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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동윤 Nov 25. 2022

브라운 아이즈 「벌써 일 년」

한국형 R&B, 미디엄 템포 발라드의 시작

2001년 여름, 가요계는 '얼굴 없는 가수'의 맹위로 또 한 번 뜨거웠다. 남성 듀오 브라운 아이즈(Brown Eyes)는 방송 활동을 하지 않았음에도 데뷔 한 달 만에 지상파 음악 프로그램 1위 후보에 올랐다. 그들의 데뷔곡 「벌써 일 년」은 출시된 지 얼마 안 돼 빠르게 소문을 타고 거리 곳곳의 스피커를 장악했으며, 이내 라디오 전파까지 휩쓸었다. 조성모, 김범수에 이어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성공을 거둔 경우였기에 대중과 매체의 관심은 더욱 컸다.


히트의 배경에는 익숙한 요소와 남다른 구조가 함께 자리한다. 「벌써 일 년」은 헤어진 연인을 그리워하는 노랫말로 애잔한 분위기를 풍겼다. 이별이 소재가 되는 발라드에서 흔히 마주하는 내용이다. 화자의 심경을 대변하는, 간절함이 묻어나는 가창 또한 수많은 발라드 노래가 공유하는 어법 중 하나다. 하지만 「벌써 일 년」은 반주가 정적인 여느 발라드와 달리 어느 정도 리듬감이 있는 템포로 진행됐다. 발라드 같지 않은 발라드였다. 이로써 친숙성과 신선함을 동시에 내보일 수 있었다.

명확하게 대비되는 두 멤버의 연출과 풀이는 「벌써 일 년」이 특별한 의미를 갖게끔 했다. 작곡과 편곡을 담당한 윤건은 어쿠스틱 기타, 피아노, 신스 스트링을 들임으로써 일반적인 발라드 반주의 모양을 냈다. 반면에 나얼은 R&B에 기초를 둔 보컬을 선보였다. 1절 후렴이 끝난 뒤에 아주 옅게 추가하는 애드리브, 브리지 후의 후렴과 최종 후렴이 겹치는 부분에서 하는 비브라토와 음을 높여 부르는 가창이 나얼의 음악적 뿌리를 일러 준다. 한국 사람만이 아는 특유의 '가요스러운' 느낌을 지닌 곡에 컨템퍼러리 R&B의 표현이 가미됐음에도 이질감은 전혀 감지되지 않았다. 오히려 친근하면서도 멋스러웠다. 이런 연유로 「벌써 일 년」을 두고 음악 팬들 사이에서는 '한국형 R&B'가 탄생했다는 평이 오갔다.


독자적인 매력과 더불어 뮤직비디오도 노래의 인기에 풀무질을 했다. 차은택이 메가폰을 잡고, 김현주와 이범수, 대만 배우 장첸(張震, Chang Chen)이 주연한 뮤직비디오는 당시 유행하던 드라마 형식으로 꾸며졌다. 나얼이 카메오로 잠깐 나오긴 하지만, 뮤직비디오에서도 두 멤버는 철저히 모습을 숨겼다. H.O.T.의 「빛 (Hope)」, 스카이(Sky)의 「영원」, 조성모의 「To Heaven」 등 드라마처럼 만든 뮤직비디오들이 대체로 물량 공세와 자극적인 연출에 의존했던 반면, 「벌써 일 년」은 차분한 연출로 주인공들의 관계와 감정을 나타내는 데에 초점을 맞췄다. 뮤직비디오는 노래가 보유한 부드러운 결, 애틋한 정서를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매개 역할을 톡톡히 했다.


한 음원 플랫폼에서 「벌써 일 년」은 20주 이상 1위를 지켰다. 노래가 크게 히트함에 따라 브라운 아이즈의 첫 앨범은 발매 5개월 만에 70만 장 넘게 판매됐다. 브라운 아이즈는 <엠넷 뮤직비디오 페스티벌>에서 '신인 그룹' 부문을 수상하는 등 기쁜 날들을 누렸다.

사실 브라운 아이즈는 신인이 아니었다. 나얼과 윤건은 각각 R&B 그룹 앤썸(Anthem)과 팀(TEAM)으로 활동했다. 두 그룹 모두 아쉽게도 소수 흑인음악 마니아에게만 이름을 알리는 데에 그쳤다. 그때의 아픈 경험 때문에 브라운 아이즈는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앨범 판매량이) 5만 장만 넘기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라고 말하기도 했다. 첫 출항 때는 빈손으로 돌아왔던 이들이 브라운 아이즈로 만선의 꿈을 이뤘다.


당시 브라운 아이즈의 성공을 두고 매체들은 '신비주의 마케팅'이 또 한 번 효력을 발휘했다는 기사를 내보냈다. 정체를 감춘 점이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긴 했다. 하지만 기획과 홍보가 작품의 품질을 대신하지는 못한다. 윤건이 지은 흡인력 강한 선율, 나얼의 호소성 짙은 가창이 어우러진 근사한 노래가 없었다면 대중의 관심은 금방 수그러들었을 것이다. 출시된 지 21년이 지난 지금까지 많은 이가 「벌써 일 년」을 즐겨 듣는다는 사실이 음악의 힘을 명쾌하게 설명한다.


윤건과 나얼이 이룬 시너지는 가요계 전반으로 영향을 넓혔다. 이후 리치(Rich)의 「사랑해, 이 말밖엔...」, 플라이 투 더 스카이(Fly to the Sky)의 「Sea of Love」, 오션(5TION)의 「More Than Words」, SG 워너비(SG Wannabe)의 「Timeless」 등 한국 대중음악의 정감을 띤 미디엄 템포의 반주, R&B풍 보컬을 혼합한 노래들이 대거 등장하며 전에 없던 트렌드를 형성했다. 일련의 노래들은 흑인음악 애호가와 일반 음악 팬을 아우르는 호응을 이끌어 냈다. 한국형 R&B, 미디엄 템포 발라드의 시작을 「벌써 일 년」이 끊었다.


<법무사지> 2022년 11월호 '세대유전 2080 명곡'


https://www.youtube.com/watch?v=LZlIqfMn4c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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