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미우 Mar 29. 2022

우리는 그 뒤로도 오래도록 행복했습니다.

술 취한 겨울밤 마로니에 공원에 앉아서 하는 생각


조금 많이 취한 밤. 이런 날엔 으레 그렇듯이 오늘도 마로니에 공원 안쪽에 자리한 아르코 미술관 앞의 벽돌 계단에 걸터앉았다. 주머니 속에서 에어팟을 꺼내 귀에 꽂고 내가 10년째 술을 마시고 집에 돌아가는 길엔 꼭 듣는 음악을 찾아 틀었다. 1000번은 들은 것 같지만 여전히 사랑하는 <Time to pretend-MGMT>의 청량한 전주가 흘러나오고, 나는 고개를 들어 익숙하디 익숙한 이 공원 안 풍경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시린 겨울밤 특유의 냄새를 크게 들이쉬니 몸속에서는 반대로 뜨거운 무언가가 뱅뱅 도는 느낌이고, 후 욱 후 욱 내쉬고 있는 내 숨이 제법 거칠었다. 갑자기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선 'ㅇㅇ대소동'이라고 말해보면 짓궂은 동화 같아진다는 말이 생각이 나서 속으로 만취 대소동! 외쳐본다. 항상 터진다. 풉 하다가 지금 내가 웃고 있는 건지 한숨을 쉬는 건지 도통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내 시선은 까르르 웃으며 지나가는 사람들을 스쳐 이 장소에 중첩되어 있는 순간들로 향했다.


파동 방정식을 제안한 물리학자 에르빈 슈뢰딩거의 유명한 사고 실험인 상자 속의 고양이 역설에서, 건강한 고양이와 50%의 확률로 방사능을 내뿜는 우라늄이 들어있는 상자를 열기 전까지는 상자 속의 고양이는 살아있지도, 죽어있지도 않은 상태이다. 이는 반쯤 죽었다는 말과는 아예 다른 말이다. ‘살아있는 고양이’ 파동과 ‘죽은 고양이’ 파동이 합쳐져 있는, 즉 삶과 죽음이 중첩된 상태로 있다는 것이다.


이 고양이 역설에 대한 현대 물리학의 몇 가지 해석이 있다.

가장 먼저 정설로 받아들여지는 코펜하겐 해석에서, 미시세계에서 입자는 있는지 없는지 모르며, 관찰하는 순간 존재한다. 입자는 모든 곳에 존재하는 중첩 상태에 있다가 ‘관찰’하는 순간 파동 함수가 붕괴되어 상태가 확정되고 한 곳에 있게 된다. 음 낭만적인 해석은 아니네.

휴 에버렛은 다세계 해석(Many World Interpretation)을 내놓았는데, 파동 함수가 붕괴되면서 세상이 확정되는 것이 아니라, ‘관찰’을 할 때마다 슈뢰딩거 방정식을 따라 움직이고, 그에 따라 나올 수 있는 모든 가능성으로 갈라져 unitary 진행하며 동시에 존재한다. 즉, 무한하게 다중 우주가 생성된다.

이 외의 다른 해석들도 있지만 어느 해석이 맞는지는 실험으로 증명할 수 없고 모두 똑같은 물리적 결과를 낳는다. 내가 아는 물리학 지식은 여기까지라 더 모르겠지만 아무튼 다세계 해석은 가장 단순하기도 하고 좀 낭만적으로 느껴져서, 나는 종종 처음 이 공원을 지나 출근하던 날 ‘부디 이곳에서 보낼 몇 년을 후회하지 말자!’ 씩씩하게 다짐하던 순간으로부터 무한으로 갈라진 나의 우주들을 생각한다.



기억에도 입자가 있을까.

밤하늘 너머 저 어딘가 멀리의 ‘나’들이 멀게 느껴질 때면 여기 마로니에 공원에 앉아 이 장소에 동시에 존재하는 순간들을 수없이 쪼개 unitary 진행시켜본다.  핸드폰을 붙잡고 눈물을 뚝뚝 흘리던 어느 순간도, 같은 궤도를 도는데도 결국 랑데부(Rendez-vous)를 이루지 못한 대화에 못내 아쉬웠던 밤도, 늦은 밤과 맞닿아 있는 분홍빛 하늘을 보며 퇴근하던 새벽도, 집에 들어갈 수 없어 한참을 이곳에서 서성이게 만들던 그런 감정을 느꼈던 순간도.


‘만약 ~했다면?’의 상황과 감정들을 일일이 구체적으로 상상할 필요조차 없다. 분명히 모든 것이 즐거운 세계도 갈라져 존재한다. 일어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는 것들은 분리된 세계를 통해서 모두 실현되기 때문에 다세계 해석의 관점에서는 확률의 의미가 사라진다. 무수히 많은 우주에서 과거에도,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행복하고 즐거울 확률은 반드시 1인 것이다. 이게 내가 들려주고 싶은 동화이다. 양자역학과 다세계 해석, P=1의 행복.



여기까지 생각을 하면 말이 되는 소리인가 싶기도 한데, 아무래도 지금은 상관없어진다.

벌써 한 시간 째 <Time to pretend>가 반복 재생되고 있고, 오래 앉아있었더니 엉덩이가 시리네. 집에 가야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