 주기도 한다. 이렇게 말하면 너무 터프해 보이지만 실제로 가치관이나 윤리관 같은 인간사의 규범들도 우리는 부모님의 것들이 자연히 내면화된다. 개인의 생각과 가치관이 사회에서 수용이 안 되는 이유가 이 때문이기도하다. 인간은 성인이 된 이후로 스스로 깨닫고 정신적으로 부모와 선을 그으며 부모님의 정신적 유산을 살펴보는 작업이 필요하다.



5. 환상적인 진실의 공포


좌 다락을 올라가는 보, 우 아들과 재회

영화 중반부를 보면 보는 연극에 참여하는 환상을 한다. 재미있는 점은 보는 이 상상에서 가정을 이루고 아들 셋을 낳는데 사실 보는 엄마로부터 복상사(腹上死)가 유전병이라는 걸 들으면서 자랐다. 아빠도 그렇게 죽었다고 말하면서. 그러니까 복상사가 있는 남자가 아들을 낳고, 연극의 객석에서는 죽은 줄만 알았던 자신의 아빠를 만난다. 보가 주입받은 무의식은 허구다. 그러나 보가 다락에서 봤던 것처럼 공포이기도 했다. 어쩌면 내가 가족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크고 작은 무의식들 정서들은 사실 이렇게 말도 안 되는 허구이지만 실은 외면하고 두려운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것을 직시했을 때 우리는 새로운 환상을 꿈꿀 수 있다. 마치 아들 셋을 낳은 꿈을 꾸는 보처럼.




엄마는 나더러 ‘남들처럼 생각하라’고 했다. 나도 그러고 싶었고 그러기 위해 노력했다. 나는 늘 좀 더 감각이 무뎌지고, 세상이 흐릿하고, 다른 사람들이 좋아하는 걸 좋아하려 노력했다. 그러나 그건 좀처럼 잘 되지 않았다. 아니 늘 실패했고, 고통스러웠고 나 자신과 겉돌았다. 나에게 세상은 언제나 새롭고 의문투성이에 매 순간 나를 자극하고 질문을 던졌다. 완전한 에어리언이 되면 그냥 나를 에어리언이라 생각하고 (물론 이 경우는 내가 에어리언인 줄도 모르겠지만) 살아갈 텐데, 이 자각이 나와 에어리언의 사이를 가른다. 언젠가 나는 보와는 달리 내가 받은 에일리언의 씨를 내 눈으로 확인하고자 배를 갈라봤던 것 같다. 그래서 더 괴로운 게 아닐까. 스스로 나를 자각하고 내 의식의 배를 갈라 보는 행위를 한다는 게. 그 행위는 보가 다락을 올라가는 공포만큼이나 두려웠다. 영화는 타자, 여기서는 엄마의 무의식을 답습하지 않아야 생존할 수 있다고 말했다. 내 심연을 알고 있는 나는 더 이상 이 무의식의 타성에서 살아갈 수 없다. 새로운 세상을 꿈꾼다. 새로운 환상과 꿈의 세계를. 보가 실패한 환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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