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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돈도니 Oct 05. 2024

대도시인의 감사법

일상은 영화처럼


문명의 사람들이라면 으레 하는 것들이 있다. 만나서 반가워라든가 그래 다음에 봐하는 그런 인사말 같은 거. 그러나 당최 한국의 계절은 그런 걸 잘 모른다. 지구라는 게 있은 이래로 태양을 돌면서 가까워지고 멀어지고 하는 게 뭐 어제오늘일인가. 아무튼 지난 몇 개월 전보다 조금 멀어졌다. 갑자기 말이다. 아니 그보다는 계속 멀어지고 있었는데 내가 뒤늦게 알아차린 게 맞겠지. 그 말은 어제까지 에어컨을 켜던 나는 오늘 긴팔 긴바지 파자마를 꺼냈고, 어제는 흰색 반팔 티셔츠를 입고 출근하다가 오늘은 그 위에 긴팔 스웻셔츠를 껴입었다는 뜻이다. 공기가 차가워지고 해가 짧아졌다. 가을이 왔고 올 해가 얼마 안 남았다. 시간이 착실히 가고 있다. 10월은 휴일이 많았다. 나는 책을 읽고 하늘을 보며 하루를 보냈다. 아름다운 날들이다. 이 글은 아름다움에 대한 헌사다.


SKY : Super Kinetic Yearning


이걸 보는덴 별 다른 노력이 안 든다. 베란다 문을 열기만 하면 되니까

되도록이면 하늘을 최대한 보려고 한다. 집이 김포공항 근처라 비행기가 아파트 머리 위로 날아다니는데 이게 꽤 재미있다. 예를 들면 베란다에서 하늘을 볼 때 이륙하는 비행기는 벌써 아주 높이 있고 착륙하는 비행기는 항공사 도장이 보일 정도로 고도가 낮다. (이륙할 때는 빠르게 고도를 높이고 착륙할 때는 고도를 서서히 낮추나 싶다. ) 또 오후 6시 전후면 김포공항으로 퇴근하는 비행기들이 줄지어 들어온다. 말 그대로 줄지어! 베란다로 보면 공중의 불빛들이 일렬로 간격을 두고 다가온다. 그리고 베란다에선 인천공항발 이착륙 비행기도 보인다. 아무리 봐도 재미있는 광경이다. 물론 그 비행기가 있는 곳이 하늘이기 때문에 그런 거라고는 말해야 한다. 그것들이 있는 곳이 비가 내리고 구름이 끼고 노을이 지는 그런 곳이니까.


인공조명의 라이트 쇼보다 아름다운 쇼. 이번 주말은 어떤 프로그램이 준비되어 있을까

무엇보다 노을 지는 게 좋다. 노을은 언제나 다른 빛깔이고 그 시간은 짧다. 노을을 기다리면서 베란다에서 책을 읽다가 몇 번이나 놓칠뻔한 적도 있다. 유튜브를 보는 게 현대인의 지혜일 테지만 아무렴 어떤가. 유튜브는 내일도 똑같은데 오늘의 하늘은 내일과 다른 걸. 실은 이렇게 현학적일 필요도 없다. 면으로 둘러싸여 고개를 쳐들면 천장이 보이는 공간에서 일하는 데 어떻게 하늘이 안 궁금하겠나.


그러나 하늘은 대도시인만이 즐길 거리는 아니다. 교외로 갈수록 시골일수록 아니면 비문명 지역일수록 좋다. 비행기는 없겠지만 저녁에 공항으로 들어오는 여객기의 불빛 대신 별자리가 보일 테니. 아무튼 하늘로 따지자면 그쪽이 더 낫다. (비행기 소리도 안 들리고) 내가 말하고 싶은 건 그 하늘을 가르는 서울의 산타클로스들이다.


Super Sonic Santa !


산타클로스들의 인증샷!


내가 자는 동안 문 앞에 놓여 있는 물건들. 마켓컬리와 쿠팡의 새벽배송, 어니스트플라워와 꾸까의 아침 꽃배송, 알라딘의 양탄자 배송. 나의 편리를 돕는 그 분주한 산타클로스들. 혹자는 우리의 관계는 재화와 서비스이고 이게 그렇게 감상적일 것까지 있냐고 그럼 너는 매번 감동하냐고 물을지도 모르겠다. 맞다. 나는 거의 매번 감동한다! 그 산타클로스들 덕에 아침에 눈을 뜨면 살아 있는, 피고 지는, 곧 죽겠지만 죽음은 당연한 것이므로 현재 살아있는 그 아름다움을 볼 수 있다. 그 산타들덕에 침실에서 보들레르의 <악의 꽃>을 읽다 잠든다. 나는 산타들이 아니면 퇴근하고 연어에 차즈기 소스를 만드는 조합을 떠올리지 못했다. 산타는 내게 작은 물건과 큰 생활을 선물했다. 이럴진대 내가 아침에 현관문을 열면 감동하지 않을 이유가 있을까.


계절에 맞는 꽃을 보고 손님 맞이 꽃도 산다. 이 맛에 사는 거지


죄스러운 마음도 있다. 한 번은 몇 가지 물건을 사는 걸 깜빡해 두 번에 나눠서 주문을 한 적이 있었다. 얼음과 탄산수를 다른 물건들과 같이 산적도 있었다. 무겁지 않은 걸 최대한 한 번에 사기. 문 앞에 배송된 물건들을 들어보며 다짐한다. 이러다 허리 다치겠는 걸. 약국에 파스와 근육통약을 사러 오시는 산타들이 떠올랐다.


https://youtu.be/DZGrH1Hz7J4?feature=shared

중학교 어느 여름 방학 때 샤워를 하고 머리를 말리면서 카블로 카잘스의 바흐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들으며 한 생각이 있다. 이렇게 아름다운 곡을 들을 수 있어서 너무 감사하다. 이렇게 선풍기로 머리를 말리며 윙윙거리를 소리 너머로 첼로 연주를 들을 수 있어서 좋다. 태어나길 잘했다. 아마 이랬던 것 같다. 다분히 감상적이지만 나는 당시 아토피가 심해서 학교를 중퇴하니 휴학을 해야하나 고민했던 시기였다. 그 당시를 돌이켜 보면 어른인 지금 칭찬할 수 있었던 건 그런 상황에도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마음과 감사함을 느끼는 자세였다. 존심양성(存心養性)이라고 했다. 하늘이 주신 성품을 잘 지켜내는 것. 어린 나는 그때의 마음을 살피며 서울이라는 대도시에서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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