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그 돈 벌어서 뭐할래?
이제부터 속 뒤집어지는 대화를 하나 공개하려고 한다.
스크롤의 압박이 염려되긴 한다만, 어떻게 내 인생의 목표와 꿈과 행동과 관점이 달라졌는지 알 수 있는 중요한 장면이기 때문이다.
어느 평화로운 주말 저녁. 문득 아이디어가 하나 떠올랐다. 곧장 아빠에게 달려갔다.
나: 아빠. 아무래도 우리 살고 있는 성수동 집을 월세로 주는 것이 좋을 것 같아.
(이미 심드렁해하는 모습의 아빠)
아빠: 왜?
나: 근처에 회사가 많이 생기고 여러 인프라가 마련되어서 집값이 많이 올랐잖아. 좀 아까워.
아빠: 그럼 나는 어디서 살고?
나: 아빠 지금 지방에 있고 서울에는 주말만 올라오잖아.
아빠: 그래도 서울에 오면 있을 곳이 있어야지.
나: 서울 중에서도 싼 곳을 빌리는 게 낫지. 우리는 이 지역에 친구도 없고, 직장도 없고. 그 인프라를 누리지도 않는데 비싼 기회비용을 지불하는 셈이야.
나: 하루종일 엄마랑 (옆에서 ㄷ 모양으로 자고 있는 뿅뿅이를 가리키며) 개만 이 집에 있다구. 심지어 개도 이 집을 안좋아해!
아빠: 좋아해
나: 안 좋아해. 여기 산책시설이 별로라 싫대.
아빠: 엄마는 잘 지내잖아
나: 엄마 잘 때 빼고 집에 있지도 않잖아
(우리 엄마는 파워 “E” 성향이라서 365일 중 360일을 밖에 나간다.)
아빠: 그래도 은퇴 후에 이곳에서 생활을 유지할 거라고 정했어. 그래서 미리 여기에 익숙해져야돼.
나: 그러면 은퇴까지 5년이 남았으니, 그 중 3~4년 월세를 받고 다시 여기로 돌아올 절호의 기회야. 우리의 유일한 자산을 활용해서 수입을 4년 모으면 7~8천만원의 종잣돈이 생겨서 노후가 훨씬 수월해져.
그때 엄마가 거들기 시작했다.
엄마: 이사하는 것이 귀찮아.
나: 휴. 직장인들은 하루 8시간씩 일해 30년을. 일주일 고생하는 것이 귀찮으면 어떡해?
엄마: 직장인들은 보람이 있잖아.
나: (눈으로 욕하는중)
나: 무조건 안 될 걸 생각하지 말고, 이런 이런 점이 걸리면 해결할 방안을 고민해보면 되잖아.
엄마: 이 짐은 어쩌고?
나: 뭘 어째. 버리거나 가져가면되지. 500만원도 안들텐데.
몇 초가 흘렀다. 잠깐이나마 승기를 잡은 듯한 착각이 드는 순간 엄마는 무적의 논리를 펼치기 시작했다.
엄마: 그래도 여긴 우리 집이잖아.
나: 그게 뭐?
엄마: 우리 집에서 살아야 맘 편하지.
나: 매달 월세 200만원 받아도 맘 편해.
엄마: 그래도 우리 집이잖아. (무한 반복)
이미지 관리를 위해 대화가 좀 순화됐지만, 마지막에 엄빠가 한 마음으로 덧붙인 말은 액면 그대로로, 왜 우리의 대화가 노답으로 끝났는지를 여실 없이 보여준다.
아빠, 엄마: 이 나이에 그 돈 벌어서 뭐할래?
나: …?
일단 저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자칫 나의 침묵이 동의로 받아들여질까봐 정신을 부여잡고 일단 아무 말이나 했다.
나: 외제차 살 수 있지!!!!!!
당시 아빠가 새 차를 막 뽑은 참이어서 그런 게 생각난 것 같은데, 아닌 게 아니라 정말 당황스러웠다. 자본주의 세상에서 많은 자본을 소유하는 것이 왜 중요한지를 설명해줘야 한다고? 도대체 나의 역할이 어디까지인가? 순간 머릿속에 스쳤던 생각은... 단순한 답답함을 넘어선 것이었다. 바로, ‘아 진짜 큰일났다.’ 하는 생각이었다.
여태 엄마아빠로부터 받은 수많은 경제적 조언이 떠올랐다. 30살이 될 때까지 나는 내 삶의 방향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로 엄빠의 조언을 받아들이고 살았던 것이다. 주로 이런 식이었다.
엄빠: 돈은 저축해야 하는 거야
나: 그렇구나
엄빠: 공부를 잘하면 돈은 그냥 따라오는 거야
나: 그렇구나
엄빠: 대학 잘 가면 남자친구가 그냥 생기는 거야 등등.
나: 그렇구나 .. (?)
순간 모든 것이 이해가 됐다. 왜 내가 직장생활을 시작하기 전까지 주식앱을 깔아본 적이 없고, 부동산 책을 멀리해왔으며, 석사과정을 착실히 마치고, 충실한 회사원이 되었는지. 왜 나는 자본가가 아닌 노동자로서의 삶을 사는가에 대한.
