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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엄에 대하여

존재론적 존엄에 대한 소고

by HASMIN

‘존엄(尊嚴)’이라는 단어는 ‘높이 존(尊)’과 ‘엄숙할 엄(嚴)’이 결합된 말로, 그 자체로 높고 침해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닌 상태를 뜻한다. 이는 단순히 훌륭하거나 귀하다는 표현이 아니라, 어떠한 조건이나 상황에서도 훼손될 수 없는 ‘존재의 품격’을 의미한다.


존엄은 인간이 그 자체로 목적이며 수단이 될 수 없는 존재라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즉, 인간의 존엄은 능력, 지위, 경제력, 나이, 건강과 같은 외적 조건과 무관하게 그가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치가 있음을 말한다.


인간이 존엄한 이유는 그가 단순히 생명체로서 살아 있기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를 인식하고, 옳고 그름을 판단하며,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고, 자유롭게 의미를 만들어갈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인간의 존엄은 생물학적 특성이 아니라 존재론적 성질이다.


인간을 묻는다는 것

“인간은 존엄하기 때문에 인간인가, 아니면 인간이기 때문에 존엄한가?” 이 질문은 단순히 말의 순서를 바꾼 것 같지만, 사실 인간 존재를 이해하는 두 가지 상반된 관점을 내포한다.

하나는 존재의 사실(fact)에서 출발해 존엄을 그 속성(attribute)으로 보는 입장이며, 다른 하나는 존엄이라는 가치(value)가 인간됨의 본질을 형성한다고 보는 관점이다. 즉, 인간이기 때문에 존엄한가, 아니면 존엄하기 때문에 인간인가. 이 질문은 ‘무엇이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가?’라는 더 근본적인 물음으로 이어진다.


인간이기 때문에 존엄하다는 관점

우리는 흔히 “모든 인간은 존엄하다”고 말한다. 이 말은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즉 ‘인간으로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존엄의 근거라는 생각에 기반한다. 현대 인권사상이 바로 여기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 누구도 성별, 인종, 나이, 능력에 따라 차별 받아서는 안 된다는 말은 존엄이 선천적 권리임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주장은 중요한 한계를 가진다. ‘인간이기 때문에 존엄하다’고 말하면, ‘인간이 아닌 존재’는 존엄의 영역 밖으로 밀려난다. 식물, 동물, 혹은 인간의 조건을 거의 갖춘 인공지능과 같은 존재는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이 관점에서는 존엄의 기준이 종(種)의 경계에 갇히게 된다. 결국 인간의 존엄은 생물학적 구분 이상의 의미를 갖기 어렵게 된다.


존엄하기 때문에 인간이라는 관점

반대로 “존엄하기 때문에 인간이다”라는 명제는 인간됨의 본질을 존엄성 그 자체로 본다. 즉, 존엄은 인간의 속성이 아니라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근원적 조건이다.

인간은 단순히 살아 있는 생명체가 아니다. 그는 의미를 묻는 존재, 자신의 행위를 반성할 수 있는 존재, 그리고 타인의 고통에 응답할 수 있는 존재이다. 이러한 자기인식과 도덕적 감수성, 자유로운 선택의 능력이 바로 ‘존엄’의 실질적 표현이다.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이유

인간은 자신만을 위한 존재가 아니다. 그는 자신을 넘어 타자에게로, 세계로 향할 수 있는 존재이다. 이 ‘넘어감’의 능력이 바로 인간의 본질이다.

인간은 타인의 고통을 느끼며, 정의를 세우기 위해 자기 이익을 포기할 수도 있다. 때로는 진리나 사랑을 위해 자신의 생명조차 내어놓는다. 이것은 생물학적 진화나 본능으로 설명될 수 없는 차원이다. 그것은 인간이 의미를 향해 존재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통합의 시선

철학은 인간의 존엄을 이성적 자율성과 도덕적 자각에서 찾는다. 칸트가 말했듯이 인간은 “목적 그 자체”로서 존중받아야 하며, 그 이유는 인간이 스스로 도덕법칙을 세우고 그것에 따라 행동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성적 자율성은 곧 존엄의 철학적 표현이다.

그러나 신학은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존엄의 근원을 인간 내부가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찾는다.

창세기의 선언 —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창 1:27)

이 구절은 인간의 존엄이 인간 자신의 성취가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으로부터 비롯된다는 것을 말한다.


존엄을 잃을 때 인간은 무엇이 되는가

존엄이 사라질 때 인간은 타인을 도구로 보고, 자신조차 교환 가능한 존재로 전락한다. 이것이 오늘날의 위기다. 인간은 여전히 ‘인간 종’으로 존재하지만, 서로를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대하는 사회 속에서 존재론적 인간성은 빠르게 희미해지고 있다.

“인간이기 때문에 존엄하다”는 선언이 실제 삶 속에서 “돈이 있기에 존엄하다”, “능력이 있기에 가치 있다”로 대체되는 순간, 인간은 더 이상 인간으로서의 이유를 잃는다.


인간은 ‘존엄하기 때문에 인간이다’

인간은 생물학적 사실로서 주어지는 존재이면서, 동시에 윤리적·영적 응답을 통해 완성되는 존재이다. 존엄은 인간이 지닌 어떤 특성이 아니라, 그가 자신과 타자를 향해 사랑과 책임으로 응답할 수 있는 가능성 그 자체이다.

인간은 존엄하기 때문에 인간이다.

그리고 인간은 그 존엄을 자각하고 실천할 때 비로소 인간이 된다. 존엄은 단순한 권리가 아니라, 존재의 부름이며 응답의 형식이다. 그 부름에 응답할 때, 우리는 인간으로 존재한다.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 답은 인간 안에서만 발견되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을 부르신 존재의 근원, 곧 하나님께로부터 온다. 그 부름을 들을 때 인간은 자신이 존엄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 존엄을 살아내기 시작한다. 그때 비로소, 인간은 단순히 ‘존재하는 생명’이 아니라 의미로 살아가는 인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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