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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란한 여름의 끝자락과 그렇지 못한 박사과정생의 나날들

by 화햇


아이유의 '바이 썸머' 발매와 함께 여름의 끝자락을 나고 있다.

블루밍턴은 가을 샘 더위(?)가 기승이라 매우 덥다. 더위를 피해 저녁 무렵 남편이랑 달리기를 나갔다. 해지는 풍경이 너무 아름다워서 잠시 멈춰 사진에 담아보았다. 내가 생각하는 '바이 썸머'의 심상 그 자체랄까. 해가 넘어가 선선해진 공기, 아직 땅에서 미쳐 떠나지 못한 더운 기운, 그래서 딱 덥지도 춥지도 않은 온도, 그라데이션으로 수놓인 하늘, 생기 넘치고 푸르른 잔디, 거기서 나오는 풋풋한 풀 내음까지.


여름의 끝자락은 이토록 찬란하기만 한데, 내 인생은 어쩐지 그러지 못한 것 같았으니...... 다사다난했던 한 주를 돌아본다.




인생 네 컷 사진 덕지덕지 붙은 이곳은 나의 학과 오피스 자리다. 심리 상담 센터로 출근하느라 자리를 비웠더니 랩 1년 차 후배가 어디 갔냐며 찍어보내주었다. 개방적인 구조인데다가 어둡고 창문도 없어서 원래는 오피스 자리를 이용하는 대학원생들이 잘 없었다. 늘 외로이 혼자 나가서 일하곤 했는데, 새로 들어온 1년 차 후배들이 이 공간을 애용해 주어 유래 없이 북적북적해졌다. 오며 가며 수다 떨 친구들도 생기고, 쪼르르 와서 물어보는 사람도 있고, 안 왔다고 찾아주는 이도 생기니, 확실히 덜 외롭고 좋다.





이번 학기부터 티칭 대신 연구를 하면서 인건비를 받게 되었다. 새 포지션에 적응하는 게 쉽지 않아 고생 좀 하고 있다. 새 프로젝트를 다음 학기부터 런칭하기 위해서 셋업을 하고 있는데 일이 진짜 너무너무...... 많다. 사람 하나 더 붙여주면 좋겠는데...... 인건비 할당되는 포지션이 한 개 뿐이라 결국 혼자 다 해내야 하는 현실......!


알아내야 할 것도 많고, 미팅도 많고, 미팅 한 번 할 때마다 어레인지하고 자료 준비할 것들이 많아서 몸이 열 개는 돼야 할 것 같다. 콜라보 하는 교수님들도 많아서 아무도 안 잡아먹는데 괜히 더 긴장하고 그러는 중이다. 일을 하나 시작하기도 전에 두 개를 더 던져주는 지도 교수님을 보며 앙심을 품을 뻔한 주였다. 게다가 연구 업무와 별개로 논문은 논문대로 가져오라 하니 학기 초부터 멘탈이 나갈 뻔했다. 티칭 안 하게 됐다고 좋아했던 8월의 내가 어리석었다.



남의 돈 버는 일치고 쉬운 일 없다, 정말.




새로운 포지션을 시작하면서 긴장도 잘 안 풀리고 압도되는 기운을 많이 느껴서 최근 다시 명상을 시작했다. 출근해서 일 시작하려고 하면 할 일이 너무 많다 보니 아침부터 정신이 흩어진 느낌을 많이 받곤 했다. 그러면 잠시 책상에 앉아서 유튜브에 들어가서 가이드 있는 5분 명상, 10분 명상 하나 들으며 마음 챙김을 한다. 그러고 나면 산만하고 초조했던 느낌이 싹 가시면서 차분하게 된다. 뭐랄까, 번잡한 정신을 CCleaner로 정리하고 시작하는 느낌이랄까? 반대로 집에 와서도 자기 전까지 머리가 복잡해질 때면, 매트에 허리를 세우고 앉아서 하루를 정리하는 명상을 하나 듣는다.



삶이 복잡해질수록 머리를 비워야 안녕할 수 있다.





금주의 심리 상담 센터 근무다. 앞서 말한 일들 때문에 주중에 잠을 되게 적게 잔 날들이 있었다. 하루는 너무 못 자서 와, 안되겠다 싶어서 센터에 병가를 내고 하루 쉬면서 잠을 좀 보충했다. 사실 이 센터에 2년째 일하면서 작년 1년 차에 한 해 동안 병가와 휴가를 단 한 번도 안 썼는데, 처음 써보려니 조금 심장이 떨렸다. 이런 사유로 써도 되나? 싶어서 쫄렸지만 도-저히 피로해서 안되겠기에 말한 거였는데, 슈퍼바이저 선생님들과 트레이닝 커미티 스탭들이 내가 처음 병가를 써서 기쁘다고, 잘했다고 해줘서 감동이었다. 안 그래도 늘 차트 쓰느라 혼자 꼴찌로 퇴근하는 것을 보고 스탭들이 걱정을 많이 하고 있는 것은 알고 있었는데, 병가 쓰니 기뻐해 주기까지 할 줄은 몰랐다.


