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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디짱 Oct 13. 2021

고독한 도시락가

회사 일이 시들한 내가 요즘 가장 공들이는 건 바로 도시락 싸기다. 10년 차가 되니 정말로 일하기가 너무 싫어서 땡깡만 부리는데, 몸이 무겁고 배가 부르니 더더 일하기가 싫다. 조금만 버티면 휴직이라는 생각에 열심히 해야지 하다가도 딱 욕 안 들어먹을 만큼만 내 할 일 하자가 모토가 되어 그까이거 그냥 대~충 하고 있다. 이런 생활에 활력이라고는 점심시간뿐이니, 그 정성을 도시락에 쏟아붓는 것이다.


만약 내가 9시 출근 6시 퇴근의 직장인이었다면 바쁜 아침 도시락을 싸기 쉽지 않았을 텐데 나는 10시 출근 7시 퇴근이라 여유가 있다. 또 모든 반찬을 내가 준비하는 게 아니라 손맛 좋은 옥련씨가 제철 채소에 국산 양념으로 버무린 밑반찬이 항상 레디 상태기 때문에 훨씬 수월하다. 역시 민폐력 오지는 손녀랄까.


소디도시락의 역사는 전 직장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혼자 자취할 때였는데 맨날 저녁을 빨리 사 먹고 일을 하러 들어와야 했다. 허겁지겁 먹으니 소화도 안되고 살은 자꾸 찌고. 부장이랑 같이 먹기도 싫고. 소꿉장난처럼 도시락을 싸기 시작했다. 이직하고 나서는 점심을 구내식당에서 사 먹었는데, 발꼬락이 뽀라진 석 달 동안 식당에 갈 수 없어서 도시락을 싸댕겼다. 그리고 지금은 백신도 안 맞은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어조치로 혼자 도시락을 까먹는 것이다.


"맛있는 취사를 시작합니다. 쿠쿠~" 나를 깨우는 쿠쿠 여사의 알람이 울리면 어기적 어기적 일어나 옥련씨에게로 향한다. 옥련씨는 이미 새벽 5시에 일어나 6시에 동네 한 바퀴를 돌고 쌀을 씻고 불려놨다. 쌀은 2컵. 우리 둘이 아침을 먹고 내 도시락까지 싸면 딱 맞다. 난 눈꼽도 안 뗐는데 부지런한 옥련씨는 가지도 쪄서 손으로 찢어서 조물조물 무치고 더덕도 새콤달콤하게 버무려놨다. 세수를 한 나는 된장국을 끓인다. 사실 옥련씨가 호박이며 양파며 재료 손질을 다 해놔서 내가 했다고 하기도 민망시럽지만. 옆에서 도시락에 넣을 치킨너겟도 굽는다. 비비고 동그랑땡, 꼬마돈까스를 굽는 날도 있다. 하지만 옥련씨는 내가 구운 인스턴트엔 그닥 젓가락질을 잘하지 않는다.


밥을 다 먹고 각종 반찬들을 도시락통에 가지런히 담는다. 처음 도시락을 쌀 때 큰맘 먹고 샀던 분홍색 조지루시 보온도시락. 일본녀자들은 이렇게 밥을 작게 먹나 할 정도로 통이 작다고 느꼈는데 이젠 이 정도가 적당하다. 이케아 보를 깔고 인물사진 모드로 찰칵. 오늘도 실물보다 잘 나온 도시락에 흐뭇해하며 인스타에 #직장인도시락 으로 업로드. 오늘 나의 인스타 도시락 친구들은 뭐 쌌지. 무슨바안찬~ 개구리 바안찬~ 오늘도 잘 먹겠습니다 소디도시락!


비비고동그랑땡은 진리 옥련씨 무말랭이는 아트
계란말이는 항상 옳다 알 이즈 웰!!
이날 역대급 도시락 돈까스와 더덕무침의 꼴라보
옥련씨가 조물조물 무친 가지나물과 유물 깻잎짱아찌의 향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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