인지하고 있지 못했지만, 엄빠로부터 반복적으로 들은 수많은, 형태는 다르지만 뿌리는 같은 저 조언들은 직간접적으로 나를 옭아매고 있었으며, 부자로 가는 경로에서 나를 꾸준히 이탈하게 만들었던 것이었다. 그 결과, 30년 간 나의 모든 시간과 비용을 들여 더욱더 훌륭하고 더욱더 충실한 노동자가 되는 법을 연마하고 있었다.
내가 바라는 것은 정작 자본가로서의 정체성이었는데 말이다.
머리를 얻어맞은 것처럼 정신이 멍했다.
‘내가 내 인생에 무슨 짓을 한 거지?’
자. 여태까지 내가 부모님을 설득하려는 시도를 한 것은 어디까지나 우리가 세상을 같은 방식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동질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같은 현실을 겪고 있지만 그렇다고 그 경험까지 동일한 것은 아니었다. 우선은 경제적으로 도달하고 싶은 지점과 경제를 바라보는 시각이 전혀 달랐다.
‘돈의 심리학’의 저자 모건 하우절는 다른 역사를 경험한 사람들은 절대로 서로를 이해할 수 없다고 역설했다. 우리 엄빠는 경제위기와 극도의 가난을 경험해보았고, 초고도 성장기도 경험했다. 그러면서 그 변동성에 그만 질려버려, 돈은 예측가능한 수준으로 들어오고, 우리의 생활 수준을 딱 그 예측가능함 속에서 영위한다면 된다는 결론을 내린 모양이다. 삼성에서의 삶을 버리고 공무원의 삶을 선택한 그였다.
다시 돌아가서, 결국 우리 엄빠는 그 돈 벌어서 뭐할래?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정말로 몰.라.서 물어본 것이라는 사실을 이해하게 되었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돈이 없으면 어떤 일이 생길지에 대해서는 수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하지만 돈이 많으면 어떻게 된다는 것은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그래서 ‘돈을 없으면 안되는 것’이라고만 생각하고, ‘많이 필요한 것’이라고 공공연히 말하는 사람은 적었다. 우리는 그래서 막연하게 짐작한다. 돈이 있으면 좋은 옷을 사고, 좋은 음식을 먹고, 편한 곳에서 자고… 즉, 돈은 불편을 해소하는 수단이 아닐까? 라고. 돈과 소비를 동일시하게 되는 순간이다.
그러니, 저 말을 아빠식으로 번역하자면, 나는 그 돈을 가져봤자 소비할 수 있는 시간이 없어, 혹은 나는 사고 싶은게 없어, 그러니 돈이 필요하지 않아. 라는 뜻일 것이다. 돈을 액면적 가치로만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어서 그런 건지는 몰라도, 나는 언젠가부터 돈은 수단으로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삶의 기반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돈은 시간과 이자율의 함수 속에서 스스로 증식하는 최고의 발명품이다. 불로소득이 있다는 것은 삶의 방향과 의미를 근본적으로 바꿔줄 수 있는 엄청난 혁명이라고 생각한다. 아니 이를 확실히 알고 있다.
꿈을 이뤄줄 수 있는 기반. 누군가에게 계속해서 도전할 수 있는 기회를 줄 수 있는 것. 혹시 모를 끔찍한 사고에서 (적어도 하나 이상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한줄기 희망이 되는 것.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되는 것. 나에게 시간을 선물하는 것. 결국… 자유로운 것.
이것이 인생의 본질이 아니면 대체 뭐가 인생의 본질인데 하고 묻고 싶다. 더 많은 돈을 가지고 할 수 있는게 뭐냐 묻는다면 그럼 우린 살아서 뭐하는데 라고 묻고 싶다. 돈이 없으면 안된다고 생각하면서 동시에 돈이 많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형편없는 인생이라고 믿는 것은 신포도를 비난하는 여우격 밖에 되지 않는다.
아빠를 벙찐 표정으로 바라보는 나도 나이 서른에 이걸 막 깨달은 참이다. 진로를 다시 정할수도, 이 나라 교육시스템 어쩌구, 부모의 양육방식 어쩌구 하며 남 탓을 할 타이밍도 놓친 것 같다.
하지만, 앞으로의 인생에서 한 가지는 확실히 정할 수 있었다.
이제라도 나는 돈을 원한다는 것을 인정할 것이다.
매일매일 같은 회사에 출근해 똑같은 자리에 앉아 9시간에서 10시간 가량을 보내고, 내가 될.수.있.었.던 수많은 꿈과 경우의 수에 대해 몽상하면서, ‘나는 내가 원하는 대로 주체적으로 살고 있고 누구보다도 행복하며, 돈은 부차적인 것’이라고 애써 스스로 위로하지 않겠다.
돈은 어쩌다 보니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것이라는 환상을 넘어, 열심히 노력해서 얻어야 하는 것이라고 제대로 인식하고, 최선을 다하겠다.
그리고 이 글은 나의 결심과 계획과 행동과 과정.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의 성공에 대한 기록이다.
앞으로는, 그 돈을 벌어서 뭘할 수 있냐는 엄빠에게 이렇게 대답하기로 했다.
나는 10년 늦게 죽을테니 이제라도 부자될래.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