그러면서 슈퍼바이저 선생님이 왜 잘한 거라고 했는지 설명해 주었다. 때로는 상담자 병가 캔슬이 힘들 때는 쉬면서 셀프케어를 해도 된다는 것을 내담자들에게 직접 모델링 해주는 것이기 때문에 잘한 거라고 설명을 덧붙여 주셨다. 너부터 힘들 때 에너지 드링크 때려 넣고 약 먹고 버티면서 내담자에게 힘들 때 쉬어가도 된다고 한다면 그게 와닿겠냐며, 그러면 내담자들에게도 버티라고 피곤해서 쓰러질 때까지 일하라고 해야지 않겠냐고 하셨다.


한국에서 휴가 쓸 때는 눈치코치가 필수였기에 이런 반응에 얼 타면서도 인류애 넘치는 반응에 마음이 녹아내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고 한다. 이해받아서 행복한 순간이었다.


그리고, 심리 상담 센터에 생긴 새로운 문화다. 사실같이 수련하는 박사 동년 차 친구가 도입한 문화다. 이 화이트보드는 공유 키친에 있는 보드인데, 터키에서 온 이 친구가 아침 8시도 전에 출근을 해서 다 같이 마실 커피를 주전자 가득 끓여놓고 시 한 구절 남기고 가곤 했다. 그 아이가 남기고 간 아침 커피와 시 한 구절이 괜히 하루를 여는 기분을 좋게 해주는 것이었다. 스태프들도 따라 하면서 서로 나누고 싶은 영감이 되는 문구들을 나누는 문화로 자리 잡게 되었다.


맨날 7시 59분 59초에 딱 맞춰 출근하면서 가시 돋은 복어 같은 마음을 하고 센터에 들어서던 나를 돌아보게 된 시간이었다.


한 모금의 여유와 낭만이 얼마나 멋이 나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 문화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 회사에서 이런 일을 하면 모난 돌이라 정을 맞을까? 아니면 이렇게 낭만적인 새로운 문화로 직장에서 받아들여질 수 있을까? 하는 물음표를 남기면서 말이다.





이번 학기는 다 다른 형식의 세 개의 집단상담에 참여하게 되었다. 구조화된 심리교육 집단 하나, 특정한 테마의 지지 집단 하나, 그리고 대인관계 과정 집단 하나 이렇게다. 주제도 형식도 다 달라서 흥미롭다. 미국 대학은 집단 상담이 어떻게 이렇게 잘 굴러가는지 참 신기하다. 모집도 원활하고, 참여하는 아이들도 말만 잘한다. 어려서부터 토론/토의 형식에 워낙 노출이 많이 돼서 그런가, 한국에서 집단 상담을 하면 모집도 어려울 뿐만 아니라 집단원들이 입 떼는 데에만 몇 달이 걸리기도 하는데, 미국은 아이들이 첫 회기부터 거침이 없다. 신기한 부분이다.



모쪼록 이제 막 시작한 집단들에서 이번 학기도 많은 영감을 받고 배우고 올 수 있기를 기대한다.



이번 주는 확실히 그로기였던 게 운도 지지리도 없었다. 집 물탱크에서 물이 새서 마루 갈라진 홈에서 계속해서 물이 새어 나왔다. 처음에는 집안 바닥 곳곳에 물이 있길래 남편이 아무 잘못도 없는 나에게 뒤집어 씌우며 내가 물을 흘리고 다녔다고 하는 게 아닌가? 그런데 사실 원래 물 많이 흘리고 다녔던 것이 사실이라 나도 그런 줄만 알았다. 그런데 이상하게 광범위한 곳에서 닦아도 닦아도 물이 계속 나오는 것이었다. 이상하게 생각하고 물탱크가 있는 창고를 열어봤는데 웬걸, 아주 그냥 홍수가 나있는 것이었다. 에효!!!!!!!!!


바쁘고 힘들어서 말라죽어가는 마당에 홍수가 웬 말이냐 싶었다. 관리사무소 비상 핫라인에 연락해서 물이 샌다는 것을 알리고, 온수가 특히 많이 샌다고 하여 온수를 셧다운하고 물탱크에 호스를 연결해서 물을 다 비웠다. 덕분에 다음날 아침 출근할 때 냉수 목욕을 하고 갔다. 이튿날 물탱크 전체를 갈고, 관리사무소에서 빌려준 초강력 선풍기와 제습기를 며칠 내내 가동해서 바닥을 말렸다. 하필 바빠 죽겠는 학기 중에 이게 무슨 날벼락인가 싶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선풍기와 제습기 소리가 너무너무 시끄러워서 출근하느라 집에 거의 없을 때 샌 게 나은가 싶기도 했다.



모쪼록 여러모로 아주 정신이 쏙 빠질 뻔한 한 주였다.




주말에는 우리 박사 동기의 생일이었다. 작년에 결혼해서 결혼식도 갔던 친군데, 남편이 너무 다정하게 잘 대해주는 것을 보니 마음이 그득-하고 좋았다. 이친구의 생일을 축하해 주기 위해서 열두 명이 모여서 꽤나 큰 생일 파티였다. 나름 이 시골 타운에서 가장 핫한 레스토랑에 모여서 맛있는 브런치도 먹고 즐기는 시간이었다. 미국은 신기한 게, 친구 생일파티 같은 것이 있으면 친구들만 모이는 것이 아니라 파트너들도 자유롭게 참석하게 한다. 하여, 짝지들끼리 모이다 보니 더 인원이 많아졌다.


나는 아직 이런 문화가 낯설고 어색하다. 특히 배우자들이 오면 모르는 사람들이 많아져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특히나 나 혼자 외국인인 이런 자리에서 대화 주제 찾기가 하늘에 별 따기라, 단전에서부터 대화 소재를 찾아 영혼까지 끌어모으느라 식은땀이 난다. 그래도 어쨌든 열심히 자리를 채우고 왔다는 것에 의의를 둔다.









역시나 가장 마음이 편하고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것은 우리네 한인 동포들이다. 잠시 날이 선선해진 때가 있었는데 그때 완연한 가을이 온 줄 알고 야외 피크닉을 잡았다. 그런데 웬걸, 김밥 재료도 다 사두었더니 갑자기 기온이 33도까지 오르게 된 것이다. 슬펐지만 그 길로 야외활동을 취소하고 우리 집 시원한 에어컨 밑으로 헤쳐모였다. 우리 동네 최고 귀요미 조카와 한국인 친구들과 종종 보곤 하는데, 볼 때마다 힐링이다. 하루가 다르게 커가는 조카는 너무너무 귀엽고, 애쓰지 않아도 쉽게 찾을 수 있는 대화 소재와 공감대들이 나를 편안하고 즐겁게 해준다.



행복이 별거냐 물으면 나에게 있어 행복은 사랑하는 사람들과 맛있는 음식 먹는 것, 그뿐이라고 하겠다.




유난히 소셜이 많았던 근황이다. 마지막은 우리 랩 1년 차 후배 부부다. 지난번 후배네 집에 초대받아 너무나 융숭한 터키 음식 코스를 대접받아서 이번에는 우리 집에서 한식으로 보답하게 되었다. 포크와 나이프도 구비해주었는데, 어떻게든 서툰 솜씨로 젓가락질을 하는 게 너무 웃기고 귀여웠다. 그간 지도 교수님이 마음에 안 차면 학생을 안 뽑아버려서 후배 없이 혼자 2년 동안 막내를 하느라 힘겨웠는데, 비로소 3년 차에 첫 후배를 맞이하게 되어 얼마나 반가운 지 모른다. 꼭 이런 사악한 의도만은 아니고, 오래 기다린 만큼 더 반갑고 귀한 손님 같은 느낌이랄까? 되게 잘 해주고 싶다.


1년 차 후배도 코호트에서 혼자 외국인 학생이라 첫 학기 적응하면서 이래저래 겪게 되는 어려움이 많다고 했다. 외국인 학생이 많지 않은 학과 특성 상, 미국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나 홀로 외국인 학생으로 헤쳐나가는 어려움을 너무 잘 알아서 전우애가 생긴다. 모쪼록 매일 부대끼면서 지지고 볶을 직속 후배가 생겨서 기분이 좋다.


이렇듯 돌이켜보니, 다사다난하고 지난한 주였다. 글을 쓰면서 야 비로소 뭐가 어떻게 힘들었었는지 선명해지면서 정리가 되는 기분이다. 또 지난했던 나날들 중에서도 마음 푸근하고 따스했던 순간들, 사람들을 다시 한번 기억에 각인해 본다. 새로 오는 주도 나를 기다리는 일들만 많다. 두렵고 걱정되지만 지난주보다 딱 한 걸음만 더 괜찮게 보내길 바라보며, 포스팅을 마무리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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